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가는 풍경...4

땅콩, 계란이 있어요.

by 김석철




마산역 출발, 중리역, 산인역, 함안역, 군북역, 평촌역, 반성역, 원북역, 진성역, 갈촌역, 남문산역, 계양역, 잘 가다 옆으로 빠지면 삼천포, 진주역으로 드디어 비둘기호가 화통 삶아 먹을 듯한 경적을 내지르며 힘겨운 걸음을 멈춰 세운다.

역이라고 하는 역은 죄다 엎어졌다. 늘 맥 한 번을 못 추고 구석탱이로 쫓겨나서는 날쌘 다른 열차가 꼬리를 감출 때까지 우두커니 발목이 잡혔다. 비둘기호는 삼등 완행열차였기 때문이다.

그러든지 말든지 어차피 세월 따위는 까맣게 잊어버린 느림보 열차와 승객들이었다. 승객 중에는 곧 흰쌀로 바뀔 암탉도, 누런 박스 안에서 낑낑대는 갓 젖을 땐 강아지도 한 자리씩을 차지했다. 애미에게서 멀어지는 백구 황구나 늙은 할매도 눈이 슬프기는 마찬가지다.


딸랑 딸랑 딸랑.

까맣고 노란 줄이 번갈가가며 그어진 차단봉이 요령 흔드는 소리에 맞춰 기지개를 켜면서 천천히 내려앉는다. 갓밝이 시간이 아직도 한참이지만 새벽은 느려터진 삼등열차의 꽁무니를 움켜쥐고 바지런히 쫓아온다.

이고 진 보따리에 꼬부랑 할매의 굽은 허리가 한층 애달픈 꼭두새벽의 풍경이 차단봉과 함께 멈춰있다.


작은 시골마을 간이역, 그 말할 수 없는 적적함.

째깍이는 초침 소리, 삐걱대는 바람, 훌쩍이는 이별의 소리, 긴 하품이 끌고 다니는 졸음 소리...새벽이 열리는 소리, 간이역을 깨우는 소리.

나오셨어요? 하나마나한 소리.

봉산댁이 아푸다카더마는 살만한 갑지?

안녕하십니꺼. 그래, 니 부산서 공장 다닌다 카더마는?너그 아부지한테 우짜든 둥 잘해라. 인자 올매 몬살겄더라. 나뿐 아들하고 어불리 댕기지 말고.

꽤에엑.

아득히 먼 곳을 달려온 기적소리, 소리, 소리들. 조그만 간이역의 새벽은 언제나 그랬듯 그림이 아니라 여린박으로 시작되는 못갖춘 마디의 노랫말로 열린다.


딸깍, 찰깍. 버려진다.

맨 그 얼굴이 그 얼굴인데 굳이 왜 필요한지도 모를 누리끼리하고 빳빳한 기차표에 구멍이 뚫린다. 번개시장에서 팔 시금치가 들어앉은 보따리가 구겨지듯 객실 귀퉁이에 던져지고, 깨금발로 끙끙 앓아대며 선반 위에 꾀죄죄한 가방을 올려 놓는다. 꼬부랑 할매의 시금치가 운 좋게 임자를 잘 만난다면 만 오천 원쯤 손에 쥘 것이다. 마산역전 번개시장의 새벽 다섯 시는 이미 부산한 아침이다. 삼등열차의 시간에 맞춘 진화가 이루어진 곳, 곱디곱던 새댁이 꼬부랑 할머니가 되도록 발품을 판 곳이다.


비둘기호, 통일호, 무궁화호를 끝으로 나의 기차여행기는 멈춰 섰다. 새마을호, 고속열차는 빨라도 너무 빠르다. 뾰족하고 날렵한 생김새가 시간도, 바람도 거침없이 쪼개버릴 것만 같다. 그 속에는 느리게 살만한 것들이 버텨낼 자리는 허락되지 않을게 분명하다. 느림이 곧 거추장스러움이 되는 땅, 내가 설 자리는 아닌 성싶다.

"옴마, 나 저거..."

계란, 땅콩. 구운 오징어도 좁은 수레에 실려있었는지는 가물하다. 환타인지 오란씨인지 보채는 고사리 손에 쥐어진다. 어머니는 괜한 눈치가 보였는지 달걀을 하나 더 손에 골라 잡는다. 마주 앉은 꼬부랑 할머니가 고놈 참 똘똘하게도 생겼다며 연신 까까머리를 쓰다듬는 주름진 손으로 삶은 계란이 건너간다. 만다꼬 이런 거를 다, 손사례를 치는 눈매가 참 선한 할매였다.


다행이다.

삼등삼등 완행열차 순천행 비둘기호는 거의 직각의 딱딱하고 등받이 높은 파란 의자를 앞, 뒤로 뒤집어 바꿀 수가 있었으니 말이다.

미운 놈, 걷어 찰 놈은 뒤통수만, 이쁜이 고운이는 무릎을 맞대고서 마주 보며 갈 수 있는 특수 의자.

꼬맹이의 조막손에 들린 꼬부랑 할머니의 꼬불쳐둔 쌈짓돈 100원은 삼등삼등 완행열차의 마주 볼 수 있는 의자랑 굼벵이 같은 느림보 걸음 때문이었다.


자 떠나자 동해바다로

삼등 삼등 가는 열차

기차를 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