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에게 닿지 않은 그들의 편지들

사랑이 없는 부부, 나의 부모님

by 티나


1. 과부가 된 엄마


아빠가 돌아가신 후 오빠와 유품들을 정리하고 한국을 떠나는 날이 가까워져 오면서 내가 가장 걱정스러웠던 것은 엄마였다. 엄마는 한평생 혼자 살아본 적이 전혀 없으셨다. 한 지붕아래서 40년 가까이를 같이 살던 아빠가 하루아침에 사라지고 나니 엄마는 혼자가 되셨다. 아무리 남편이 미워도 엄마는 늘 따뜻한 밥에 국을 차려주셨는데 이제는 함께 식사를 할 룸메이트가 없어진 것이다. 아무리 부부 사이가 좋지 않았어도 아빠는 엄마에게 보호자였다.


엄마는 부잣집 고명딸로 큰 한옥에서 조부모님과 함께 유년 시절을 보내셨다. 물주셨던 엄마의 할아버지가 고령의 나이로 돌아가신 후 엄마는 군대 간 큰 오빠를 대신해 얼떨결에 집안의 가장으로 살았다. 감성적이고 문학을 좋아했던 엄마는 생사가 오가는 대학 병원에서 간호사로 근무하면서 차갑고 이성적인 사람으로 진화했다. 그러다 서른의 나이에 남들 다하는 결혼을 하려고 소개팅으로 아빠와 결혼을 하게 되었다.


엄마가 원했던 배우자는 아마도 엄마의 할아버지처럼 든든하고 듬직한 사람이었을 것 같다. 하지만 아빠는 엄마와 오빠, 나… 우리 네 식구의 가장이라기보다 아빠 본 가족들의 가장으로 여전히 삶을 유지하셨다. 찢어지게 가난한 아빠의 본가는 아빠의 경제적 도움 없이는 정말 쌀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오빠와 나에게는 엄마가 우리 집의 가장이었다. 엄마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후부터 늘 누군가를 돌보는 인생을 사셨다.


내가 중학교 때쯤 우연히 읽은 엄마의 일기에 불행한 결혼 생활을 벗어나고 싶고 종교에 의지하던 엄마의 절망적인 내용이 있었다. 언젠가 나는 엄마에게 왜 그렇게 힘들어했으면서 아빠의 아내로 사는 것을 관두지 않았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엄마는 나와 오빠 때문이라고 했다. 나는 불행한 부부인 이상, 이혼을 하든지 이혼을 하지 않고 한 지붕에서 살든지 자식은 다 불행함을 느끼고 흡수한다고 했다. 그 불행함을 스펀지처럼 빨아들인 나약한 애물단지인 나는 엄마와 아빠의 관계를 어릴 때부터 끊어내려 노력했었다. 하지만 매번 엄마는 이혼을 할 결심이 없으셨다. 내가 느낀 바로는 엄마는 혼자 살기 두려우셨던 것 같다. 보호자의 부재가 공포스러우셨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혼자가 된 엄마가 유독 걱정이 되었다. 엄마의 선택도 아니고 배우자의 죽음으로 혼자 사시게 된 엄마가 가엽게 느껴졌다.




2. 1994년 결혼 10년 차 부부의 이야기


우연히 나는 오랜 책과 서류들을 정리하다 부모님이 부부 피정에서 쓰신 글을 읽게 되었다. 1994년 엄마와 아빠는 M.E.라는 가톨릭 부부 피정 프로그램에 참가하셨다. 이 프로그램을 참가하게 된 계기는 아빠의 가장 친한 지인이 부부 사이를 돈독히 하라며 부탁을 했기 때문이었다. 천주교 신자인 엄마와 관면 혼배를 하고 엄마가 오빠와 나에게 유아 세례를 주는 동안 아빠는 성당에 한 발자국도 들어가지 않으셨다고 들었다. 부부 사이가 점점 나빠지면서 엄마는 더 종교에 의지했고 아빠는 더 천주교를 싫어했었다. 그런 아빠가 지인의 부탁으로 부부 피정에 참가한 적이 있었다는 것이 놀라웠다. 이어질 내용은 그 남자와 그 여자의 이야기이다.






그 남자 이야기


<사랑해야 하는 당신에게>


나는 주위의 권유로 이 자리에 왔지만 끝까지 마음이 무겁습니다. 그래도 들어온 이상, 이 시간을 피하지 않고 버텨보려 합니다. 무엇을 얻기 위한 욕심이 아니라, 나와 당신, 그리고 우리의 감정이 조금이라도 매끄러워질 수 있다면 앞으로가 지금보다는 나아질 수 있으리라 믿고 싶습니다.


