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생의 무게, 한 줌의 가루

나는 아빠를 잘 보냈을까

by 티나

1. 아빠의 따뜻한 뼛가루


화장이 끝나고 아빠의 유골은 오빠가, 아빠의 사진은 남편이 든 채로 우리는 납골당에 도착했다. 아빠를 봉안하기 전에 납골당 직원이 고인의 유골함에 한 분씩 인사하시라고 했다. 나는 유골함을 오른손으로 살짝 만지며 눈을 감고 기도를 했다. 내가 마지막으로 만진 아빠는 따뜻했다. 불덩이에서 재가 되어버린 아빠가 너무 가엽게 느껴졌다. 아등바등 열심히 살았던 아빠가 불쌍했다. 본인의 마지막이 이리 허무할 줄 알았다면 좀 덜 열심히 사시지 않았을까, 형제들 걱정을 좀 덜 하시지 않았을까… 평생 소처럼 일하면서 형제들에게 베풀기만 했던 아빠가 평안한 곳에 잘 도착하기를 빌었다. 나는 천주교 세례를 받았지만 어떤 종교도 믿지 않으셨던 아빠를 위해서 아빠와 소통이 가능하다면 어떤 신이라도 내 기도를 들어주시기를 간곡히 빌었다.


이윽고 정사각형 모양의 작은 칸에 아빠의 유골함이 모셔졌다. 사실 모셔진다는 말보다 갇힌다는 말이 더 정확할 것 같다. 유골함은 오는 순서대로 차례대로 채워지는데 아빠의 유골함이 담긴 칸은 맨 윗 칸이다. 3살 조카는 하부야 (조카는 할아버지 발음을 하부야라고 한다)가 어디 가셨냐고 물어봤다. 새언니가 하부야는 이제 멀리 여행 가셨다고 했다. 그 말을 들은 조카는 얌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어른들 옆에서 서서 훌쩍훌쩍 울고 있는 나를 바라봤다. 착한 조카는 오빠가 고모 좀 안아주라고 하니 나를 꼭 안아줬다. 문득 기력 없는 하부야가 손녀딸을 번쩍 들어주며 해맑게 웃으시던 사진이 떠오른다. 하부야가 손녀딸을 참 예뻐하셨는데… 이제 정말 볼 수 없게 되었다.


알라딘에서 램프 요정 지니가 오랜 시간을 램프에 갇혀있다가 문지르니 램프를 빠져나온 것처럼 나도 아빠의 유골함을 문지르면 아빠가 요정으로 나올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라도 아빠가 내 곁에 계실 수 있다면 덜 슬프지 않을까? 아니면 누군가가 문질러야만 램프를 나올 수 있어 램프 안에서 답답해하실까? 아빠의 육체는 여기 한 줌의 가루가 되었는데 아빠의 영혼은 어딘가에 있는 걸까? 영화 식스 센스 주인공처럼 죽은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다면 아빠와 언제 어디서든 얘기하며 살 수 있지 않을까? 아니 그런데 세상을 떠난 사람들의 영혼이라는 것이 어딘가에 있기는 한 것일까? 아직도 온기가 느껴지는 아빠의 납골함을 쳐다보며 나는 상상했다. 인간의 출발점은 모두 다르지만 죽음이라는 단 하나만큼은 모두에게 공평하게 다가온 느낌이다. 그리고 사랑하는 이를 상실한 슬픔 역시 모두가 공평하게 겪는 일이라는 것에 회한을 느꼈다. 사랑하는 나의 아빠의 죽음은 그저... 황망했다.




2. 그날의 전말


그날의 기억을 다시 꺼내기는 고통스럽지만 용기 내어 아빠의 마지막 순간을 거슬러 올라가 본다. 아빠는 병원 검진이 있던 날 아침 7시경, 서울에 있는 어느 터널을 지나자마자 차 사고가 나셨다. 부딪힌 상대방 차는 마을버스. 교통사고가 났다는 전화를 받고 엄마는 바로 아빠가 이송되었다는 외상 병원으로 달려가셨다. 병원에 거의 다다를 때쯤 터널을 지나자마자 어떤 차가 심하게 파손되어 있었는데 그 차가 바로 아빠의 차였다고 한다. 엄마가 병원에 도착해서 아빠의 상태를 보니 다리가 골절되어 심한 통증이 있어 보였고 그 외에는 크게 다친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고 했다. 엄마는 아빠에게 “당신 자동차 보험 회사가 어디야?” 소리치며 물었고 아빠는 보험 회사 이름을 엄마에게 외쳤다. 그리고 엄마는 “당신 카드 비밀 번호가 뭐야?”라고 물어봤는데 그 물음에 아빠는 대답을 하지 않으셨다고 했다. 아무리 원수 같은 부부 사이이지만 교통사고가 나서 크게 다쳤는데 그 와중에 카드 비밀 번호를 물어본 엄마와 아빠의 부부 사이가 참 안타깝다.


