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따먹기, 자치기.
술래잡기 고무줄놀이 말뚝박기 망까기 말타기
놀다 보면 하루는 너무나 짧아
아침에 눈뜨며 마을 앞 공터에 모여
매일 만나는 그 친구들
비싸고 멋진 장난감 하나 없어도 하루 종일 재미있었어
좁은 골목길 나지막한 뒷산 언덕도 매일 새로운 그 놀이터
개울에 빠져 하나뿐인 옷을 버려도 깔깔대며 서로 웃었지
어색한 표정에 단체사진 속에는 잊지 못할 내 어린 날 보물들
(자전거 탄 풍경의 '보물' 가사 중)
해거름 녘 서산이 붉게 물들고 땅거미가 채비를 할 즈음이면,
"길동아, 밥 묵자."
철수야, 영희야...
골목길의 왁자지껄하던 메아리들이 어둑발로 지워진다.
죽상이 된 철수의 터벅걸음으로 보아 단단히 심통이 난 모양이다. 되는 게 하나도 없는 일진이 오진 날이다. 형아가 빳빳한 달력 뜯어 만들어준 대빵 큰 천하무적 딱지를 잃은 날이다. 호주머니 가득했던 구슬도 몽땅 잃고 갤러그 테트리스도 무참히 깨진 최악의 날이다.
내일은 자치기로 길동이 새퀴 코를 납짝하게 만들어 버릴 거라고 전의를 다지면서 아무것도 모른 채 꼬랑지 흔들며 앙앙대는 순돌이에게 발가락에 건 운동화를 냅다 날린다. 한 짝은 장독대 옆에 다른 한 짝은 댓돌 위에 아무렇게 놓여있다.
"저 벅수 같은 놈의 시키, 퍼뜩 씻고 안 들어가나!"
아버지가 오신다.
거나하게 취한 아버지의 행차는 허구한 날 눈보라만 휘날리는 바람 찬 흥남부두 아니면 월남에서 돌아온 씩씩한 김상사와 함께 한다. 오늘은 기분이 대따 좋은 날인 모양이다. 어깨동무를 한 김상사만 애터지게 불러대는 모양새로 봐서는 양손에 막걸리랑 자식들 챙겨줄 과자가 가득 들려 있을게 확실하다. 쩌렁쩌렁 울리는 고성방가에 댓구라도 하는 듯 순돌이도 목청을 한껏 높여 왕왕댄다. 온 동네 똥개들 잔칫날이다.
"길똥이 아부지요, 좀 조용히 댕기소"
약간은 푼수끼가 있는 오지랖 넓은 영희 엄마가 틀림없다. 충썽! 아버지의 너털웃음 소리가 골목과 맞닿은 철수의 작은 봉창을 넘어온다.
아참, 내일 채변검사하는 날이지. 똥 안 나오면 우짜지?
사흘 전에 교실로 허연 가운을 입은 의사 선생님이랑 간호사 누나들이 들이닥쳤었다. 어깨를 드러내고 한 줄로 길게 늘어서서 불주사를 맞았다. 감기끼가 있어서 주사 못 맞는다고 둘러대다 인정머리 없는 간호사 누나에게 꿀밤만 얻어맞았다. 하필이면 그날따라 어제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영희도 길동이도 갑자기 감기가 들었다고 했다. 장티푸스인지 콜레란지하는 게 유행이라고 하셨다. 무지 아픈 불주사는 어깨에 엄청 큰 도장을 남겼다. 물은 꼭 끓여 먹으라고 꿈밤을 먹인 간호사 누나가 신신당부를 하면서 알약 몇 개를 손에 쥐어주었다. 거시라고 불리는 회충이랑 편충 따위의 기생충 약이라고 했다. 똥꼬를 벅벅 긁어대던 길동이 놈은 편충, 철수는 지렁이 같이 생긴 허연 회충이 똥꼬를 뚫고 나온 적도 있었다.
