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의 벚꽃 엔딩

벚꽃과 함께 이 세상을 떠난 나의 아빠

by 티나

1. 나의 세상이 무너진 날


그날도 뭐 하나 다를 것 없던 평일이었다. 나는 여느 때처럼 엄마한테 전화를 했다. 미국 시간으로 오후 3-4시쯤이었으니 내가 오전 근무가 있는 날이면 딱 퇴근하는 시간이었다. 그러면 한국 시간으로는 아침 7-8시경. 엄마는 아빠가 오늘 대학 병원에 내과 진료를 받는 날이라고 했다. 그래서 아빠는 전날 밤부터 금식을 하셨고 빈 속으로 일찍 차를 타고 나가셨다고 했다. 아빠는 이사를 가신 지 5년이 넘으셨는데도 예전에 다니셨던 대학 병원 교수님께 진료를 받기 위해 1시간 넘게 걸리는 길을 매 해 2번씩 가셨다. 그 병원은 대중교통이 좋지 않은 동네에 있어서 친정에서 가려면 자동차가 필수였다. 엄마는 기력이 너무 없어 보이는 남편이 빈 속에 장시간 운전을 하는 것이 걱정이 되었는지 같이 가자고 했는데 잠시 화장실에 있던 그 사이 아빠가 “다녀올게!” 하고 먼저 나가셨다고 했다.


나와 보이스톡을 하시던 중 엄마는 다른 곳에서 전화가 와서 끊자고 하셨다. 그래서 10분 후 내가 다시 보이스톡을 하니 엄마가 전화를 받지 않으시고는 아빠가 다리가 골절되어서 병원에서 전화가 왔으니 빨리 가봐야 할 것 같다고 하셨다. 사고의 전후사정을 전혀 모르는 나는 아빠가 병원에 일단 가셨는데 검사를 받으시다가 병원 복도에서 넘어지셨나 생각했다. 혹시 빈혈이 오신 걸까, 아니면 기립성 저혈압? 그것도 아니면 무언가 충격적인 검사 결과를 들으신 걸까? 나는 여러 생각을 하며 엄마의 연락을 기다리는 수밖에는 없었다.


퇴근한 후 나와 남편은 저녁을 먹고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아빠가 너무 걱정되는데 엄마에게 연락을 해도 받지 않으시고 어떤 상황인지 자세히 설명을 안 해주시니 답답하다고 털어놓았다. 그러면서 생크림 케이크가 먹고 싶다는 나의 말에 남편은 금방 옷을 입고 나오며 케이크를 먹으러 나가자고 했다. 단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내가 케이크가 먹고 싶다는 일은 극히 드문 일인데 남편이 내가 마음이 불안한 것을 눈치를 챈 모양이었다. 거절을 여러 번 하다가 남편이 나의 기분을 신경 써주는 것이 고마워서 케이크를 먹으러 집을 나섰다. 차로 30분 떨어진 곳에 있는 케이크집으로 가면서도 왠지 모르게 마음이 계속 불안했다. 예전에 아빠가 위암 수술을 하셨을 때도 미리 말씀을 안 해주신 엄마였기에 혹시 아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은 아닌가 걱정이 너무되어 입이 바싹바싹 말라왔다.


케이크집에 거의 도착할 무렵 새 언니에게 보이스 톡이 왔다. 서로 카톡이나 보이스톡으로 연락한 적이 없던지라 나쁜 직감이 몰려왔다. ‘아, 무슨 일이 일어났구나!’


“여보세요?”


“네, 아가씨. 아버님 사고나신 거 들었죠?”


“네 언니… 다리가 골절되셨다고 들었는데 엄마가 그 후에 연락이 없으셔서 좀 걱정되네요…”


“아버님이 교통사고를 당하셨는데 처음에는 다리 골절만 발견하고 외상병원으로 옮겨지셨었나 봐요. 그런데 가슴이 아프시다고 하셔서 큰 병원으로 옮겨야 한다고 했는데 요새 의료 대란이잖아요. 받아주는 병원이 없어서 지체가 많이 되었대요. 제가 친언니한테 연락해서 지금 병원을 알아보고 있어요. 근데 지금 아버님이 위독하시다네요. 저희는 지금 일본 여행 중이었는데 최대한 빨리 한국으로 가려고 지금 공항 가는 길이에요. 아가씨도 제일 빠른 비행기 편을 알아봐서 빨리 한국으로 와야 할 것 같아요.”


