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로 다른 세계관이 부딪히는 그 이름, 결혼식
우리 부부는 미국에서 6개월을 보내고 예정된 결혼식을 위해 한국으로 갔다. 2주 이상 머물게 될 예정이라 결혼식장과 가까운 숙소에 머물렀다. 본가와 친정으로 또 나누어 지낸다면 지난번처럼 불화가 생길 것이 염려되었기 때문이었다. 결혼식 전날까지 준비할 것도 많고 챙길 것도 많아서 서울 방방곡곡을 홍길동처럼 날아다녔다. 이미 결혼식 준비를 어느 정도 다 끝내놨다고 생각했는데 임박해서 할 일들이 아직도 이렇게나 많을 줄이야!
가장 중요한 일정은 결혼식에 입을 턱시도와 드레스를 가봉하는 일정인데 우리 둘 다 미국에서 너무 잘 먹어서 살이 쪘을까 걱정을 했다. 다행히 나는 홈트레이닝을 한 덕분에 드레스가 약간 헐렁하게 잘 맞았다. 그런데 삼식이 생활 6개월을 했던 남편은 배가 좀 나와서 치수를 좀 늘려야 했다. 남편들이 결혼해서 살이 찌는 것이 행복한 증거라고 하던데 내가 남편을 많이 행복하게 해주었나 보다.
나와 남편은 이미 미국에서 결혼해서 독립한 상태였고 둘 다 유학생으로서 양가 부모님의 등골을 충분히 빼먹었기 때문에 결혼 비용은 우리가 지불하기로 했다. 예단, 예물, 혼수는 다 생략하기로 남편에게 이야기했고 남편도 흔쾌히 동의했다. 그래서 예물은 묵주 반지 한 쌍만 준비했다. 우리가 계획한 대로 (아니 사실은 신부인 내가 계획한 대로!) 수월하게 결혼식 준비가 돼 가는 듯 보였다. 양가의 친척들도 틈틈이 인사드리며 바쁜 일상을 보내던 어느 날, 신랑 고모님을 뵙게 되었다.
아버님 형제분들이 모인 자리에서 남편 고모님은 아들을 몇 년 전 장가보낸 선배님으로서의 조언을 시부모님께 많이 해드리고 싶으셨던 것 같다. 고모님은 “안 받으면 섭섭해요!” 하시면서 시부모님에게 말씀했다. 그리고 나와 남편에게는 “아들은 결혼할 때 뭘 받아야 돼. 나는 이 그릇 세트를 사달라고 했잖아. 너무 예쁘지?”라고 하셨다. 그 가족 모임이 끝나고 나는 남편에게 고모님이 친정에서 예단을 안 보내시는 것을 눈치 주신 것 같아 마음이 불편했다고 말했다. 분명 시부모님들도 예물과 예단과 같은 허례허식을 좋아하시지 않는다고 하신 데다가 친정 부모님의 경제적 상황상 예단을 부담스러우실 상황이었다. 그래서 나는 남편에게 우리는 묵주 반지 한 쌍만 있으면 되겠다고 나머지 준비는 우리끼리 알아서 하자고 합의했다. 양가 부모님들도 이견이 없으셔서 결혼식 준비는 착착 준비되어 갔는데 결혼식 2주 전 처음 뵌 남편 고모님이 아들 결혼할 때 뭘 받아야 한다는 그 말씀을 왜 꺼내신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눈치가 빵점인 남편은 고모님이 그렇게 말하신 의도를 전혀 파악하지 못했다며 설령 그런 의도로 말씀하셨어도 자신의 부모님은 워낙 겉치레를 싫어하시는 분들이라 신경을 안 쓰실 것 같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신경이 매우 쓰였다.
지금 생각해 보니 시부모님은 고모님의 말을 듣고 조금씩 서운해하시기 시작하신 것 같다. 고모님이 자식 키운 거 힘들게 키웠는데 뭐 받는 것도 없이 장가보내려면 너무 서운하지 않냐는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니 시부모님의 마음도 동요되신 것이 아닐까.