교통사고가 나면 음주 측정을 하는 절차가 있는데 아빠도 역시 병원으로 이송되시는 동안 음주 측정을 한 결과 알코올이 검출되었다. 건강검진날이었기에 아침부터 아빠를 챙겼던 엄마는 아빠가 술을 드시지 않은 것을 보았기에 놀란 눈치였다. 경찰서에 불려 간 엄마는 경찰 조사를 혼자 가는 것이 무서워서 막내 외삼촌에게 연락을 했고 막내 외삼촌이 이렇게 말하셨다고 했다. “사고 당일 아침 일찍 병원에서 금식이 필요한 검사를 받을 예정이었어서 음주는 하지 않으셨을 겁니다. 하지만 위암 수술로 배가 쉽게 불러오셔서 잘 드시지 못하셨고 이 상태도 좋지 않으셔서 씹으시는 것이 불편하셨습니다. 꿀떡 삼키면 배가 부르는 막걸리를 자주 드셨는데 금식 바로 이 전에 막걸리를 드신 것 같네요. 아마 전날 밤에 주무시기 전에 드신 막걸리가 음주 측정에 나온 것 같습니다”


외삼촌이 장례식장에서 말씀해 주셨는데 경찰서에서 블랙박스 영상을 보셨을 때 아빠가 브레이크를 밟지 않으신 것 같다고 했다. 나는 사건이 일어난 순서를 복기해 보았다. 아빠는 아침에 있을 병원 검사를 위해 전날부터 금식이니 금식 시간 직전에 막걸리를 드셨고 다음 날 8시간 정도 지난 후에 차를 운전해서 병원으로 향하셨다. 아침 7시라면 찾아보니 일출 시간인 6시 50분과 가까울 시간이었으니 어둡던 터널을 지나자 큰 햇살이 앞유리로 들이쳤을 것이다. 선글라스가 불편하다고 끼지 않으셨던 아빠는 아마 갑자기 들이닥치는 햇빛에 전방주시가 힘드셨을 것이다. 그러다 터널을 지나 1미터 정도 지점에서 정지해 있던 마을버스를 인지하지 못하셨다. 판단을 제대로 하기 힘드신 신체 상태라 가속페달을 브레이크로 착각하고 밟으신 것 같았다. 그 사고로 다행히 마을버스 뒤에 타고 있던 승객 2명은 경상에 그쳤지만 운전자인 아빠는 사망한 것이었다. 대형 버스와 충돌해서 앞에서 오는 충격도 컸겠지만 아빠 차의 트렁크에서 나온 씨감자 한 박스와 트렁크 너비만 한 롤 비닐이 트렁크를 뚫고 운전자석까지 밀려나가 아빠를 짓눌렀다.


그래서 다리 골절로 외상 병원에 옮겨진지 2시간 후쯤, 가슴이 아프다며 심한 통증을 호소하셨던 것이었다. 기가 막힌 타이밍으로 이때가 의료 대란이었다. 큰 수술을 할 수 있는 병원들이 응급 환자를 받지 않는 총체적 난국이 수개월째 계속되고 있었다. 의사인 사돈 언니가 일본에 있는 새언니의 전화를 급히 받고 직접 병원을 수소문을 하였지만 여러 병원에서 거부했다. 그 사이 많이 시간이 지체되었고 겨우 아빠를 이송해도 좋다는 병원을 찾자마자 이송을 하였지만 이미 병원에 도착해서 검사를 받았을 때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아빠의 상태를 본 의사가 “지금은 손을 쓰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가만히 두시는 게 나아요. 수술을 할 수 있는 시기가 지났습니다. 마음의 준비를 하셔야겠습니다.” 하고 엄마에게 말했다. 그리고 곧 아빠는 세상을 떠나셨다. 아빠의 임종을 함께한 사람은 아빠의 배우자도, 자녀도 아닌, 사돈 언니였다. 폐에 피가 가득 차서 결국 이 생의 끝을 마주하신 아빠의 사망 원인은 압박으로 인한 혈흉 (폐에 피가 가득 찬 상태)이었다.



3. 음주 운전은 또 뭐고 씨 감자와 롤 비닐이 왜 나와?