“아… 네…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나는 10분 동안 멍하고 아무 생각이 없었다. 옆에서 통화를 듣고 있던 남편은 케이크가 문제가 아니라 빨리 한국에 가야겠다며 황급히 집으로 차를 돌리고 있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은 정말 사실인 것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그러다 분주하게 남편이 움직이는 모습에 정신이 들며 생각했다. '아! 올 것이 왔구나. 내가 두려워했던 아빠와의 이별의 순간이…’


급하게 가장 빠른 항공권을 구매했지만 그다음 날 아침에 출발하는 비행기였기에 집에서 하릴없이 기다려야만 했다.


그래서 다음 날 근무를 할 수 없을 것 같으니 함께 일을 하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 지금 빨리 한국으로 가야 할 것 같아… 아빠가 위독하시대.”


그 전화를 받은 내 친구는 30분 걸리는 우리 집에 한 달음에 달려왔다. 나는 친구를 보자마자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 이 친구는 내가 폭식증으로 고생할 때 함께 밥을 먹어주고 내 얘기를 들어주었던 나의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친구이다. 그동안 이 친구와는 피를 나눈 나의 오빠보다 더 끈끈하게 지내왔다. 어머니 없이 홀아버지와 할머니 손에서 자란 이 친구는 부모가 다 계신 나보다도 결핍이 없는 사람이다. 마음이 매우 단단하고 건강한 친구여서 배울 점이 많은 친구라고나 할까? 몇 년 전 그 친구에게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나는 모든 일을 제쳐두고 장례식장에 갔다. 그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몇 달 전 마지막으로 뵌 그날, 할머니는 나에게 말씀하셨다. “얘가 형제자매가 없어서 살면서 외로울 텐데 자매처럼 잘 지내줘!” 90년대 초반에 70대의 나이로 이민을 오셔서 사고뭉치 애물단지 같은 아들과 토끼 같은 손녀딸을 키우며 미국 생활을 견뎌내신 할머니의 주름지고 거친 손이 내 손을 만졌다. 나는 할머니의 손을 더 꽉 잡으며 “할머니! 너무 걱정 마세요! 제가 이 친구를 많이 좋아해서 절대 못 떨어져요!” 나는 그 말을 할머니에게 말씀드리며 싱긋 웃었다.


심장병이 있으셨던 친구 할머니는 90이 넘는 나이까지 사시다가 하룻밤 사이에, 손녀딸이 옆에서 자고 있는 사이에 세상을 떠나셨다.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에 나는 당장 비행기 편을 구해 한 달음에 달려갔다. 성당에서 열린 장례식장에서 고운 한복을 입고 두 손을 포갠 채 관에 누워계신 친구 할머니의 모습을 보고 티는 안 냈지만 나는 너무 충격을 받았었다. 그 모습은 정말 주무시다가 언제든 일어나셔서 내 친구의 이름을 부르고 나의 이름도 불러주실 분 같았으니까. 정말 죽은 사람의 모습이라기엔 너무… 생명이 남아있는 것 같은 모습이어서...


할머니의 장례식 때 할머니가 어디서 태어나셨고 어떤 삶을 사셨는지 친구가 낭독하는 편지를 듣고 알게 되었다. 눈물이 없는 이 친구가 몇 번이나 울먹거리며 편지를 끝까지 읽었다. 나는 아이처럼 우는 그 친구를 안아주었다. 늘 도움을 받기만 했던 내가 이 친구에게 힘이 될 수 있는 시기에 옆에 있을 수 있어서 감사하다고 생각했다.


친구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몇 년 후, 친구도 나도 마음 맞는 짝꿍을 만났다. 시골 생활을 청산하고 친구네와 가까이 살게 되면서 더 왕래가 잦아졌고 심지어 일도 같이 하는 동료가 되었다. 그래서 내가 한국에서 아빠가 위독하시다는 전화를 받고 가장 먼저 이 친구에게 전화를 한 것은 다음 날 일을 나갈 수 없게 되어서 양해를 구한다는 의도 그 이상이었다. 이 친구 앞에서는 내가 마음이 너무 아프고 힘든 모습을 편히 보여줄 수 있어서였다.