결혼식을 일주일 남겨놨던 날, 갑자기 형님 (예비 시누이)이 남편 계좌로 50만 원을 송금했다. 그러자 이게 무슨 돈이냐며 남편이 전화를 했다. 형님은 “고모가 나한테 전화했는데 아들 장가가는 거 우리 부모님이 섭섭하니 네가 부모님 좀 잘 챙겨드리라고 하시더라!” 형님은 신혼부부가 경제적 상황이 여의치가 않아 보여 보태주고 싶으셨던 것 같다. 그 말을 듣고 나는 많은 생각을 했다. 결혼식이 1주일이 남은 지금 상황에서 예단과 혼수를 하자니 양가 부모님들이 신경 쓰실 일이 너무 많아질 것이 뻔했다. 그리고 사실 시댁에 비해 내 친정이 돈이 없어서 예단을 준비할 경제적 여유가 없을 것 같았다. 오랜 생각 끝에 나는 남편을 설득해서 우리 부부가 준비해서 양가 부모님에게 선물을 준비해서 드리자고 제안했다.
그래서 결혼 전 모아둔 나의 저축 계좌를 털어서 급히 이천만 원을 마련해서 양가 부모님 몫으로 반반 나누었다. 그리고는 남대문에 급히 가서 예단을 보낼 때 쓴다는 예쁜 보자기와 박스를 샀다. 현금을 넣는 한지 봉투와 한지 편지지도 준비했다. ‘잘 봐주세요’의 의미를 담은 거울과 ‘좋은 말만 들어주세요.’의 의미를 담은 귀이개도 담았다. 현금은 은행에서 빳빳한 새 지폐로 바꾸고 총 지폐수도 복이 온다는 홀수로 맞췄다. 나는 시부모님께, 그리고 남편은 친정 부모님께 편지를 정성 들여서 한지 편지지에 썼다. 예단 보자기를 파는 아저씨한테 예쁘게 묶는 법도 배워와서 하나하나 조심스럽게 포장했다. 그리고는 양가 부모님께 가져다 드렸다. 남편은 친정 부모님께 “그동안 딸 잘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 인사를, 나는 시부모님께 “그동안 아들 잘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 인사를 했다. 양가 부모님 모두 눈물을 흘리시며 고마워해주셨다.
시부모님이 나중에 남편을 통해서 말씀하시기를 고모님이 말씀을 꺼내서 좀 서운한 마음이 들긴 했으나 막상 이렇게 선물과 돈을 받으니 너희에게 더 큰 부담을 지운 것 같아 미안하다고 하셨다. 괜히 고모님이 서운함에 불을 지펴서 우리가 할 일을 더 키웠다고 말씀하시면서 선물과 마음만 받고 돈은 받으시지 않겠다고 사양하셨다. 나는 받지 않으시면 우리가 서운해지니 돈을 받아주시면 좋겠다고 설득했다. 결국 시부모님은 그 돈을 몇 년간 쓰지 않고 모아놓으셨다가 얼마 전에 남편을 통해서 다시 돌려주셨다.
결혼식은 부부에게만 의미 있는 날이 아니라 양가 가족의 결합이라는 말을 절실하게 깨달았던 순간이었다.
2. 너무 기쁘고, 너무 감사하고, 너무 죄송한, 결혼식이라는 이상한 이벤트
이런저런 해프닝이 있었지만 우리 부부의 결혼식 날은 현실로 다가왔다. 5월의 약간 선선하고 따뜻한 어느 좋은 날에 예쁜 성당에서 혼인 미사를 드리게 되었다. 내 생에 처음으로 온갖 감정들이 선명하게 느껴졌던 꿈같은 날이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서약을 가족들과 지인들 앞에서 맹세하는 결혼식이라는 이벤트가 벅차게 황홀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부모님의 울타리를 벗어나게 된 것이 홀가분하면서 죄송하기도 했다. 나이 들어가시는 부모님을 두고 내 가정을 이루려 떠나는 이 결혼식이 부모님과의 이별식인 것 같아서. 결혼식이 끝나면 곧 미국으로 떠나기 때문에 더욱 이별의 감정이 짙게 느껴진 것도 같다. 사진작가가 부모님과 함께 사진을 찍으라고 할 때마다 눈물이 글썽거려서 눈물을 참느라 혼이 났다.
혼인 미사를 집전해주신 신부님은 우리 부부가 겪은 힘든 시간들을 잘 아시는 신부님이셨는데 그 신부님의 동창 신부님도 함께 오셔서 (결혼할 신부인 나도 포함해 신부가 총 3명인) 축복이 가득한 미사였다.