나는 참을성과 책임감을 내 장점이라 여기지만, 동시에 겸손하지 못하고 게으르며 결단이 부족한 사람임도 압니다. 나는 가정에는 보수적인 규칙을 들이대면서도 바깥에는 변화와 개혁을 말하는 이중성을 가지고 있고, 그 규칙이 어긋나면 불만을 혼자 삭이며 체념해 왔습니다. 나는 이 습관을 고치려 노력하지 않았고 그래서 우리의 대화가 더 막힌 듯합니다.


우리가 결혼하여 함께 산지도 10년이 넘었습니다. 그동안 아이들을 통하여서는 행복감을 느껴봤지만 미안스럽게도 당신을 통하여서는 행복감을 느껴본 경험이 없는 것 같습니다. 당신 역시 그러리라고 짐작은 합니다. 내가 결혼하기 전에는 부부가 서로 한 집에 살게 되면 정이 생기고 상대의 빈 부분을 채워주면서 사랑이 저절로 싹튼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10년의 결혼 생활을 겪어보니 우리에게 ‘사랑’이라는 단어는 아직도 낯설게 느껴집니다. 나는 이번 프로그램으로 ‘사랑은 같이 살면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공통을 찾고 감정과 고통을 나누는 자리에서 가까워진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우리에게도 ‘사랑’이라는 단어가 낯설게 느껴지지 않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당신은 남들에게 우리 남편은 통 말이 없어서 답답하다고 하소연하지요. 나는 말수가 적은 사람임을 인정합니다. 당신은 언제나 나에게 무엇을 얘기하려고 하지만 대부분 나는 잘 경청하지 못합니다. 대부분 우리 문제가 아닌 제삼자, 당신 가족들이나 유명인에 관한 이야기인데 간혹 그런 이야기가 아닐 때도 있지요. 당신에 나에게 얘기하는 주제들은 내가 관심이 없는 것이 대부분이라 나는 건성건성 듣습니다. 이제는 그것이 습관이 되었습니다.


미안한 얘기이지만 내가 오늘에서야 비로소 알게 된 것이 있습니다. 당신 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당신의 부모님이나 형제들보다도 아니, 어떤 면에서는 하느님보다도 더 당신을 사랑하신 면이 있었던 것으로 느껴집니다. 나는 그동안 당신의 할아버님에 대한 지극한 정을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고 좀 이상하게 생각을 했었습니다. 부모님도 형제들도 아닌, 할아버지에 대한 즐거운 추억을 나는 무시해 왔습니다. 당신은 나에게 이해시키려 하지 않았고 나도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자라온 환경이나 문화의 차이는 결국 대화로 알아내고 이해해야 한다는 점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그동안 말이 없는 습관 뒤에 숨에 당신을 힘들게 한 것 같습니다. 당신이 장거리 운전을 한 나에게 ‘수고했다’고 말해줄 때에도 나는 되돌려 위로하지 못했습니다. 운전자 옆에 오랜 시간 앉아있는 것도 힘든 것이 운전하는 사람보다 더 힘들고 고통스러울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음에도 말입니다. 또 본가에서 행사가 있어서 당신이 고생할 때 내가 먼저 ‘수고했소’라고 먼저 말하지 못한 내가 부끄럽습니다. 나의 무관심과 권위가 우리 둘 사이의 벽을 높였다는 것을 이제야 인정하게 됩니다. 생각해 보니 나는 그 벽을 허물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은 듯합니다.


우리에게는 무엇보다 신뢰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본가와 처가 사이에서 돈에 관한 의심과 상처가 아직 남아있고, 대화만으로는 풀리지 않는 근본이 그 아래에 있는 것 같습니다.


나는 무조건 부모가 자식에게 베풀어야 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면 자식 역시도 부모의 희생적 사랑에 대한 보답 역시 지극히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나는 당신에게는 물론 부모님에게도 제대로 마음껏 효도하지 못하고 있다고 느낍니다. 결혼 초기에 본가에 다소의 용돈을 드린 적은 있었지요. 하지만 집안이 시끄러워지고 당신과 다투기가 싫어서, 또 '기다리다 보면 나아지겠지' 하는 기대감으로 덮어두었습니다. 지금도 이 문제는 나 혼자만 고민해오고 있습니다. 나는 부모에 대한 의무를 도리라 믿어왔지만, 나의 그 믿음으로 행하는 효도가 당신에게는 상처가 되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번 강의 시간에 ‘살아가고 싶은 이유’에 대한 질문은 내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생소한 물음이었습니다. 나는 ‘살아가고 싶은 이유’를 책임만으로 채울 수 없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고민해 보니 사랑하고 싶은 것을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은 사람으로부터 사랑을 받는 것이 내가 살아있는, 아니 살아가고 싶은 이유가 되지 않을까 합니다. 행복은 작은 것에서 느낀다고 합니다. 그 시작이 부부와 가정이라는 것을 나는 깨닫습니다. 그래서 오늘 강의 시간에 배운 ‘결혼한 독신’이 되지 않도록 내가 변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는 그동안 피곤하고 고달프게 살아왔습니다. 나는 위선과 오만, 가부장적인 사고방식을 내려놓고, 앞으로는 겸손하고 진솔하게 약함도 드러내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당신이 열린 마음으로 도와준다면 나는 더 자연스럽게 변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나는 당신에게 신앙이 매우 소중하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나는 하느님이 우리 가정의 모든 일에 우선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 가정에서 가장 먼저 자리매김되어야 할 것은 ‘부부 관계성’이라는 공감입니다. 이 공감이 함께 세워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둘 다 체념 속에서 공허한 메아리만 듣게 될까 두렵습니다.


