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이름은 마왕...1

by 김석철



세금고지서보다 무서운 통고는 결혼 축의금과 사망 조의금 납부 독촉장이다.

국가 세금이나 은행 빚은 떼어먹을 망정 축, 조의금 납부를 쌩까면 자칫 사회생활 더럽게 하는 인간으로 한방에 훅 갈 수도 있으니 웬만하면 손이 바들바들 떨리더라도 눈치껏 주머니를 털어야 한다.

어릴 때는 담배 안 피고 동네 어른들께 인사만 잘해도 뉘 집 자식 참 착하네 소리를 들었는데 함께 뒤섞여 살아가는 조직 생활을 할라치면 여러모로 피곤하고 신경 쓰이는 게 많다. 이런들 어떠며 저런들 어떠하리 간 슬개 다 빼놔야 할 때도 숫하다. 적당히 묻어가는 일, 참으로 쉽지가 않다.

처세란게 별거 아니다. 초상집에서는 울고, 경사집에서는 웃는 것, 낄 데 안 낄 데를 아는 것, 모난 돌 앞선 돌이 정 맞는다는 사실, 강한 놈 앞에서는 대가리 팍 쑤그리고 아리가또 잘하는 거. 뭐 이 정도면 적어도 중간은 간다.

우리 집의 가훈이 '나대지 말라'인데, 이 험악한 세상에서 기가 막히게 슬기로운 구호가 아닌가. 사돈에 팔촌, 집안에 그 흔해빠진 '사'자 달린 높으신 양반 하나 없어도 대대손손 가늘고 길게 잘 살아남은 이유는 총대라는 걸 메 본 적이 없는 처세에 밝았던 조상님들 은덕이다.

낄 데 끼는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경조사 때다.


오늘이 바로 그날이다. 바다 건너고 산 넘고 물 건너 먼 청주까지 가야 하는 날이다. 이월인가 삼월인가, 하여간 하도 오래전에 받은 연락이라 자칫 까먹을 뻔했었다. 달력에 시뻘겋게 동글뱅이 몇 겹으로 치고 당구장 표시까지 해 뒀다. 낫살 꽤나 드신 행님이 밴댕이 소갈머리라 올매나 잘 삐치는지 여러모로 몸을 사려야 한다.

억시기 친하냐? 친하다 하기도 그렇고 또 안 친하다 하기에도 모호하고...참 여러모로 애매하고 피곤한 양반이 아닐 수 없다.

친함과 별로 안 친함의 딱 중간에 끼여있는 삐돌이 행님의 뒤늦은 딸레미 결혼식 축의금은 도대체 얼마를 넣어야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금액일까. 먼 길 가서 머릿숫자 한 명 더 채워주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해야 할 판 아닌가? 왔다 갔다 기름값에 톨게이트비, 일곱이나 되는 하객이 출동하는데 오가며 휴게소에 들러 쓴 커피에 꼬깔콘 하나 정도는 먹어줘야 될 거고.

5만 원은 좀 짜쳐보이고, 10만 원? 요즘 예식장 뷔페 한 끼 밥값이 얼만데. 20만 원은 친분 등급상 썩 내키지가 않고. 15만 원이 안성맞춤 십문칠일듯한데, 요상스럽게도 오만 원 봉투는 있어도 15만 원 경,조사비는 들어본 적이 없어서 이래저래 안 해도 될 통빡을 굴리며 골을 싸매고 있다. 친인척 간이나 친분의 정도가 명확하게 선이 그으지는 사이라면야 말 그대로 지갑 사정이 닿는 대로 품앗이 아니면 성의를 보이면 되지만, 삐돌이 행님의 경우처럼 애매한 관계가 늘 문제다.

정찰제라든지 협정가격 같은 기준이라도 만들어야 할 판이다.

슬금슬금 눈치만 살피던 사람 좋은 동생이 답답했는지 바짝 붙어 서서 속삭이듯 입을 땠다.

"행님아, 올매를 넣어야 되는 기고?"

"낸들 아나? 당신 꼴리는 대로 하셔."

"말씀 참 성의껏 하시네. 골이 띵하구마는."

은둔자인 나와는 달리 마당발인 친구 녀석은 사흘이 멀다 하고 초상집, 결혼식장으로 밤낮없이 쫓아다닌다. 감투도 한둘이 아니다.

"도대체 너그는 한 달 평균 경조사비가 올매나 나가노?"

"억수로!"

별 싱거운 놈 다 본다는 표정이었다.

동생이 눈치 없이 끼어들면서 말을 보탠다.

"그래도 저 행님은 초상을 두 번이나 쳐서 본전은 건졌을끼라. 아들레미, 딸레미 시집 장개보내면..."

"내가 그때까지 살랑가도 모리겄다."

"내 같으면 그동안 뿌려놓은 기 아까버서도 못 죽는다. 본전 아까버서 우예 눈을 감겠노."

떠들썩한 농지거리에 상관없이 한켠으로는 가벼운 체증이 걸린듯한 답답함이 밀려왔다.

입장료와 식권을 맞교환하고서 고만고만한 짧은 공연 한 편 본 뒤 결국 자기가 낸 돈으로 식사하고 썰물처럼 빠져나가는데 온 집안과 친인척 지인들이 한바탕 법석을 떤 것이다.

새신랑은 만세 삼창을 신나게 외쳤지만, 들러리였던 나는 운전해서 돌아갈 네 시간 길 걱정이 앞섰다.


카톡을 열었다. 또 시집 장가, 초상이 났다는 연락이다. 징하다. 이 자는 또 누구란 말인가? 동창생임은 분명한데 성 이름은 말할 것도 없고 어떻게 생겨먹었는지 조차 깜깜한 자다. 거래상 한 두 차례 만난 적이 있는 스쳐 지나가는 별 볼 일 없는 인연이다.

하단에는 어김없이 계좌번호가 떡하니 박혀있다. 참석은 안 해도 용서를 해줄 테니, 축, 조의금만큼은 까먹지 말라는 통지서 같다.

동창회를 비롯한 단체나 모임, 개인 카톡으로 발신한 알림글은 의례적인 일괄 통보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애매한 관계에서는 연락을 받고도 마냥 나 몰라라 하기에 영 석연치가 않다.

정황이 없는 상태에서 자잘하게 가려가며 통보를 하는데 따르는 현실적인 애로야 충분히 납득이 되지만, 우리 나이엔 눈만 뜨면 부모님들 부고 소식에 자녀들 결혼 연락 때문에 등골이 휜다는 점도 이해를 해줬음 싶다. 은퇴와 맞물린 코 앞이 석자인 가련한 신세임을.


(글이 너무 긴 관계로 부득불 2편으로 쪼개야겠음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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