위독하신 아빠의 소식을 듣고 감정을 제대로 표출하지 못했던 내가 이 친구를 보자마자 눈물을 터뜨린 이유이다. 우리는 초를 켜고 함께 기도했다. 지금 어떤 상황인지 모르겠지만 아빠가 이 위기를 극복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그러면서 한 편으로는 아빠가 그동안 위암 수술을 받으시고도 70이 넘은 나이에 90이 넘은 치매노모와 형제자매들을 챙기시느라 고생하신 그 인생이 너무 가여워서… 혹시 지금 아빠가 느끼는 육체적 고통이 너무 아프다면 그 고통만큼은 길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기도했다. 그 기도를 말로 말하고 나자마자 다시 또 아빠를 다시 볼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이 기도가 아빠를 위한 기도인지 나를 위한 기도인지 모르겠지만 나의 불안한 마음들을 다 꺼내 보이며 눈 감고 중얼거렸다. 함께 눈 감고 기도문을 듣는 내 친구도 함께 눈물이 터졌다. 서로의 손바닥이 서로의 등을 두드렸다.


하지만 얼마 후 다시 온 새 언니의 전화는 나의 이런 부질없는 희망을 산산이 부숴놓았다.


“아가씨… 아버님이 돌아가셨대요.”


이 순간 나의 세상은 무너졌다. 한 달 전에 아빠의 영정 사진을 찍어드리며 간절히 바랐었던 나였다. 영정 사진을 찍으면 오래 사신다는 옛 어른들의 말이 제발 아빠에게 해당되는 말이 되었으면 하고 말이다. 아빠에게는 죽음이 닥치지 않고 준비된 상태로 다가와서 우리 가족이 이별을 준비하며 마음 준비를 할 수 있는 시간을 원했었다. 그런데 아빠에게 죽음이 이렇게 닥쳐버렸다. 생각지도 못하게.


그 순간 옆에 있는 내 친구를 보고는 든 생각... ‘아!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내가 이 친구에게 했던 위로는 위로가 아니었구나! 이제야 사랑하는 가족을 떠나보내는 느낌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네!… 이렇게 어른이 되어가나 보다. 서글프고 외로운 어른 되기… ' 그때가 돼서야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슬픔은 경험해 본 자가 아니면 감히 이해할 수도, 위로할 수도 없다는 걸 깨달았던 것 같다.




2. 아빠의 장례식장으로 향하는 12시간


아빠의 부고 소식을 듣고 나는 멍… 했고 남편은 재빠르게 시댁과 직장에 연락을 했다. 나중에 남편이 얘기해 주었는데 제일 빠르게 출발하는 비행기 편이 10시간 후에 있었는데 좌석이 딱 2자리가 남아있었다고 했다. 울면서 짐을 겨우 싸고 잠 한숨도 못 잔 채 공항으로 향하는 아침, 이 세상에 우리 아빠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어쩜 이렇게 봄 하늘이 맑은데… 어쩜 이렇게 허무하게 떠나실 수가 있는지… 하늘은 왜 우리 아빠를 지켜주지 못하셨는지 무심하고 원망스러웠다. 내가 뭘 잘못한 건가? 갑자기 아빠를 잃은 것이 혹시 나의 잘못은 아닐까?


한국으로 향하는 12시간 남짓의 비행시간 동안 나는 차가워진 손을 억지로 움직이며 아빠에게 편지를 썼다. 기력이 약해지셨으니 운전을 피하라는 딸내미의 말을 왜 안 들으셨는지, 또 딸이랑 사위가 미국에 한 번 모신다고 했는데 매 해 거절하시다가 한 번도 못 와보고 어떻게 이렇게 허무하게 떠나시냐고… 원망으로 시작된 편지였다. 하고 싶은 말이 없을 때까지 글을 쓰다 보니 5장이 훌쩍 넘는 편지를 썼다. 어린 시절부터 아빠에게 고마웠던 것들을 써 내려가니 ‘아, 우리 아빠 나에게는 정말 좋은 아빠셨구나!’ 느꼈다. 엄마, 오빠, 그리고 나는 천주교 세례를 받았는데 아빠는 믿지 않으시니 어떻게 아빠의 영혼을 만날 수 있을는지 걱정도 털어놓았다. 사실 이 모든 글은 아빠를 위한 글이 아니고 나를 위한 글이었다. 일어나고 있는 모든 상황들을 멀리서 늦게 소식을 듣고 아빠를 보러 당장 달려가지도 못하는 나의 무기력한 신세 한탄이었다.


