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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하루 Jan 17. 2024

생활비를 요구하고 싶지 않다.

자존심이 센 나라서

부모라는 분의 심기를 거스르고 얼마 후, 그분께선 생활비를 내놓든지 집을 나가던지 둘 중 하나를 택하라고 하셨다. 냅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와 한 엄포였는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하는 말은 일종의 협박과도 같았다.     


나는 올 것이 왔구나 싶어 말했다. 얼마를 드리면 되는지 일단 그것을 아는 것이 필수였으며 얘기를 하면 드리겠다고 했다. 그분은 답이 없었다. 그렇게 몇 달이 흘렀다. 이번에도 현관문을 열고 들어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셨다. 왜 돈을 내놓지 않느냐는 다소 황당한 이야기였다. 나는 다시 말해야만 했다. 얼마를 드리면 되냐고. 대답하지 않은 건 당신이라고. 그분은 나를 꾸짖으며 "말한다고 다 줄 수 있냐. 네가 얼마를 버는지 내가 어떻게 아냐. 네가 알아서 내놓아야 하는 거 아니냐"고 말했다. 나 역시 얼마를 줘야 만족이라는 걸 하실 분인지 알 수 없다는 답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분께선 묘안을 내놓으셨다. 내 월급의 일정 퍼센트를 내놓으라는 것이었다. 그분은 기어이 내 월급을 알아내고 싶으셨나 보다.     


자식은 어려서부터 부모에게 평가받는 것에 익숙하다. 잘 나오지 못한 성적표를 보여드리면 죽은 듯이 죄인이 되어야만 하고, “누구네 집 딸은 전교 1등을 했다던데” 같은 말도 너무나 당연하게 들어야만 한다. 그런데 다 커서까지 내 월급 상황을 전부 공개하라니. 생각해 보면 회사에서 만났던 내 부모의 또래도 비슷한 말을 했었다. 아들의 돈을 전부 관리해야 속이 편하겠다는 것이었는데, 너 좋으라고 4개의 보험을 가입시킨 거라는 그분의 태도와도 유사했다. 자식을 못 믿겠는 건 비단 내 부모라는 분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나도 그럴까? 내가 궁핍하거나 혹은 넉넉하더라도 내 자식의 월급 내역을 구태여 알고 싶을까? 물론, 궁금할 수는 있다. 그러나 후자라면 그렇게까지 자식을 들들 볶지는 않을 거라고 본다. 내가 일단 많으니 자식이 돈이 많건 적건 그건 큰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보탬이 되려 할 것이다. 반대로 빈곤한 부모는 자식이 캥거루가 될까 전전긍긍하며 두려워한다. 그러니 돈을 얼마나 버는지 알아야겠는 거다.     


없는 부모는 자식에게 은근히 요구한다. 너에게 모든 것을 쏟아붓느라 노후 따윈 준비되지 않았다고. 이 모든 것이 다 너 때문이라고. 그러니 알아서 척척 돈을 내놓으라고. 죽는 날까지 자식 놈의 새끼를 판단하고 평가할 거라고. 그들은 그렇게 위에서 내려다본다.     


너무할 정도로 쏟아부어 나온 일종의 보상 욕구가 아닐까 싶다. 그래서 난 분수를 지키고 살고 싶은 거다. 아이가 공부를 못하면 못하는 대로 인정하고 응원하며 다른 장점을 살려주고 싶다. 꼭 입시와 관련된 장점이 아니어도 된다. 그저 사회 구성원으로 심성이 바르고 튼튼하게만 자라줬으면 좋겠는 바다.     


당연히 헤맬 수도 있다. 최대한 원하는 것을 찾게 도와주고 싶지만 얼마든지 돌고 돌 수 있다. 이때에도 쑥쑥이의 선택을 응원하고 싶다. 죽는 날을 설정해 놓으니 이런 점이 마음에 든다. 내 막연한 미래를 걱정하느라 아이를 짐짝으로 보지 않을 수 있다. 어렵다며 생활비를 요구하지 않을 수 있다.      


아이는 선택받았을 뿐이니까. 이것이 나만의 자존심 지키기 방법이다.




*사진출처 : 뤼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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