이 프로그램을 통해서 나는 많은 것을 느꼈습니다. 그중에서도 당신의 내면세계를 약간 들여다볼 수 있었으며 나의 내면세계 역시 당신이 느꼈을 것입니다. 나는 우리 각각의 내면세계의 차가 너무나 넓고 깊기 때문에 쉽게 좁혀질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러한 사실을 일부나마 확인할 수 있었던 것에 대해 만족합니다.


우리 사이의 벽을 허물기 위한 첫걸음을, 늦었지만 내 쪽에서 시작해 보겠습니다.






그 여자 이야기


<하느님이 지극히 사랑하는 당신에게>


나는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겠어서, 그리고 당신과 대화를 하고 싶어서 이곳에 왔습니다. 결혼 전이나 결혼 후나 내 삶은 쉬워진 것이 없습니다. 직장에서도 집에서도 나는 계속 일을 하며 지칠 대로 지쳤습니다. 때로는 세상이 싫어지기도 했습니다. 나는 병원으로 출근할 때 이 세상과 단절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나섭니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나는 탄생과 죽음을 만나며 결국 하느님 앞에 서게 됩니다.


나는 이제 쉬고 싶습니다. 많이 지쳤고, 내 몸도 예전 같지 않음을 느낍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당신이 나를 위해 있다’는 생각도 ‘내가 당신을 위해 있다’는 생각도 잘 들지 않습니다. 나에게 있어서 당신은 배우자라기보다는 아이들의 아빠라는 생각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내게는 하느님만 분명하고 그다음은 아이들뿐인 것처럼 느껴집니다. 나는 당신을 모르겠습니다. 당신의 얼굴과 표정만으로는 아무것도 알 수 없고, 말을 하지 않는 당신을 나는 알아낼 수가 없습니다. 당신은 내게 왜 이렇게 볼 수가 없는 존재가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사랑이란 표현을 하기에는 맞지 않는 우리의 만남은 너무 늦은 나이였던 것일까요. 나는 결혼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며 자랐던 것 같습니다. 나의 부모님의 모습은 정상적인 부부의 모습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당신 또한 정상적인 가정에서 자라지 않았던 듯합니다. 오랜 시간 집을 나가 다른 여자분과 살림을 차렸던 아버지가 집에 돌아오셨음에도 당신은 아버지처럼 당신 가족을 책임져야 한다는 책임감이 아직도 강한 것이 안타깝습니다. 그래서 나와 아이들은 열외로 밀어버리는 것 같은 당신은 아이들의 아버지이자 나의 남편임을 잊은 듯 보입니다. 나는 과부의 느낌을 종종 갖고는 합니다. 우리 둘 다 보고 배운 거울이 되는 부부상이 없어서 쉽게 해 낼 수가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내 마음 깊은 곳에는 ‘가난’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본가 이야기를 할 때면, 돈이 깨질 것 같은 먹구름이 마음을 가려서 당신의 말이 들리지 않을 때도 있었습니다. 나는 상대의 아픈 곳을 겨냥해 파헤치는 내 밑바닥을 스스로도 두려워합니다. 그러면서도 나는 자유롭게 하고 싶습니다.


나는 남에게 폐를 끼치는 것을 싫어하고 사람을 편안하게 하려 노력하지만 그 태도조차 내게는 참 피곤합니다. 겉으로 나는 온화해 보이나, 나 자신에게는 지나치게 인색하고 결정을 내리기 어려워하며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피하고 부정적이고 이기적인 면도 있습니다. 나는 상대의 가장 아픈 곳을 겨냥하여 파헤치기를 좋아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내 밑바닥에 자리 잡는 그 습관 때문에 계속 상대에게 상처를 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스스로도 그 상처로 인해 아픈 느낌입니다.