눈물이 특히 많은 나는 혼인 미사 중에 세 번 정도의 고비가 있었는데 다행히 비싼 메이크업이 망가질 정도로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다. 엄마는 나와 포옹할 때 약간 훌쩍거리셨지만 대체로 씩씩하고 기뻐보이셨다. 남편과 시부모님은 연간 함박웃음이었다. 형님 결혼식 사진에 있던 어머님의 표정은 저 멀리 딸이 팔려가는 것 같은 얼굴이었는데 아들 장가를 보내실 때는 연신 함박웃음이 터져 나오셨다. 기뻐 보이는 사돈들과는 달리 우리 아빠는 울상이었다. 사실 아빠는 자신이 너무 울까 봐 자신이 없어 나와 함께 결혼식을 못 들어가겠다고 하셨던 분이다. 이미 나와 남편은 이미 부부였기 때문에 입장할 때 함께 따로 입장하기보다 같이 입장해야 할 것 같은 생각을 했었어서 아빠의 말이 서운하지 않았다. 그래서 먼저 시부모님이 입장하시고 다음은 친정 부모님 그리고 우리 부부가 입장하는 순서로 짰다. 정말 아빠가 나와 입장했으면 나도 눈물이 왕왕 터져서 큰일 날 뻔했다! 아빠는 결혼식 전 하객들을 맞을 때부터 정말 많이 우셨다. 아빠는 원체 눈물이 정말 많으신 분인데 나이 드시면서 더 울보가 되셨다. 지금까지도 모든 지인들이 아빠가 많이 우셨다고 회고될 정도이다.
운이 좋게도 우리의 결혼식의 불과 몇 주 전에 야외에서는 마스크를 벗고 단체 사진을 찍을 수 있게 규칙이 바뀌었어서 마스크 없는 결혼사진을 찍을 수 있게 되었다. 결혼식을 준비하면서 다른 성당 결혼식을 몇 번 가보았는데 단체 사진을 찍을 때마다 신랑과 신부만 얼굴 표정이 보이고 하객들의 얼굴은 마스크로 가려져 눈만 보이는 사진이 참 아쉬웠었다. 우리 부부가 평생을 간직할 단체 결혼사진에 하객 모두의 얼굴 표정을 담을 수 있게 되어 정말 다행이었다.
결혼식은 평생 잊지 못할 이상한 이벤트였다.
3. 재취업 후 소비욕 폭발, 도파민 롤러코스터
한국에서의 결혼식을 무사히 마치고 양가 가족들과 여행도 다녀오고 우리 부부는 다시 미국에 돌아왔다. 영주권을 위해 5년 넘게 있었던 시골살이를 드디어 청산할 때였다. 우리는 한인 마트가 30분 내에 있는 나름 문명이 더 가까이 있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월세와 자가의 갈림길에서 고민하다가 집도 사버렸다. 월세나 모기지나 한 달에 고정으로 지출하는 비용이 거의 비슷한데 집을 오래 소유하면 집 값이 오르기라도 할 텐데 월세는 이익이 아예 없어 진절머리가 나서였다. 남편은 시골에서보다 돈벌이가 나아졌고 저축도 조금씩 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여전히 요양이라는 명목으로 주부로 지냈는데 여유시간이 많은 데다가 난생처음으로 생긴 “내 집”에 신이 났다. 처음 몇 달은 인테리어 잡지와 핀터레스트를 보며 온갖 인테리어 콘셉트를 생각하며 지냈다. 식탁, 의자, 책상은 이미 오래된 것들을 계속 쓰고 있지만 월세집에서는 꿈도 못 꾸던 큰 소파는 정말 큰 맘을 먹고 구매했다. 하나씩 하나씩 넓은 집을 예쁜 소품과 가구로 채우면서 박스는 늘고 통장 잔고는 줄어들었다. 이사 온 지 별로 되지 않았을 때는 이사를 왔으니 돈을 쓸 일이 많아서 지출이 늘어나는 것인 줄 알았다. 하지만 이사를 온 지 6개월이 지나도 사고 싶은 것은 줄지 않았다.
남편은 재활용 수거일에 쌓여있는 박스들을 볼 때마다 아이고 한숨을 쉬며 처음에는 웃으며 나를 놀렸지만 점차 못마땅한 표정이 가득했다. 대놓고 나에게 화를 내지는 않지만 박스가 많이 쌓인 것을 확인할 때면 남편의 기분이 많이 우울해졌다. 남편의 우울감을 예민하게 알아차린 나는 ‘나는 왜 이런 걸까?’ 생각하며 자책했다. 굳게 마음먹고 불필요한 물건들을 소비하지 않는 때도 더러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은 하루도 빠짐없이 소비를 했다. 더 억누르려고 하면 할수록 더 갖고 싶은 것이 많아지는 것 같았다.
