스쳐 지나갈 뿐,
이제는 어떤 이도 발을 디디지 못하는 내동댕이 쳐진 조그만 간이역이 갈촌부락의 입구를 막아서 있다.
땡땡땡.
굉음을 울려대며 시건방을 떨던 삼등열차는 오래전에 기억의 뒤편으로 사라지고, 머물던 자리에는 아슴푸레한 메아리가 똬리를 풀어헤치고 있다.
사라지거나 떠난 이들은 저마다 한둘씩 갈촌역사의 거무죽죽한 침목을 뜯어가거나 녹슨 철로를 지고 갔다. 떠날 이 조차 없어질 즈음 마침내 갈촌역사는 앙상한 뼈만 남긴 채 주저앉고 말았다.
이 주저앉은 갈촌역으로 새색시 김 순이 씨는 열아홉의 꽃다운 나이에 일면식도 없는 생면부지의 주정뱅이 신랑을 만나기 위해 발을 디뎠었다. 발발 떨던 가냘픈 순이 씨의 손은 아버지에게서 억척스러운 시어머니의 굳은살 박힌 메마른 손으로 넘겨졌다.
낯선 곳, 낯선 이. 처음으로 봉산 마을을 벗어나 첫발을 디딘 이방의 땅이 시조모, 시어머니 내외와 초뺑이 신랑이 기다리는 갈촌이었다.
꽃같이 예뻤던 김 순이 씨는 육십 년을 넘게 산 갈촌에서 고작 십구 년을 살았던 고향땅 봉산댁으로 머물다 작년에서야 고단한 생을 내려놓았다.
육 남매의 자식들 또한 누구 할 것 없이 순이 씨가 첫발을 디딘 곳에서 제 어미의 왔던 길을 따라 흩어져나갔다.
깡촌의 조그만 간이역에는 긴 세월 이별과 재회, 눈물과 미소, 기다림이 눈꽃처럼 피었다 지고를 이어갔다.
기차가 더 이상 멈추지 않는 갈촌역에는 양손 바리바리 싸 짊어지고 꼭두새벽 번개장터로 나서던 거슴츠레 반쯤 감긴 눈의 여인들이 자취를 감추었다. 앳된 김 순이 씨의 청춘을 삭이고 꼬부랑 할머니가 될 때까지 지문이 닳도록 발품을 팔았던 간이역, 그 삐걱거리던 문이 굳게 닫혔다.
김 순이 씨는 자신이 비둘기호 삼등열차랑 닮았다고 생각했었다.
크든 작든, 타고 내리는 사람이 있든 없든 꾸역꾸역 더딘 걸음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던 지난 날들, 숱한 이별과 기다림 속에 갇혀 괘도를 이탈해 볼 엄두조차 내지 못한 채 제자리만 맴돌다 저물어버린 인생이었다.
단 한 번도 자신이 주인공이 되어보지 못한 봉산댁은 검표를 끝낸 구멍이 뚫린 기차표처럼 구겨지고 잊혔다.
작은 시골마을 갈촌의 입구에는 갈촌역이 스러질 듯 버티고 있다.
김 순이 씨의 궤적을 모두 지켜본 키 큰 플라타너스 나무를 껴안은 채 말이다.
언젠간 가겠지 푸르른 이 청춘
지고 또 피는 꽃잎처럼
달 밝은 밤이면 창가에 흐르는
내 젊은 연가가 구슬퍼
가고 없는 날들을 잡으려 잡으려
빈손짓에 슬퍼지면
차라리 보내야지 돌아서야지
그렇게 세월은 가는 거야
나를 두고 간 님은 용서하겠지만
날 버리고 가는 세월이야
정 둘 곳 없어라 허전한 마음은
정답던 옛 동산 찾는가
- 산울림; '청춘'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