우리 부부는 공항에서 가까운 시댁에 짐을 먼저 맡기고 옷도 갈아입지 못한 채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나도 진료를 받는 병원이라 가는 길이 익숙했다. 20년 전쯤 친할아버지가 위암 3기를 발견하시고 병원에서 치료 중에 돌아가셨을 때 장례식을 치렀던 그 장례식장이었다. 장례식장에 들어가자마자 방 번호, 고인의 사진과 이름이 적힌 LED 전광판을 봤다. 1달 전 영정 사진을 찍어드린 아빠의 사진이 띄워져 있었다. 아빠의 사진이 이렇게 걸려있는 모습을 영정 사진 찍고 최대한 늦게 보았으면 했는데…


병원에서 근무하시는 막내 외삼촌이 일본에서 여행 중이었던 오빠와 미국에서 지내는 나를 대신해 모든 장례식 준비를 해 주셨다. 수척해진 나를 발견하자 외삼촌은 웃으시며 말씀하신다. “티나야! 내가 네 아빠 장례식장 다 마련해 놨다. 너네는 옷만 갈아입으면 되는데 네가 입을 상복은 여기 있고 남자 양복은 빌려주는 곳이 있으니 나만 따라와.” 나는 검은색 상복을 입고 흰 리본이 묶인 머리핀을 꽂았다. 남편은 검정 양복에 검정 넥타이 그리고 검정 구두까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검은색으로 갈아입었다. 살면서 이렇게 검은색을 많이 본 적이 있었는지 순간 생각했다.


나와 남편은 이미 상복을 입고 조문객을 맞이하고 있는 엄마와 오빠 옆에 섰다. 조문객은 5분에 한 번씩 정도 무리를 지어 왔다. 대부분은 아빠의 지인들이거나 오빠의 지인들이었다. 특히 아빠의 지인들이 정말 많았다. 퇴직하신 지 13년이 넘었는데 함께 일을 했다는 동료 직원들이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우리에게 인사했다. 대부분은 나는 얼굴을 모르지만 그분들은 나를 돌잔치 때부터 얼굴을 알던 분들이었다. “아 네가 티 나는구나! 아저씨가 너 돌잔치 때 봤었는데 미국에서 소식 듣고 놀랬겠구나… 아버지 가시는 길 잘 배웅해 드려라.” 아빠의 지인들만 200명 이상이 온 것 같다. 오랜 인연이 있는 나의 친구들 6명도 와주었다. 조문객들과 같이 눈물을 흘리다가 티슈 몇 장으로 안 되겠는 슬픔이 폭포처럼 터져 나올 때는 화장실로 갔다. 엉엉하고 소리 내서 울고 또 추스르고 조문객을 맞이하고… 그러다 보니 어느덧 식사 시간이 되고 가족들이 돌아가면서 밥을 먹고, 조문객을 맞이하고, 또 식사를 하고… 이렇게 착착 마음이 맞게 우리 가족이 뭘 함께 한 적이 있었는지 생각이 들었다. 그 누구 하나 뾰족한 소리를 내는 사람 없이 ‘조문객 맞이’하는 기계처럼 매끄럽게 일을 진행해 나갔다. 아빠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여러 번을 반복해서 얘기하다 보니 나중에는 기계처럼 눈물도 한 방울이 나오지 않고 얘기했다. 시차 때문에 머리는 빙빙 돌고 나중에는 내가 지금 서 있는 이곳은 현실이 아닌 것인가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첫날, 둘째 날… 그리고 마지막 셋째 날까지 많은 조문객들과 인사하며 아빠의 장례식장을 지켰다.


아빠의 발인이 있던 날 아침, 말끔하게 씻겨지고 곱게 분칠을 한 아빠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큰 관 안에 너무나도 작아진 아빠가 누워있었다. 인상 하나 찌푸리는 것 없는 얼굴, 감은 두 눈, 미소를 짓는 듯 편안하게 다문 입술, 예쁘게 입은 삼베옷… 큰 교통사고를 당한 사람의 모습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얼굴이 편안해 보이셨다. 정말 주무시는 것 같았다. 나는 관 안에 내가 쓴 편지와 아빠의 틀니를 넣어드렸다. 마지막 할 말을 하시라는 장례지도사분의 말씀에 나는 이렇게 말했다. “아빠! 인생이 너무 버겁고 고되었지? 이제 마음 푹 놓고 편히 쉬세요. 아빠 수고 많았어요. 사랑해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전하고 관의 뚜껑이 닫혔다.


발인 장소까지 이동하는 차 안, 아빠가 좋아하는 하얀 이팝꽃이 도로에 피어 있었다. 이팝꽃 같은 수수한 꽃이 좋다며 말씀하셨던 아빠가 이 길을 참 좋아하실 것 같았다. 그리고 1달 전에 벚꽃이 아직 피지 않았어서 아쉬워했던 나를 위해 벚꽃 나무 몇 그루가 만발한 꽃잎을 보이고 있었다. 나는 벚꽃을 참 좋아했다. 어릴 적 아빠와 워커힐에 벚꽃을 보러 갔었는데 그날 이후로 벚꽃 구경을 간 것이 불과 한 달 전 석촌 호숫가를 산책하던 올해 봄이었다. 예년보다 추위가 더 늦게까지 이어져서 벚꽃은 아직 드문드문 피어있어서 나는 정말 아쉬웠었다. 아빠의 발인 장소로 가는 길에 핀 벚꽃을 보니 '아빠가 아쉬워했던 나를 위해 벚꽃을 남겨두셨구나!'라는 생각이 들며 눈물이 나왔다.