무엇보다 나는 내 아버지의 이야기를 숨기며 살아왔습니다. 이제는 그 죄의식에서 벗어나고 싶습니다. 아버지의 병과 어머니의 희생, 그 긴 세월을 나는 등에 지고 사는 느낌입니다.


나는 이상한 환경에서 자라난 것이 사실입니다. 나는 아버지 상이 뚜렷하지 않고 따뜻한 부모의 사이를 모르고 자랐습니다. 내가 자라온 환경 때문에 나는 결혼에 대해 부정적인 사고를 가지며 살았습니다. 나의 어머니는 불쌍하신 분입니다. 직장 다니는 나 때문에 아이들을 돌보느라 지금까지도 희생하고 계시지요.


나의 아버지는 경복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연희 전문 철학과를 다니셨습니다. 4대 독자인 아버지에게 할머니는 검도와 바이올린을 가르치셨습니다. 할아버지는 냉정하고 날카롭고 매서운 성격과 동시에 자상한 성격을 지니셨습니다. 할머니는 아량이 바다와 같이 넓고 시원시원한 성격이셨습니다. 내 할아버지 할머니는 금슬이 좋은 분들이셨습니다. 큰 일을 처리할 때마다 서로 의논하시는 모습을 자주 보고 자랐습니다.


아버지는 연희 전문 2학년에 일본 징용에 끌려가시게 되었습니다. 일본에서 배를 타고 돌아오는 길에 죽었다고 들었던 아버지는 다행스럽게도 무사히 집에 돌아오셨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교수의 강의가 들리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아버지의 병은 날로 심해져서 대학을 다닐 수 없게 되었고 할머니는 아버지를 위해 유명한 정신과 의학박사를 모두 찾아다니며 집 두어 채쯤은 날렸다고 했습니다.


그 후 결혼을 하면 나을 것이라는 항간의 얘기가 있어서 나의 조부모님은 아들의 병을 속이고 시골 처녀인 어머니를 데려와 결혼을 시켰습니다. 아들을 낳은 어머니는 아들 때문에 조현병인 남편을 뿌리치지 못하고 이날까지 살아오셨습니다. 남편을 모르고 사셨습니다. 아버지의 병은 거울을 자주보고 계절이 바뀔 때가 되면 남을 때리는 것이 병이었습니다. 집에 친구가 와도 아버지는 외딴 방에 계셨으며 자주 나오시지 않았고 또 나오시면 할머니가 들어가라며 숨겨주셨습니다. 환절기에는 병원에 입원을 했다가 다시 나아지면 퇴원을 하고는 하셨습니다. 정신 질환 때문에 자주 힘들어하셨던 아버지였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4남매는 할머니의 무서운 사랑과 할아버지의 경제력으로 그늘 없이 자랐습니다. 정신이 왔다 갔다 하는 아버지셨지만 ‘가고파'라는 가곡을 4절까지 거울을 보며 부르는 모습 그리고 바이올린을 켤 때의 아버지 모습은 지금도 생생합니다.


나는 당신과 상당히 다르다고, 반대라고 이야기하기도 했지요. 내가 당신에게 아버지 이야기를 안 한 것은, 아니 못 한 것은 그런 이야기를 할 가치를 못 느꼈기 때문입니다. 당신 부모님만 중시하는 것처럼 보이는 당신이 나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오늘 이렇게 나의 성장 과정에 대해 자연스럽게 알릴 수 있어서 기뻤습니다. 특히 나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다 털어놓으며 실컷 울고 나니 낀 먼지가 다 없어진 듯 깨끗한 마음 상태입니다. 나는 당신이 이런 모음에서 울 수 있으리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만 당신이 나와 함께 훌쩍일 수 있다는 사실 기쁩니다. 남자의 체면도 아랑곳하지 않고, 순수하게 눈물을 떨굴 수 있는 그 자체가 무척 좋군요. 당신을 그저 냉정한 냉혈 인간쯤으로 생각해 온 내게 또 하나의 선입견을 바로잡을 수 있는 이 시간이 소중하게 느껴집니다.


나는 한편으로는 ‘의사’가 되고 싶은 생각을 갖고 있었지만 너무 힘들기 때문에 책을 좋아하는 습성대로 국어 선생님이 되기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기울어져가는 집을 위해서 나는 적성에도 맞지 않는 ‘간호학’을 선택했습니다. 10년도 지난 지금, 적성에 맞지 않는 일을 아직도 하고 있어 힘들지만 나는 그래도 유용한 학문을 공부한 것에 대해 감사함을 느낍니다. 나는 한 때 아버지의 정신 질환 때문에 정신과 간호사가 되려는 생각도 해 보았으나 ‘자아’가 강하지 못한 것 같아 포기하였습니다. 단지 자아가 약한 내가 자식을 낳고 살고 있다는 사실이 어느 때는 이상하다고 생각됩니다.