이는 또 얼마나 많았는지 어깨에 스멀스멀 기어 다니는 게 예사였다. 참빗으로 한번 훑으면 방바닥 수북이 눈 내리듯 쏟아졌다. 내복 솔기 사이에 자리 잡은 하얀 쌔가리(서캐)를 손톱으로 눌러 죽이는 풍경은 겨울밤 내내 이어졌다.
결국 똥은 빌리다 빌리다 족보 없는 순돌이 똥을 나무젓가락으로 집어 봉투 속에 넣는다. 개똥에서도 회충이 나올는지는 모르지만 순돌이 똥은 길동이, 철수, 영희를 든든한 아군으로 결속시킨다.
놀기도 바쁜데 학교는 학교대로 가만 내버려 두지를 않고 툭하면 요구사항이 많다. 쥐 잡기 운동이래나 뭐래나, 형아는 쥐꼬리 대신 바짝 마른 칡덩굴을 집어 간단다. 신작로 변에 뿌릴 코스모스 씨앗 채종을 해오라고 하더니 잔디도 한 줌씩 캐오란다.
삐걱이는 아비동 마루판을 닦느라 양초를 바르고 병으로 문질러가며 반질반질 광도 내야 한다.
가정 방문은 왜 또 한다고 해서 엄니 입이 댓 발이나 나오게 만드는지 모르겠다. 사는 게 다 그 나물에 그 밥인데 생활환경 조사를 한답시고 시시꼴랑한 것부터 죄다 적어내라더니 구라라도 쳤는지 확인차 방문을 하는 걸까 싶어 철수의 가슴이 철렁한다. 사실 철수네는 티브이랑 전화기가 없어, 라시찬이 출연해 악당 공산군을 통쾌하게 때려잡는 전우나 왜놈들 마구 혼내주는 임진왜란이라도 볼라치면 깻잎을 추려준다는 암묵의 거래 조건으로 주인집 안방에 모여들어 티브를 보는 실정이라 선생님께 쓸데없는 가오를 잡은 게 뽀록이 날 판이다. 하긴, 철수도 길동이 영희도 똑같은 공범이라 크게 양심에 찔리지는 않는다.
이 연사 힘차게 외칩니다, 궐기대회도 봐줘야 하고, 걸핏하면 높으신 나리 행차하신다고 한길가에 죽 늘어서 손을 흔들라니 정말이지 어른들은 애들이 노는 꼴을 못 보는 모양이다.
"에헴, 에헴"
모기떼들이 피란 피는 다 빨아댄다. 오이, 참외 몇 개 훔쳐먹으러 들어갔다 오도 가도 못하고 꼼짝없이 고추나무 아래 갇혀버려 모기떼가 장딴지건 겨드랑이 밑이건 사정없이 깨물어도 긁지도 못하고서 똥꾸녕으로 숨을 쉬면서 죽은 듯 엎드려 있기를 십여분.
원두막에 앉아 뭘 하는지 성질 지랄 같은 딸부잣집 영희네 큰 오빠는 연신 어험어험 헛기침과 가래 삼키는 소리를 해댄다. 고추잎사귀라도 흔들릴까 바짝 졸아 볼따구에 앉아 피를 빨아대는 간땡이 부은 모기조차 감히 쫓지를 못 한다. 달빛은 우라지게 밝은데 성질머리 더러운 영희 오라버니는 맛 좀 보라며 이죽거린다. 징그럽게도 능글맞은 형아다. 길동이 머리를 흔든다. 여기서 붙들리면 그날부로 제삿날이니 제발 참으라고 한다.
"요 쌔끼들, 욕봤다!"
웬수같은 영희 큰 오빠가 낄낄대면서 어깨 위로 수건을 휘휘 돌리면서 사라져 간다.
"너그 옴마한테 꼭 아까징끼 발라도라 캐라. 푸하하."
망까기라고도 하는 비석치기 돌멩이가 손에 없기 다행이다.
내일은 족대 들고 미꾸리나 잡으러 가야겠다고 철수는 굳게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