아빠의 음주를 극도로 싫어했던 나는 교통사고로 돌아가신 아빠에게서 알코올이 측정되었다는 사실이 충격적이었다. 분명 내가 이제는 몸 상태가 예전 같지 않으니 운전을 조심하라고 신신당부를 했었다. 그리고 먼 곳으로 이사를 갔으니 더 가까운 병원으로 옮겨야 한다고도 말씀드렸었다. 왜 굳이 10년 넘게 한 병원을 고집하며 불편한 교통을 감수하고 다니셨을까? 왜 굳이 아침 일찍 운전을 할 예정인데 전날 밤에 막걸리를 드신 것일까? 왜 굳이 원시가 심해지시니 다초점 렌즈 안경에 익숙해지셔야 한다고 아주 가까운 거리만 보이시니 안경을 아예 안 쓰면 위험하다고 말씀드린 딸내미의 염려를 듣지 않으신 것일까? 왜 굳이 검사를 해가 뜨는 시간에 예약하신 것일까? 왜 굳이… 왜 굳이!


아빠의 마지막을 생각하니 아빠의 미련함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아빠의 나이 73세. 오랜 시간 매일같이 약주를 하셨어서 간 건강이 좋지 않으셨다. 70대의 나이에 간 건강도 좋지 않은 아빠는 다음날 아침 일찍 운전을 생각해서 전날 밤 알코올 섭취를 자제했어야 했다. 몸이 안 좋으신 걸 뻔히 알았을 텐데 왜 전날 밤까지 술을 드셨어야 했을까? 의학적으로 분석하자면 아마 8시간 남짓한 시간 동안 알코올이 미처 전부 분해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교통사고가 난 시점에 아빠는 음주 운전을 한 것이다. 아빠가 버스가 아니라 다른 승용차나 보행자를 쳤다면 아빠는 더욱 큰 잘못을 저지를 뻔했던 상황이었다. 아니, 이미 무고한 버스기사분과 승객 두 분에게 피해를 끼친 이후였다. 경찰 조사는 외삼촌의 증언 이후 잘 끝났지만 이 증오스러운 술이 기어이 아빠를 잡아먹은 기분이었다.


게다가 아빠는 지난 1년간 10킬로가량 살이 빠지셨었다. 친할머니가 90이 넘는 나이에도 혼자서 잘 지내시다가 치매가 오셔서 아빠가 차 사고 나기 몇 주 전부터 아빠를 못 알아보셨다. 아빠에게는 신이자 세상을 사는 이유였던 친할머니가 자신을 못 알아본다는 그 충격은 아빠를 우울에 빠지게 했다. 한국에서 아빠가 술 한 잔 하시면서 나에게 할머니가 아빠를 못 알아봐서 너무 슬프다며 치매가 이렇게 슬픈 병인지 몰랐다며 얘기를 하셨었다. 이미 비슷한 일을 10년 전쯤 겪으셨던 우리 엄마는 장모가 치매 걸려서 양로원에 계실 때는 코빼기도 안 보이던 사람이 치매 걸린 사람 처음 본다며 본인 엄마가 저렇게 된 것을 슬퍼하는 아빠를 못 마땅해하시며 나에게 푸념하시곤 하였다.


아빠에게 술은 우울을 달래는 친구, 아니 끝내는 우울을 더 악화시키는 짐승이었다. 아빠는 쇠약해지신 친할머니를 뵙고 나서부터 하루에 막걸리 2-3병은 기본이고 소주도 1-2병씩 마셨다. 자주 눈물도 흘리시고 옛날 얘기도 많이 하시는 아빠의 정신 건강이 걱정이 되어서 나는 심리 상담도 권해보았다. 알코올 중독 치료도 필요해 보였다. 그런데 아빠에게 술을 먹지 말라고 하면 정말 드실 것이 없었고 정말 기댈 곳이 없어 보이셨다. 가난한 농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서 두 집 살이하는 아빠의 부재로 좋은 가정환경이 아니었음에도 불고하고 독하게 공부해서 서울대에 입학한 아빠, 큰 제약 회사에서 영업직 사원부터 이사까지 역임하신, 그 자랑스러운 나의 아빠를 내가 1달 전 뵈었을 때 정말 외롭고도 괴로워 보이셨다.