우리는 오래 덮고 살아왔습니다. 잠자리도, 대화도, 마음도 각자 다른 방으로 흩어진 채 지내왔습니다. 돌이켜 다시 생각해 보면 우리가 같은 방에 누워있던 기억은 까마득합니다. 10년의 결혼 생활 중 3년 정도만 같은 방에 누워서 잔 듯합니다. 아마도 단독 주택에 살 때 변리사 시험공부를 한다던 그때부터 각방을 썼던 것 같습니다. 나는 담배를 계속 피우는 당신이 아주 싫었기 때문에 한 침대에서 자는 것이 고통스러웠던 기억이 납니다. 신혼 때 통행금지 때문에 담배를 살 수 없었을 때 버린 꽁초를 주워다 피웠던 것을 생각하면 당신이 담배를 끊는 것은 해내기 힘들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차라리 담배 냄새의 고통보다는 따로 자는 편이 낫겠다, 코 고는 소리 안 들어 좋겠다, 술 냄새 맡지 않아 좋겠다... 하는 생각을 하면 차라리 따로 자는 것이 마음이 편하게 생각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나는 자주 우리가 다른 부부들과 많이 다르다는 생각이 들고는 합니다. 좀 지내다 보니 각방이 편해져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도 해보지만 당신에게 혹시 다른 여자가 생기지는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우리가 결혼하던 날, 공항으로 가던 차 속에 유독 당신과 나를 따라서 당신 옆에 앉은 그 여직원 생각이 나기도 했습니다. 나는 자주 그 여직원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몇 년 전에 우리 집에 온 적도 있었지요. 나는 당신과 그 여자는 그저 인연이 닿지 않았으니 다른 짝을 찾겠지 하는 정도로 생각을 하지만, 가끔 각방 살이를 하는 우리 부부가 걱정될 때마다 그 여자가 생각이 납니다. 그래도 나는 당신이 늦게라도 집에 들어오는 날은 안심이 되고, 집에 오지 않는 날은 허전한 것을 보면 아직 우리가 끊어진 것은 아닌가 봅니다.



내가 하느님을 깊이 믿게 된 계기는 나의 어머니 때문입니다. 어머니는 원인을 모르는 혈소판 감소증에 걸린 과거가 있습니다. 그 숱한 세월을 고독과 방황의 젊음의 나날을 오직 자식을 위해 희생하던 분이신데 갑자기 이런 병에 걸리셨습니다. 큰 병원에서 가망이 없다고 6개월 시한부 판정을 받으셨습니다. 1주일에 한 번 정도 어머니의 상태가 악화되면서 고비가 찾아왔는데 그때마다 병원에 모시고 가서 수혈을 받으셔야 했습니다. 어머니는 김수환 추기경님이 집 근처 성당에 오신다는 말을 들으시고 꼭 데려다 달라고 부탁하셨습니다. 어머니는 김수환 추기경님의 옷자락을 붙잡고 살고 싶다며 울며 애원하셨습니다. 그날, 기적적으로 어머니의 ‘죽을병’이 치유가 되셨습니다. 하룻밤 사이에 어머니의 모든 혈액 수치가 정상으로 돌아왔습니다. 내 어머니의 치유는 그동안 어머니의 삶을 불쌍히 여기신 하느님의 배려와 선물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해 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한 나는 당신도 하느님을 알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결혼 초 신혼집에서 나는 신앙을 지키는 것이 힘들었습니다. 시어른 두 분이 오셔서 나에게 개종을 요구하셨지요. 당신이 나로 인하여, 하느님을 알고 싶지 않다면 나의 잘못이겠지요. 우리 부부는 일치를 느껴 본 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 또 일치를 위해 서로 노력한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당신의 부모와 형제에 대한 사랑을 나도 이해할 수 있기를 하느님께 청하고 기도를 드립니다. 당신이 변하지 않아도 내가 먼저 변해 당신에게 닿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대화는 둘이서 해야 가능하지요. 나는 당신과 대화가 되지 않아도 혼자서 하느님과 대화하며 이 세월을 견뎌왔습니다. 나는 당신이 혼자 대화할 수 없는 사람인 것 같아서 걱정이 됩니다. 나는 당신 자신을 당신의 부모님보다 더 중시하는 사람이 되기를 이 시간 동안 기도해 봅니다.