나는 돈을 벌고 싶어졌다. 정확히는 남편의 눈치를 그만보고 싶었다. 나도 직업을 가질 수 있는 충분히 젊은 나이이고 약사 면허도 있는데! 일이 다시 하고 싶어 졌다. 사실은 일을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나만의 호주머니를 다시 차고 싶은 생각이 간절해졌다. 그러다 우연한 기회로 약대 동기가 일하는 작은 약국에 파트타임 약사로 취업을 하게 되었다. 대형 리테일 약국만큼은 피하고 싶어서 병원 외래 약국이나 작은 약국들을 공략했었는데 인터뷰까지 보통 이어지지 않아 몇 달을 좌절했었다. 그러던 중에 예기치 않게 친구가 연결해 준 이 약국은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직장의 좋은 점들을 많이 갖고 있는 직장이었다. 스태프들의 인성도 팀워크도 괜찮아 보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약사가 약사만 할 수 있는 임상적인 일들에 집중할 수 있도록 약사 보조원들의 근무 시간에 아낌없이 투자하는 약국장님에게 반해버렸다. 약국장님은 오랫동안 대형 체인 약국에서 매니저로 일하셨던 경험을 반면교사 삼아 열심히 일하는 직원들에게 격려와 보너스를 아끼지 않는 정말 이상적인 리더이다.
이 약국에 취업을 하게 되자 내 월급이 들어온다는 기쁨에 소비욕이 마구 터졌다. 백수로 집에 있을 때 이것저것 샀던 물건들과는 스케일이 조금 커지기도 하며 나의 소비 요정은 나날이 성장해 갔다. 온라인 구매가 쉬워져서 갖고 싶은 것을 금방 클릭하면 집 앞까지 배송되고 나는 그 물건들을 가진 행복감은 잠시고 곧 다음 목표 물건을 쥐 잡듯이 찾는다. 꼭 미친 사람처럼! 내가 느끼는 이 도파민 롤러코스터는 마치 내가 폭식증을 겪을 때 경험한 느낌과 비슷했다. 고통받고 싶지 않아서 선택하는 폭식하고 과소비하는 중독적인 행동들은 내 마음이 건강하지 않음을 알려주는 바로미터였다. 한국에서 암 치료를 받고 미국으로 돌아온 그 후부터 시작된 나의 소비들은 어쩌다 일어나게 된 것일까?
4. 이렇게 갑자기 아빠와 이별이라고?
나는 소비욕을 줄이지 못한 나머지 돈을 쓰고 싶어서 돈을 버느라 일을 하고 또 그만큼 돈을 썼다. 각종 물건들로 채워져 가는 집은 점차 엉망이 되어가고 있었다. 할부로 계산한 여러 지출이 모여 천만 원이 넘는 큰 카드빚이 생기기도 하였다. 그럴 때마다 남편은 모아두었던 저축을 깨서 급한 불은 꺼주었다. 돈을 벌고 소비하고 탕진하고 자책하고 반성하고 또 반복하는 그런 행동의 반복이 계속되는 일상.
소유욕이 문제일까 싶어서 각종 자극을 보지 않으려 핸드폰 사용 시간도 줄여보았다. 하지만 물건을 사고 싶은 욕구는 잠재우기 힘들었다. 예전에 사고 싶었던 물건들이 어느 날 갑자기 생각나서 미친 사람처럼 그 물건이 계속 생각나 잠을 못 자기도 했다. 혹시 유방암 재발을 막기 위해 먹고 있는 약이 여성 호르몬을 폐경기 여성처럼 줄여주어 성격이 충동적으로 변한 걸까? 아니면 하고 싶은 것들을 참으며 고통스럽게 영주권을 기다리며 무리한 업무를 감당한 4년 8개월의 시간이 유방암이라는 상상치 못한 병을 주었다는 서운함이 보복 소비로 폭발하는 것일까?
아무리 물건에 소비를 해도 물건을 소유한다는 기쁨은 잠시였다. 그렇다고 소비한 물건들을 환불받고 싶지도 않은 이상한 마음… 공허함이 가득한 내 마음이었다. 이러한 마음 상태로 몇 년을 지냈다. 이상하게도 남편과 미국 국내 여행을 가거나 1년에 한 번 한국으로 고국 방문을 할 때면 소비욕은 대체로 잠잠했다. 무엇이 충족된다는 느낌이 드는 것인지, 여행 중이면 지루할 틈이 없으니 마음이 바빠서 소비가 생각이 나지 않는 것인지 분간이 어려웠다.