아빠의 장례식이 끝나고 다음 날, 자동차 보험 절차를 위해 아빠의 사고 차량을 처리하러 폐차장에 갔다. 심란한 엄마, 오빠, 나를 대신해 남편이 운전을 해주었다. 나는 폐차장에 도착해서 아빠의 차를 발견하자마자 눈물이 터져 나오며 도저히 차에서 내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오빠와 남편만 내렸다. 한참이 지나니 눈물이 멎고 갑자기 가슴속에서 불같은 용기가 솟아올랐다. ‘꼭 마주해야만 해! 아빠가 어떻게 마지막에 돌아가셨는지 그건 알아야지. 그걸 알아야 아빠를 잘 보내드릴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용기를 내어 사고가 난 아빠의 차로 걸어갔다. 촘촘하게 금이 간 앞 유리와 심하게 찌그러진 아빠의 차. 차 문도 제대로 열리지 않는다. 트렁크를 열어보았는데 트렁크가 뻥 뚫려있었다. 뒷 좌석은 씨감자와 검은 롤 비닐이 차에 가득했다. 거름처럼 보이는 흙도 여기저기 흩어져있었는데 냄새가 꼭 시골에 가면 맡는 거름냄새 같았다. 아마 사고의 충격에 트렁크에 있던 무거운 물건들이 뒷자리를 뚫고 밀려 나와 운전석까지 압박을 가했던 것 같다. 대형 버스의 무게와 트렁크에 있던 짐들의 무게 사이에 찌그러진 운전자석에 아빠가 고통받고 있었을 것이다. 너무 안타까웠다. 나는 바닥에 주저앉아 오열을 했다. 지나가던 차의 운전자들이 나를 딱하게 쳐다보며 지나갔다. 그렇게 또 바닥에 힘없이 주저앉아 한참을 울었다. 또 한참 뒤 힘을 억지로 내보며 남편이랑 오빠가 꺼내보는 아빠의 물건들을 쳐다봤다. 아빠가 즐겨 쓰던 베레모, 내가 사드린 배낭, 아빠의 안경 케이스… 아빠의 손길이 묻어있는, 아빠 냄새가 나는 물건들은 그대로 있는데 우리 아빠만… 우리 아빠만 이 세상에서 사라졌다. 이게 정말 말이 되는 상황인가?


음주 운전. 씨 감자. 롤 비닐… 아빠의 마지막이 고스란히 담긴 아빠의 차에서 나는 꺼이꺼이 울었다.




4. 유산, 유품 정리


장례식을 마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은 미국으로 다시 갔고 조카와 새 언니는 본가에서 몇 시간 떨어진 지방에 있는 오빠네 집으로 돌아갔다. 친정에는 오빠와 내가 엄마와 함께 지내며 정리를 시작했다. 먼저 아빠의 재산부터 정리하기 위해 아빠가 거래하고 있던 은행에 각각 찾아가서 여러 서류들을 제출하고 또 수많은 서류들에 서명을 했다. 거래 내역 중에 아빠의 막내 동생에게 돈이 오고 간 흔적이 보였다. 그 서류를 보니 아빠의 장례식장에서 유난히 울고 있던 막내 사촌 동생이 떠올랐다. 나는 사실 그 사촌 동생이 펑펑 우는 것이 좀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아빠의 동생들 세 명 다 벌이가 시원찮아서 아빠가 많이 도와준 것을 엄마를 통해 익히 들어왔었다. 그렇기에 부모님의 불화에 아빠의 어머니나 형제들이 큰 몫을 차지하고 있다 생각하며 살았다. 유난히 울고 있던 막내 사촌 동생… 큰아버지의 장례식장에 자기 이름을 쓴 큰 화환을 세워두고 오랫동안 장례식장에서 있다가 갔던 것이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아마 최근에 아빠의 도움을 좀 받았었나 보다. 어릴 때부터 둘째 형의 도움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 여기던 아빠의 동생들은 은퇴한 지 오래이고 암까지 겪은 나약한 우리 아빠의 피를 계속 빨아먹고 있었다.


다른 거래내역에는 주기적으로 아빠가 퇴직한 회사에서 돈을 받은 내역이 있었다. 아빠의 카톡을 보니 회사에서 임직원 가족들을 위해 함께 가꾸는 주말 농장을 아빠가 맡아서 리드하셨던 모양이다. 농장의 현재 상황과 시기별로 해야 하는 농장 일들이 보고서 형식처럼 카톡에 남겨져 있었다. 아빠는 여기서 알바를 하셨던 것 같다. 생각해 보니 4년 전에 아빠가 나에게 3천만 원을 빌려달라고 하신 적이 있다. 그때 나는 남편과 미국에서 작게 결혼식을 하고 신접살림을 차렸던 타이밍이고 남편도 갓 졸업한 이후여서 갑자기 큰돈을 빌려달라 하시니 당황스러웠다. 무슨 일이냐고 여쭤보니 별 일은 아니고 생활비가 떨어져 가고 있다고 카톡을 보내셨다. 남편과 상의하여 연금 계좌는 건드리지 않기로 하고 저축 통장에서 400만 원 정도를 급하게 부쳐드렸다. 더 드리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아빠가 본인에게 쓰시는 것은 별로 없고 다 아빠 형제들 도와주시는 데에 쓰실 것을 잘 알았기 때문에 그 정도로 했었다. 돈벌이가 필요하셨던 아빠는 농장 알바를 하며 함께 근무하던 직원들에게 지시도 받으며 그 농장일을 열심히 하셨던 것 같다. 엄마가 본인이 키우는 작은 텃밭 관리도 힘든데 1시간 거리에 있는 그 농장에서 왜 공짜로 일을 해주고 오냐며 잔소리를 했던 것이 기억이 났다. 알고 보니 아빠는 퇴직한 회사의 주말 농장을 맡아 관리하시는 관리자로 일하시고 있던 것이었다.