이번 사흘동안 당신이 체크한 ‘이혼의 징후’ 표시를 내 것과 비교해 보았을 때 내 쪽보다는 당신이 더욱 심각함을 감지하였습니다. 우리는 너무 덮고 살아온 것 같습니다. 조금 시간이 지나면 서로가 서로를 봐야 할 필요를 느끼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가끔 당신 옆에 눕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저 적적하고 나 혼자만이 아니라는 그런 느낌으로 같이 누워서 자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곧 스스로가 꺾어버리고 내색조차 않게 됩니다. 공통의 영역에서 지내는 시간이 적어지면 마음도 멀어지는 것은 틀림없을 겁니다. 치고받고 싸우더라도 공통의 공간에서 우리가 하루의 마지막을 함께 마무리했더라면 지금보다 상황이 나았을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남은 시간 동안 완전한 일치를 이루지 못하더라도, 서로의 자리를 새로 놓고, 아이들에 대한 공통의 사랑만큼은 확인하며, 조금이라도 덜 고통스럽게 함께 늙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길의 끝에서, 당신과 나의 노래가 불협화음이어도 희망을 버리지 않도록, 나는 오늘도 하느님께 맡기려 합니다.


하느님은 우리 두 사람이 사랑하며 살기를 바라시겠지요. 또 하느님은 그렇게 되도록 해주실 것입니다. 5월의 찬란한 햇볕이 나무 위로 쏟아져 내립니다. 당신과 나의 삶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시간들이었습니다. 당신이 있었기에 이런 시간들이 허락되었음을 감사드리며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당신을 떠나며>


언젠가는 와야 할 것이 드디어 내게도 찾아온 것 같습니다. 나는 결혼은 하지 않겠다고 생각하며 산 것이 청소년기부터였습니다. 대학 시절에도 오직 공부만 하는 그런 학생이었습니다. 나는 아버지가 계시지 않아서 할아버지가 벌어놓은 돈을 곶감 빼먹듯이 써야 했습니다. 더구나 사립 대학의 적지 않은 등록금을 쾌히 내주시는, 나를 지극히도 사랑하시는 할아버지의 모습이 가끔 떠오릅니다. 고등학교 앞 터널까지 나오셔서 나의 가방을 받으러 마중 나오셨던 저고리 입으신 사랑하는 할아버지… 나는 이런 사랑을 아직 아무에게서도 받아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나는 이제 그 할아버지가 계신 곳으로 가야 할 것 같습니다.


사흘이 멀다 하고 죽음을 대하는 나지만, 막상 내게 닥쳐왔다니 당혹스럽고 어떻게 나를 정리하고 떠나야 할지 캄캄합니다. 당신에겐 내가 맞지 않는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공통의 공감대가 마련되지 않은 채, 그대로 시간을 흘려보냈다는 느낌입니다.


뛰어넘어야 할 벽을 나는 뛰어넘지 못하고 기력이 다하여 그 앞에 쓰러져 가장 자유로운 곳으로 갑니다. 내가 사랑했던… 나의 소중한 아들과 딸을 잘 부탁합니다. 창 밖에는 5월의 푸름이 바람을 따라 일렁이고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성모님은 꽃관을 쓰시고 다소곳이 땅을 향해 기도하고 계십니다.


여보! 내가 죽어서도 당신을 위해 기도해 드릴게요. 나를 위해 기도해 달라는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당신은 기도하지 않을 테니까요…


나는 이 세상에 별로 미련이 없는 것 같습니다. 나는 고통스럽지 않게 가도록 해 주십시오. 그리고 나를 성당의 성가 속에서 가도록 해 주십시오. 그토록 싫어하는 성당 문 앞에 한 번만… 나를 위해 한 번만 들어와 주기를 바랍니다. 많은 것을 요구하기는 싫군요.


모든 고통과 세파의 고뇌는 이 한 몸에 지고 갑니다. 하느님께 맡기며 가엽게 떠나도록 바랍니다.


당신과 지낸 시간은 추억이 많지는 않지만 고이 간직하고 갑니다. 부디 아이들을 잘 부탁합니다. 가장 나를 사랑하실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며 햇볕과, 나뭇잎과, 새소리와 내가 늘 입던 흰 옷과 나를 사랑하던 사람들과 이별하고 내가 죽음을 지켜보던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가겠습니다. 부디 잘 지내십시오. 나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하느님께로 갑니다.






3. 나의 부모님 사이에 사랑이 없음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1994년 부부 피정에서 쓰신 이 글들을 발견하고 오랫동안 찾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은 것처럼 기뻤다. 하지만 편지들을 읽어가면서 해답을 찾은 기쁨은 금세 절망감으로 바뀌어버렸다. 사랑이 부재한 부부를 부모로 둔 나의 상처들이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그 시작과 역사를 알게 되니 한편으로는 속이 시원했지만 우울했다. 말이 없는 아빠, 돌아오지 않는 메아리에 지치고 외로웠던 엄마. 신앙, 본가/처가, 돈 (가난), 양육, 신뢰의 문제들 속에서 이 두 사람의 골은 깊어졌던 것 같다.