사실 한국에 가게 되면 돈을 많이 쓰기는 썼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나를 위한 소비보다 부모님을 위한 소비와 시간에 집착했다. 언젠가 정말로 이별하게 될 나의 부모님이 이 세상에서 좀 더 많은 것을 누리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고마운 나의 남편은 나의 집착적인 효도 욕구를 이해해 주었다.
부모님을 모시고 매년 여행을 가는 것은 물론이고 오래된 선풍기 처분하고 새 선풍기로 바꿔드리기, 공기 청정기에 필터가 있는 줄도 모르셨던 부모님을 위해 새 필터사서 끼워드리기, 집안 곳곳 판도라의 상자처럼 먼지 묵은 오래된 상자들 열어 버리고 각종 정리 용품을 사서 정리하기, 검은 봉지에 정체 모를 음식물이 담겨있는 냉동실 정리하고 잘 보이는 냉동실 전용 보관 용기로 싹 정리하기, 오래된 책과 서류들로 가득한 책장에서 중요한 편지, 사진, 서류등은 따로 파일에 분류하고 오빠와 내가 읽었으면 좋겠는 책들을 골라달라고 하여 그 책들을 제외한 다른 책들 중고 서적에 처분하기, 경치 좋은 서울 근교 빵집과 레스토랑에 모시고 가기, 가족사진과 영정 사진 찍기…
한국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3년 동안 한국에 갈 때마다 나는 많은 효도 집착을 했다. 부모님이 원하지 않으셔도 내가 고집을 부려서 했다. 막상 시간을 내서 정리하고 새것으로 바꿔드리고, 나들이와 여행을 모시고 가면 좋아하신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부모님이 하시는 “정말 필요 없어,” “안 가도 돼,” “안 사도 돼” 는 나에게 미안해서 하시는 말씀임을 일찍 깨달아서이다.
2024년 3월에 한국 방문을 했을 때, 제주도로 친정여행을 갔다. 이번 여행은 참 특별하고 감사한 여행이었다. 의치가 잘 맞지 않아 씹기가 불편하신 데다 위암 수술 후 금방 배가 불러오셔서 잘 못 드시는 아빠도 갈치구이와 고등어찜을 어찌나 맛있게 드셨던지! 20년 전쯤, 아빠가 제주도 가족 여행 일정을 짜시고 프린터로 출력해 오셔서 아빠만 졸졸 따라다녔던 막내딸이었는데 이제 그 딸이 커서 사위와 함께 여행 일정을 계획하고 여기저기를 모시고 다니게 되었다니 뿌듯하기도 또 한편으로는 약해진 부모님의 모습이 슬프기도 했다.
봄이라 유채꽃이 만발한 제주는 봄바람이 아직 차긴 하였지만 스멀스멀 봄의 기운이 느껴졌던 곳이었다. 난생처음 보신다는 제주의 봄날 유채꽃은 아빠의 핸드폰 카메라 버튼을 연간 누르게 했다. 지나는 길마다 풀과 꽃의 이름을 모두 공부하시려 하는 우리 아빠는 유채꽃의 꽃이 가까이서 이렇게 생겼구나 하시면서 관찰하셨다.
그리고 이번 한국에서의 마지막 일정으로 가족사진을 찍었다. 철없는 오빠는 셋이서 가족 여행을 간다고 가족사진 촬영에 참석하지 않았다. 오빠가 나중에 후회할 거라는 생각을 했지만 설득을 하기가 불편한 오빠와 새 언니였다. 그래서 나와 남편, 부모님이 함께 가족사진을 찍었다. 미국으로 떠나기 며칠 전에 인화된 가족사진들과 액자를 찾아왔다. 가족사진을 한참을 보면 괜스레 미소가 지어지고 온 마음이 뭉클하고 아쉽기도 감사하기도 했다.