아빠의 유품들은 플라스틱 보관 박스에 채워질 정도만 남겨두고 다 처리했다. 오래된 물건이 너무 많았다. 어릴 때 자주 보았던 아빠의 넥타이부터 신발, 너덜너덜한 손톱깎이 케이스, 캠핑용 코펠 세트, 오래된 카메라, 출장 다녀오시고 남으셨던 세계 각국의 잔돈… 나와 오빠는 사진과 동영상을 찍으며 아빠에게 영상을 남겼다.

“아이고 아빠, 이거 30년도 더 된 것 같은데 왜 아직도 이걸 가지고 있었어… 궁상맞게… 마음 아프잖아”


아빠의 유품들을 대형 봉지에 담았다. 수거 업체에서 10만 원을 주었다. 그 작은 아빠의 방에서 100킬로도 더 나온 것이다. 오빠는 조의금까지 합해 정산하여 엄마와 나에게 나누어줬다. 이렇게 아빠가 남기고 간 것들을 정리하는 데에 1달이 걸렸다.


자동차 보험 처리가 제일 까다로웠다. 아빠는 교통사고 이후 측정된 알코올 때문에 자동차 보험 처리가 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라고 고지받았었다. 그렇다면 사고가 난 대형 버스의 수리비 1억과 부상을 당한 2명의 통원 치료를 남은 유가족이 책임질 수 있다는 것이었다. 걱정했던 것과는 다르게 다행히도 경찰에서 음주 운전으로 인한 사고가 아니라는 조사서가 보험사에 전달되었고 아빠의 교통사고를 보험 처리를 받을 수 있었다. 보험 처리도 재산 정리도 다 하니 아빠의 전 재산은 10만 원… 나는 오빠에게 아빠가 몇 년 전에 돈을 빌려달라고 하셨을 때 더 돈을 드릴 걸 그랬다고… 아니 내가 유학을 가서 아빠의 재산을 많이 탕진하는 바람에 아빠가 노후에 이렇게 힘드셨던 것이라며 가슴을 주먹으로 치며 답답함을 털어놓았다. 오빠는 나에게 아빠의 연봉을 얘기하며 수학적으로 분석하고 내가 유학을 가서 아빠의 마지막이 이렇게 된 것이 아니라고 얘기해 줬다. 아빠는 생전에 좋아하는 골프를 실컷 즐기셨고 돕고 싶은 형제들에게 금전적으로 도움을 많이 주셨기 때문에 아빠는 충분히 인생을 즐기신 편이라고 했다. 내 탓이 아니라고… 사실 아빠가 선택한 인생이라고 오빠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 사이 미국으로 돌아간 남편이 장인어른 꿈을 꾸었다고 했다. 집에 돌아와서 미국 신혼집에 한 번도 방문하지 못하신 장인어른을 위해 소주 한 잔을 따라 가족사진 앞에 두었다고 한다. 그러다 울면서 잠이 들었는데 꿈에서 장인어른이 나와서 뒷모습을 보이시며 우리 집의 곳곳을 둘러보시고 뒷마당까지 다니시다가 어디론가 사라시 졌다고 했다. 아빠의 관에 내가 쓴 편지를 아빠가 읽고 우리 집에 방문하신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이 들었다. “나는 네가 우리 집 사위가 돼서 참 좋다!” 하셨던 장인어른이 사위의 꿈에 나와 위로해 주시러 방문하신 것 같다.




이번 주도 함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쓴 글 중에 가장 마음이 아픈 글이었던 것 같아요. 무슨 말이 필요하겠어요… 저 정말 힘들었어요! 마음속으로라도 제게 따뜻한 포옹 한 번만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한국은 곧 설이지요? 평안한 설 연휴 되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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