내가 마음이 유난히 아팠던 편지는 엄마가 쓰신 <당신을 떠나며>라는 편지였다. 아빠는 그런 편지가 없었는데 엄마의 노트에만 이 편지가 있었다. 아마 서로에게 유언을 써보라는 숙제였던 것 같다. 엄마는 엄마를 많이 사랑하셨던 그리운 할아버지가 계신 곳으로 가야 한다며 이 세상에 별로 미련이 없다고 고백했다. 엄마가 사랑했던 소중한 아이들을 아빠에게 부탁한다는 글을 쓴 엄마가 안쓰러웠다. 어떻게 오빠와 나를 남기고 떠나는데 이 세상에 미련이 없다고 하실 수 있을지 서운하기도 했다.


내가 어렸을 때 엄마는 늘 힘들다고 말씀하셨다. 적성에도 맞지 않는 간호사라는 직업을 가난 때문에 선택했다며 우울해하셨다. 3교대 근무를 마치고 오시면 하루 종일 엄마를 기다린 나의 “엄마!" 소리는 외면당하기 일쑤였다. 내가 성인이 되어 약사가 되고 첫 12시간 근무를 했을 때 힘들어서 엄마에게 전화를 한 적이 있었다. 엄마는 나에게 “그래, 너도 일 해보니까 알겠지… 12시간 뛰어다니면서 근무하면 초주검이 되거든. 너네 키울 때 엄마도 그랬어…”라고 하셨다. 나는 엄마의 말은 이해를 하면서도 엄마의 마음은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엄마를 이해해 주어야 했다. ‘엄마가 힘들어서,’ ‘엄마가 바빠서,’ ‘엄마가 일을 하지 않으면 우리 집에 돈이 없어서’ 이유는 다 엄마 때문이었다. 어린 나는 돌봄을 받지 못했다. 월급을 주는 간호사 딸이 최우선이었던 외할머니는 나에게 욕을 많이 하셨고 단호하게 엄마를 귀찮게 하지 말라고 무섭게 타일렀다. 어릴 때 나는 다 이렇게 어린 시절을 사는 줄 알았었다. 다 이렇게 외롭고 힘들게 사는 줄 알았었다. 하지만 친구들이 엄마와 친하게 대화하는 모습을 보며 결핍을 깨달았다. 내가 엄마와 공유하고 싶었던 수많은 이야기들은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한 채 나는 방치되어 자랐던 것이다. 처음 약사로 긴 근무를 마치고 힘들어 엄마에게 전화를 했을 때 “아이고 힘들었지…” 하는 위로보다 엄마의 사정을 이제야 알게 되었으니 나를 이해해 달라는 엄마의 말이 참 차갑고 아팠다. 나는 부모에게 보호받지 못하고 방치되어 자란 아이였다는 생각에 서글펐다.


어렸을 때부터 나는 부모님 사이의 사랑이란 느껴지지 않았던 것 같다. 친한 친구네 집에는 거실에 ‘사랑한다’는 말이 쓰여있는 부모님의 연애 시절 사진이 걸려있었다. 나에게 부부간의 사랑은 생소한 것이어서 그 사진을 볼 때마다 이상하게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큰 외삼촌 댁에 갔을 때도 나는 신기하게 생각했다. 큰 외삼촌과 외숙모는 화목하시고 친하셔서 두 분이서 무슨 일이든 함께 하시는 것을 봤다. 함께 식사를 할 때도 서로에 대한 배려가 묻어나는 대화를 들은 적이 많다. 안타깝게도 나는 나의 부모님이 부부간에 사랑을 표현하는 말이나 선물, 그리고 행동을 단 한 번도 목격한 적이 없다.


나의 부모님은 부부의 의미에 대해 생각을 해보지 않고 덜컥 결혼을 해 버리신 것 같다. 맞선으로 만나 결혼을 하게 된 이 두 사람은 결혼을 깊이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무엇보다 결혼 생활의 전제에는 사랑이 밑바탕이 되어 신뢰가 건설되어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바람직한 부부는 어떤 모습인지에 대해서 무지했다.


