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가는 풍경...2

빨강 우체통

by 김석철






"석철아, 니 성적표 우리 집으로 왔다, 퍼뜩 찾아가라. 이상하네, 니 성적표가 우예 우리 집으로 왔노?"

우사도 이런 개우사가 따로 없다. 골목 입구를 쩌렁쩌렁 울리며 동네사람들 다 들어란 식으로 친구의 형이 목청껏 외쳤다. 곁에 몰려선 선배들은 작당이라도 한 듯 배를 잡고 낄낄대며 석철아, 성적표 찾아가란다를 복창했다.

그날 저녁 귀에서 고름이 날 정도로 엄니는 잔소리를 해댔다. 동네 창피해서 이사를 가든지 해야겠다면서 사정없이 등짝을 후려갈겼다.

고교 때 우리 모교에서는 성적표를 우편으로 보내 부모님 확인 도장을 받게 했다. 석차를 뒤에서부터 헤아리는 게 빠른 돌대가리들은 너내 할 것 없이 자기 집이 아닌 가까운 친구의 집 주소로 성적표를 보냄으로써 피차간의 우정을 돈독히 다졌다. 사는 게 바빴던 엄니는 옆집 아무개 성적 얘기가 나와도 자기 자식도 성적표가 나왔을 거란 생각까지는 미치지 못했는지 별 반응이 없었다. 뒤통수를 오지게 맞은 엄니의 처절한 응징에는 아랑곳없이 대타 수취인을 물색해야 했다.


녹슨 공구통에 빨간 락카를 뿌리고서 하얀색으로 엽서봉투를 그려 넣었다. 우체국의 상징인 세 마리의 제비를 그릴까 하다 내 어쭙잖은 솜씨로는 자칫 모태 위에 올려진 참새 꼴 날까 봐 지레 꼬랑지를 말고 말았다.

우편엽서든 제비든 폼만 그럴싸했지 정작 기다리는 편지는 종무소식이다. 있으나마 나한 우체통 속에는 귀촌 시의 로망을 비웃는 각종 공과금 청구서만 소복이 쌓여있다. 우체통이 되려 살아 숨 쉬는 한 인생 채무자의 자리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일깨울 뿐이다.




기다림도 설렘도 끝났다.

날 저물도록 썼다 지웠다.

꽃편지지에 얼룩진 눈물 자국이 열꽃처럼 피던 날, 내 첫사랑은 떠났고 빨간 우체통의 손짓에 애써 눈을 돌려야만 했다.

작은 소녀였다.

"이거..."

발그레한 볼의 단발머리 소녀가 쫓기듯 내밀고 후닥닥 사라져 간 자리에 은은한 아카시아 향내가 하늘거렸다.

휘뚜루 흘려 쓴 글씨, 주소였다.

떠나는 버스의 뒤로 어여쁜 소녀가 폴짝폴짝 작아져 갔다.

광고의 카피처럼 왔다 시처럼 떠나간 첫사랑의 문학소녀는 긴긴 세월을 편지지 속에서 울고 웃었다.

빨간 우체통이 삼킨 못다 한 연가들. 어깨에 둘러맨 집배원 아저씨의 커다란 가방 속에서 한껏 부풀었을 그녀의 꽃편지...

한여름밤의 꿈이 분명하다.

골목 어귀에서 사라져 버린 빨강 우체통이 그렇게 말한다.

꿈을 꾼 거라고.


또 하나가

잊혀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