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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리 아라리오

by 김석철

아우라지 뱃사공은 어디로 갔나.




정선 아리랑을 부지런히 읊조리고 있습니다.
지금은 틈 날 때마다 무한 반복으로 듣는 것이 전부입니다.

군악대에서의 저는 박치였습니다. 드럼 파트가 박치라니, 황당무계한 상황이 벌어진 겁니다. 졸병 때의 타악 파트는 주로 심벌즈로 시작을 합니다. 큰북, 작은북은 짬도 안되고, 무엇보다 실력이 턱도 없으니 당연히 심벌즈 담당으로 떠밀리는 거지요.

애국가 연주는 심벌이 특히 도드라지는 악센트 부분이 있는데, 암만 긴장을 해도 늘상 엇박자가 나는 겁니다. 지휘하는 교육중사의 뱀눈이 부릅뜨지는 순간, 지휘봉의 궤적도 덩달아 커지지만 늘 반 박 빠르거나 늦어버립니다. 가장 많이 연주되는 중요한 곡에서 항상 삑사리를 해대니 천하에 쳐 죽일 원흉이 된 셈이지요.

작은 드럼은 경례를 할 때 스틱 든 오른손을 눈썹에 가로 일자로 올려붙입니다.

별들이 즐비한 살 떨리는 행사에서 스틱을 땅에 떨어뜨려 한 달간 영창을 살고온 말년병장 고참보다는 소소한 실수의 연발이었지만, 저는 힘도 빽도 없는 이등병 쫄따구였쟎습니까.

얼마나 많은 매타작이 있었는지, 지금도 오금이 저릿합니다.


군악대 자대 배치를 받아 더블백을 풀기가 무섭게 군기반장이 관물대 위의 피복함 문을 세차게 열어젖혔습니다. 털목도리가 달린 빨간 동계 행사복, 하늘색 반 팔 하계 행사복과 노란 견장, 날이 바짝 선 때깔나는 일계장 전투복, 광이 반짝이는 단화까지 피복함은 손가락 하나 비집고 들어설 공간이 없었어요.

군홧발로 침상에 성큼 올라선 고참이 피복을 거칠게 한 쪽으로 걷어붙이는 순간,곡괭이 자루 다섯 개가 화려한 군악 행사복 뒤켠에 일렬횡대로 도열해 있었습니다.

"제대할 때까지 저 괭이자루 하나가 부러져야 군악대지!"


결국에는 구제불능 고문관으로 찍혀서, 화학지원중대의 취사장 시다바리로 팽을 당하게 됐습니다. 저로서는 전화위복인 셈이었지요. 하지만, 저녁 급식을 마치고 군악 내무반으로 복귀를 하고 난 뒤 남은 시간의 갈굼은 몇 갑절 더해졌습니다.
악보를 제대로 볼 줄 모르니 시창은 꿈도 못 꾸고, 죽도록 얻어터져가면서 달달 외우는 단순무식한 방법 외에는 달리 도리가 없었습니다. 악보의 콩나물 대가리 수 보다 백 배 정도 더 뚜까 맞으면 다 외워지게 됩니다. 자동 세뇌가 되는 거지요.

군기 바짝 든 올챙이 적 슬쩍 스치기만 해도 관등성명이 습관처럼 튀어나오는 것도, 기합과 빳따 앞에서의 장사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어떤 난해한 곡을 마주해도 쫄지를 않습니다. 단지, 익히는 게 더디고 고생을 좀 직살나게 하는 부작용도 있습디다만.

몸빵 보다 확실한 교육법은 없다고 큰소리칠 수 있는 것도 다 몸으로 때운 경험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뼈가 바스라질 정도로 얻어터져보면 압니다.


삼백 번 정도 들으면, 머릿속에서 바위가 굴러다니는 대가리일 망정 통달이 됩니다. 무식함의 승리지요. 하지만, 이 무식한 방법은 절대 까먹는 법이 없습니다. 몸에 배어버리거든요. 몇 번 마시다보면 수영, 고까이 꺼 대충 배워지잖아요.
정선아리랑을 스무 번쯤 들었는데 가사는 물론 리듬이 잘 와닿지가 않네요. 괜찮습니다.
앞으로 280번만 더 들으면 죽이 되건 밥이 되건 뭔가 되기는 되겠지요. 행여 280번으로도 안되면 까짓꺼 2,800번 듣지요 뭐.

영월, 정선의 척박한 삶을 녹여낸 아라리에 꽂힌 지는 꽤나 오래된 일이지만, 깊은 정서적 공감을 느낀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입니다. 동요와 아리랑에 꽂히다니... 이러다 트로트도 좋아하게 될지도 모를 일입니다. 이것도 나이 탓일까요?


아라리 가락으로 꾹꾹 누른 팍팍한 삶의 질곡과 애환, 그 서러웠을 인생사가 민둥산을 넘고, 거친 동강의 물살을 갈랐을 테지요.
뗏꾼의 어허야 소리 한 자락에 녹았을 애달픈 청춘도 아라리 고개를 넘고 넘었을 겁니다.

태백의 탄광에서 근무할 때 정선 아리랑을 현지 어르신들의 생생한 육성으로 듣고 싶어 영월과 정선을 홀린 듯 돌아본 적이 있었습니다. 노랫가락은 듣지 못하고, 중천과 골지천이 어우러지는 아우라지에서 옛 정취만 느끼다 돌아선 기억이 있습니다. 뗏꾼들의 노래를 싣고 세월이 유수처럼 흘렀습니다. 흐르는 것은 강물과 시간뿐이 아닙니다.

조만간, 정선 아리랑을 구성지게 들려줄 날을 기대해 봅니다.

눈이 올라나 비가 올라나
억수장마 질라나.
만수산 검은 구름이 막 모여든다.
.
.
사시장철 님 그리워
나는 못 살겠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오

('정선 아리랑'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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