엄마의 말처럼 두 분 다 화목한 부부 사이를 본 적이 없었던 것이 이유일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어릴 때 좋아했던 백설공주나 신데렐라는 다소 정상적이지 않은 부모를 두었음에도 사랑을 찾았다. 이 공주들은 편부모 가정과 표독한 계모를 만나 성장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찾아냈고 해피엔딩을 만들었다. 아니, 동화를 벗어나서 현실을 둘러보자. 엄마와 같은 부모를 공유한 나의 큰외삼촌은 사랑을 찾아 외숙모와 결혼하셨고 금슬이 좋은 부부가 되셨다. 아빠와 같은 부모를 공유한 큰아버지는 직업 군인으로 여러 부대를 옮겨 다니며 근무하시는 동안 큰어머니께 잘 대해주셨다고 들었다. 내가 기억할 때 큰아버지는 큰어머니의 말씀을 존중하셨고 본가의 식구들보다도 본인의 가정을 우선하셨다. 그 모습을 둘째 아들인 나의 아빠는 못 마땅해하고는 하였다고 들었다. 하지만 큰아버지의 모습은 바로 가정을 이룬 남편으로 아빠도 본받아야 할 모습이었다.


아니면 두 사람은 사랑이 무엇인지 몰랐던 것일까?


사랑을 하고 싶고 사랑을 받고 싶은 욕구는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이다. 부모님은 결혼 전에 1년을 연애를 하셨다고 들었다. 옛날 옛적에는 신랑이 신부 얼굴도 모르고 결혼했었고 해외 어느 나라에는 아직도 정략결혼이 있다고 들었다. 나의 부모님은 공통 지인이 있었고 그 지인을 통해 알게 되어 1년 동안 연애를 했다. 도대체 이 두 사람은 1년 동안 어떤 대화를 한 것일까? 이 두 사람은 성장 배경과 가정환경을 공유한 적도 없고, 신앙적인 믿음도 또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그 기본적인 것들에 대하여 깊게 대화한 적이 없었다. 부모님은 편지에서 모두 서로에게 ‘사랑’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고백했다. 어떻게 사랑이 느껴지지 않는 사람끼리 결혼이라는 큰 결정을 할 수 있었지? 80년대 후반 시대적인 흐름을 미루어볼 때 30살의 노처녀와 35살의 노총각은 혼기가 찼고 결혼을 해야 부모님의 걱정을 덜어드린다는 사회적 부담에 결혼을 한 것일까?


이 두 사람은 우둔한 결혼 결정 후에 재빨리 헤어졌어야 했다. 화목하지 않은 부모를 둔 자녀는 부모가 함께 살든 헤어져 살든 상처를 받게 되어있다. 이와 같이 신뢰, 사랑, 배려가 하나도 없는 이 두 사람은 나와 오빠에게 참된 부부의 모범을 보인 적이 없다. 엄마가 자주 얘기하고는 했던 “자식 때문에,” “너희들 때문에” 헤어질 결심을 할 수 없다는 말은 나의 부모님의 깊은 벽이 나 때문에 깊어진다고 죄책감을 갖게 만들었다. 여러 이유 때문에 우리 부모님은 이렇다며 이해해야 했다. 응석을 부려야 할 나는 부모님의 마음을 헤아려야 했다.


결론적으로 이 두 사람은 결혼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 결혼을 선택하지 말았어야 했다.


나는 이 두 사람을 부모로 선택한 적이 없다. 이렇게 태어나 버린 것이 그저 억울했다. 나는 이 부부의 아이로 태어나지 말았어야 더 행복했을 것 같다.


내가 이 부부에게서 태어난 이유는 무엇인가? 내가 세상에 온 이유는 과연 무엇인가?


그동안 그 이유를 찾지 못했기에 나의 마음은 항상 공허함으로 가득 차 있었던 것 같다. 이 지옥 같은 굴레를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나는 이 허함의 근원을 찾아야만 했다.




저는 돌아가신 아버지의 유품을 정리하던 중, 우연히 부모님이 부부 피정에서 쓰셨던 글과 편지들을 보고 많은 생각에 잠겼습니다. ‘사랑‘이라는 단어가 어울리지 않는 이 부부. 그리고 지난 10년 동안 서로에게 닿지 않았던 이 부부의 대화들은 그 후 30년이 더 지난 결혼 40년 차에도 닿지 않았습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주위 어른들로부터 의젓하고 생각이 깊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어요. 하지만 저의 내면은 자주 불안했고 허전했고… 또 외로웠습니다. 어린 제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지만 각자 사정이 있는 어른들을 귀찮게 하면 안 되니까요… 저는 이 두 사람이 만든 부부, 가족이라는 울타리 속에서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아이로 자란 것처럼 보이나 감정적으로 방치되었던 것 같아요.


제 안에는 조금의 빛도 시야에 보이지 않도록 두 팔은 접은 다리를 감싸고 머리는 무릎으로 푹 숙인 웅크린 아픈 아이가 있습니다. 그 아이에게 용기 내어 손을 뻗어봅니다.


오늘도 함께 해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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