아빠는 위암 수술 후 5년 차가 되셨는데 나날이 살이 더 빠지셔서 사진 속 아빠는 젊은 시절 아빠와는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부리부리한 눈매에 화살코, 큰 귀… 암 수술 후유증과 세월의 흔적으로 시들어가시고 있지만 눈빛만은 초롱초롱하시고 여러 배움의 열정이 가득한 내가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가족사진을 언제 찍었는지 생각해 보았다. 나와 오빠의 결혼식을 제외하고는 12년 전쯤 아빠가 이사로 승진하신 후 찍은 가족사진이 마지막이었다. 바쁘다는 핑계로 가족사진을 찍는데 12년이나 걸렸다. 소중한 것들을 왜 못 챙기고 살았을까…
나는 한국에서 떠나면서 아빠가 유독 기력이 없으신 것 같아 운전하는 것이 걱정된다고 이제는 운전을 피하시라고 말씀드렸다. 그 말을 단호하게 드리면서도 마음이 아팠다. 코 끝이 찡하고 눈물이 글썽여서 미처 못했던 말들은 카톡으로 보냈다. 카톡에서 나는 부모님과의 영원한 이별을 맞이하게 될 때를 자주 생각한다고 고백했다. 그러면서 우리 가족에게는 죽음이 갑작스럽게 닥치지 않고 조금은 준비된 상태에서 맞이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도 했다. 공항으로 가는 예약한 택시에 짐을 싣고 뒷자리에 앉아 창문으로 바라보는 아빠의 마지막 모습은 눈에 눈물이 가득하시고 미간은 찡긋하시는데 입은 애써 웃고 있다. 옆에 있는 엄마도 흘러나오는 눈물을 자꾸 옷깃에 닦으신다. 나도 애써 미소를 지어보려 했지만 이미 눈물이 가득 차버려서 온 얼굴의 근육이 울었다. 미소를 지을 때 필요한 근육들이 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입술이 떨렸다. 오른손을 들어 부모님을 향해 안녕을 해본다. 안녕! 그때 그 모습이 내가 본 아빠의 생전 마지막 모습이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미국으로 돌아온 지 1달 여가 지나간 어느 날 밤, 갑작스럽게 아빠가 위독하시니 한국으로 빨리 오라는 새언니의 전화를 받았다. 그 전화를 받고 두 시간 정도 후에 다시 온 전화. 아빠가 소천하셨다는 말. 이게 마지막이라고? 나는 아빠의 죽음이 가까운 미래에 다가올 것 같아서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있었다고 생각했다. 죽음이 닥치지 않고 맞이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었는데 이렇게 갑자기 닥친다고? 갑작스러운 죽음 앞에 마음의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한 나의 생각은 참으로 오만한 것이었다. 그저 황망하다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았다. 하루아침에 나는 아빠를 잃었다.
어릴 때부터 조숙했던 저는 죽음을 자주 생각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부모님이 갑자기 돌아가실까 봐 자주 걱정했어요. 곤히 주무시는 부모님의 코 밑에 손가락을 대보며 겨우 불안을 잠재우며 잠에 들고는 했습니다.
유학 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는 1년에 한 번씩 찾아오는 부모님과의 이별이 매번 힘들었습니다. 이별은 늘 마음이 아팠거든요. 저 혼자 잘 살겠다고 부모님을 버린 것 같은… 불효녀가 된 느낌이 들었어요.
유학 생활이 끝나고 여러 가지 이유로 미국에 취업하고 정착하게 된 후에는 1년에 한 번 한국에 갈 때마다 점점 약해지시는 부모님 모습을 보는게 조금은 두렵기도 했어요. 특히 위암 수술 후 점차 야위어가시는 아버지와의 이별이 점점 다가오고 있구나를 느꼈습니다. 미국으로 떠나는 날 배웅 해주시는 아빠의 그 모습을 보면서 내년에 한국에 오면 아빠를 다시 뵐 수는 있을지 생각했어요. 그러면서 그 생각이 혹시 실제로 일어날까 봐 ’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불안한 생각아! 제발 들어가! 영정 사진 찍으면 오래 사신다고 하잖아. 내년에도 또 건강하게 볼 수 있으니 걱정 말아!‘ 속으로 기도하며 미국으로 돌아왔어요.
죽음으로 인한 부모님과의 이별을 그 누구보다 많이 상상해 보며 함께하는 시간을 최대한 만들려고 하며 효도에 집착하는 딸이었던 저… 죽음을 준비할 수 있다는 생각은 오만이었어요. 아빠와의 영원한 안녕이 이렇게 갑작스럽게 닥칠 줄 정말 몰랐습니다.
다음 주에는 아버지와 이별 이야기를 더 깊게 풀어보려 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