화장장에는 고인의 마지막을 위해 온 사람들이 정말 많았다. 화장장에 자리가 없어서 겨우겨우 찾은 곳이었는데 무슨 대형 식당처럼 층이 여러 층이 있고 대기 번호가 있었다. 아빠의 차례는 30분-1시간 정도 뒤였다. 발인까지 함께 온 가까운 가족들, 지인들과 함께 자리를 잡고 앉았다. 4월 중순인데 30도가 가까이 가는 무더운 날이었는데 우리가 자리 잡은 나무 그늘은 시원했다.


이윽고 아빠 차례가 되었고 나는 번호가 쓰인 방으로 이동했다. 유리창 너머에서는 아빠가 누워계신 관이 활활 타는 불 속으로 들어가기 직전이었다. 내가 사랑하는 아빠가 곧 한 줌 잿더미로 된다고 생각하니 절망적이었다. 고대 이집트인들이 죽은 왕들을 미라로 만들었다는데 그 가족들은 ‘미라화’가 되었지만 고인이 가까이 있음에 위로를 느꼈을지 궁금했다. 우리 아빠도 부패되지 않도록 약품을 발라 동굴에 모시면 내가 조금 덜 슬플까?


화장을 진행하시는 분이 고인에게 마지막 할 말을 하라고 한다. 쭈뼛대는 나를 보고 큰 외숙모가 조언을 해주셨다. “티나야! 아빠 하면서 울어도 돼! 이게 아빠랑 인사하는 마지막이야.”


“아.. 아빠!!!!!!!!!!!!!!! 어떻게 이렇게 허무하게 떠날 수가 있어 흑… 벚꽃 볼 때마다 아빠 생각할게요… 아빠 잘 쉬어요! 언젠가 우리 다시 만나요!”


그 말 이후 아빠는 화구에 들어갔고 그렇게 태워졌다. 드라마에서는 화장이 바로 끝나고 납골당으로 넘어가지만 현실은 1시간 반에서 2시간 정도가 소요되었기에 바로 옆 구내식당에서 갈비탕을 먹었다. 아빠의 살은 타고 있는데 어떻게 내가 고깃국을 먹겠냐며 안 먹겠다는 것을 자꾸 외삼촌과 외숙모가 뭐라도 먹어야 한다며 달래셨다. 흰 밥을 국에 말아 겨우 한 숟갈을 먹었다. 배도 안 고프고 모래알이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어? 갈비탕이 맛있네! 맞아, 산 사람은 살아야지!’ 생각이 들며 밥 반 그릇을 뚝딱 해치웠다. 떠나간 아빠를 실컷 애도하기 위해서라도 나는 힘이 필요했다. 그것이 이 땅에 발을 딛고 사는 자의 숙명이자 딸이 행복한 삶을 살기 원하셨던 아빠의 마음일 테니까.





아빠가 세상을 떠나신 지 2년에 다 되어갑니다. 사랑하는 아빠를 갑자기 잃으면서 느낀 감정들은 다 처음 겪어보는 혼란스러운 감정들이었어요. 제 주위의 모든 것들은 그대로 있고 잘 돌아가고 있는데 아빠만 없어진 세상… 참 원망스러웠습니다.


때로는 내 주위가 이렇게 잘 돌아가고 있다는 의미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은 아닌지, 즉 아빠가 정말 이 세상에서 떠난 것이 일어나지 않은 일인지 의문스러워지기도 했습니다… 이제야 아버지의 상실로 제가 어떤 감정들을 겪었는지 곱씹어보며 제 자신에게 위로하는 마음으로 글을 썼습니다. 저의 이야기를 읽고 위로를 받으시는 분에 단 한 분이라도 계시다면 이 글을 공유하기로 한 저의 결정이 참 뿌듯할 것 같아요.


우리 모두 부디 삶에서 이따금씩 폭풍우처럼 밀려오는 상실들을 잘 겪어내기를…


다음 주에 또 찾아올게요. 평안한 주말 보내세요!


이전 01화준비할 수 없는 이별, 죽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