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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상에 마주 앉은 승부사들이 시종 진지한 표정으로 수담을 나누고 있습니다. 승부가 판가름이 나고서도 한동안 바둑돌은 쉼을 찾지 못하고 그물코에 갇혀있습니다.
승자의 시간은 주어지지 않습니다. 오롯이 패자를 위한, 패자에 의한 시간이 흐릅니다.
패자가 돌을 거두어야 비로소 파해지는 놀음, 긴긴 시간을 이어온 풍류입니다.
361로의 반상에는 인생과 우주, 갖은 전략의 수싸움이 놓입니다.
가로 세로 각 19개의 교차점이 만들어내는 착점 경우의 수는 자그마치 약 1.74×10의 170승이라고 하니 반상에 우주가 놓인다는 말이 결코 과장이 아닙니다. 삶의 지혜와 처세가 고스란히 엿보이는 인생의 축소판이라 할만 합니다.
병든 아버지의 하루라고는 고작 화투패로 점괘를 보거나 누워서 멍하니 천장만 쳐다보는 게 전부였습니다. 해병대 출신답게 보짱과 가오를 입에 달고 살았던 아버지는 예약된 죽음보다는 몸뚱이 하나 제 힘으로 가눌 수 없는 무기력에 더욱 괴로워했습니다.
숨이 끊어지는 최후의 순간까지 '사나이'로 기억되고 싶었던 아버지가 판을 엎었습니다.
손짓과 일그러진 표정만으로 한 수만 물려 달라고 자존심 구겨가며 부탁하던 아버지에게 낙장불입, 일수불퇴를 들먹이며 얄짤없이 이겨버린 게 화근이었습니다.
바둑 고까짓꺼 한판 이기고 지는 게 뭔 대수라고 통사정하는 싸나이의 한가닥 자존심마저 짓밟아버렸을까요.
어쩌면 아버지의 분노는 본인을 향했는지 모릅니다. 어지럽게 흐트러진 흑백의 돌맹이들조차 자신을 조롱한다고 여겼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천원을 배우고 아다리를 배웠습니다. 변과 귀를 배우고 축과 호구를 배웠습니다.
소일거리가 필요했던 아버지가 내게 바둑이란 놀이를 소개한 후 가장 먼저 일러준 교훈이 '아생연후살타'였습니다. 니 죽고 내 죽자, 무슨 수를 써서라도 넌 죽인다가 아니라 자신 먼저 살길을 도모한 후 적을 쳐라는 말이었습니다.
앎과 행함이 일치하란 법은 없습니다. 나는 여태껏 아버지가 삶의 교훈이랍시고 따문따문 알려준 대로 살아 본 적이 없습니다.
엎어버린 바둑판을 끝으로 병든 아버지와는 사실상 결별을 하고 말았습니다. 내가 근 사십 년을 사 급, 잘해야 삼 급의 벽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도 따지고 보면 병든 아버지의 자존심을 뭉개버린 저주를 톡톡이 받는거라고 여깁니다.
언제부턴가 애써 이기려고 덤비지를 않습니다. 이기고 지는 게 시시해졌습니다. 당구시합이 끝이 난 후에도 당구대 여가리를 떠나지 못하고 최후까지 큐대를 손에 든 이는 나고, 고스톱을 쳐도 빈털털이가 되는 경우가 훨씬 허다합니다.
살다 보면 이겨도 지는 일이 다반사임을 아버지의 엎어버린 바닥판이 알려주었던 겁니다.
이겼다고 기뻐하는 상대편에 맞장구를 치며 추켜세워주는 일도 은근히 재밌는 일임을 늘그막에서야 쬐금 알았습니다.
진즉에 알았더라면...참 아쉽습니다.
(대한민국에는 아직 이창호가 남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