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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imKlaus Nov 16. 2024

이터널 선샤인

몬탁 해변가의 풍경

2023년 여름에 나는 뉴욕을 갔다. 아는 형이 나를 데리고 몬탁을 방문했던 적이 있다. 그 형은 마음에 드는 여성이 있으면 작업을 하기 위해 몬탁을 데리고 온다고 하였다. 그래서 나름 기대를 했었다. 하지만, 솔직히 그냥 해변가였다. 그리 아름답지도, 그리 독특한 분위기가 있지도 않은 풍경이었다. 


좋아하던 여자와 잘 안 되어 우울감에 사로잡혔던 20살의 나는 어느 새벽에 영화 <이터널 선샤인>을 보았다. 사실 이별도 아니었지만, 이별했다 생각하고 보아서 몰입이 정말 잘 되었던 기억이 있다. 그 몽환적인 분위기와 가슴 시린 감수성이 당시의 내 정서와 딱 맞아 오히려 이 영화가 무서울 지경이었다. 그렇게 내 평생에 두 번 다시 보지 못할 것만 같았다.

누구는 같으니 끌리고, 누구는 다르니 끌린다. 사랑에 규칙이 없다는 증거다.


15년도 더 된 최근에 이 영화를 다시 보았다. 비슷한 감정과 상황에 이끌렸기 때문이다. 작년에 내가 직접 가보았던 몬탁 해변가에 자꾸만 눈길이 갔다. 실제로는 그냥 평범한 바닷가였는데, 영화에서는 왜 그리 아름다울까? 저 평범한 해변을 배경으로 뛰어노는 두 남녀가 꽤나 보기 좋았기 때문이다.


조엘(짐 캐리)은 칙칙한 옷을 입었고, 클레멘타인(케이트 윈슬렛)은 오렌지색 후두를 입었다. 상반되는 겉모습만큼이나 성격도 서로 다르다. 글쎄, 나 또한 재미없는 남자로서 조엘의 대사가 마음에 꽂힌다.


“나한테 눈곱만큼이라도 관심을 보이는 여자는 왜 다 마음에 드는 걸까?”


나는 우연을 필연이라 착각하고, 조엘은 필연을 우연이라 착각한다. 영화는 조엘과 클레멘타인의 사랑이 한낱 우연이라는 착각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더 큰 착각은 약 15분 간의 초반 러닝타임이 영화 시작이 아니라는 점이다. 관객이 영화 처음에 보게 되는 장면들은 둘만의 이야기 뒷부분에 해당한다.

위태롭지만 사랑하고, 사랑하나 위태롭다. 사실 모든 남녀 사이가 그렇지 않을까?


마지막 기억 속의 그녀는 취해 있었다. 조엘은 “한심하다”라고 잔소리를 했다. 더 심한 말을 하고서야 그녀는 그를 떠났다. 이제 그녀에 대한 기억도 사라진다. 행복할까? 그럴지도. 하지만 아닐지도. 왜냐하면 그녀에 대한 기억은 대부분 행복이 주된 풍경이기 때문이다.

깨질 것만 같지만 아름다운 사랑.


이 영화에서 가장 아름답고도 유명한 장면이 그러하다. 얼어붙은 강 위를 뛰노는 두 남녀는 위태롭지만 아름답다. 얼음이 단단해서가 아니라 깨질 수 있어서 더욱 그렇다. 그리 두껍지 않다면, 긴장도, 낭만도, 사랑도 없을 것이다.


그녀가 점점 사라지면서 조엘은 그녀의 공백을 확인한다. 그 구멍의 크기와 깊이를 확인하고서야 비로소 그녀를 향한 사랑을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닫는다. 분노의 유치한 감정이 두려움으로 바뀌고, 조엘은 비로소 클레멘타인이라는 한 여자를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이제 그는 그녀의 손을 붙잡고 망각의 추격으로부터 도망치기 시작한다. 


‘망각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자기 실수조차 잊기 때문이라.’


나 또한 좋아하는 니체의 글귀다. 살면서 수많은 실수를 해온 나는 차라리 망각하고자 한다. 하지만 조엘은 이를 거부한다. 그녀를 지우겠다는 자기 실수조차 되돌리고자 한다. 이 영화를 보는 내내 망각에 취하고자 하는 나와 그에 저항하고자 하는 조엘의 차이를 보면서 나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결심했다. 실수의 기억이 저주일지라도 나는 잊기보다는 차라리 가슴속에 새기겠다고.

몬탁 해변가는 저들만을 위한 공간이고 추억이다.


드디어 조엘은 그녀를 처음 만난 그 장소, 그러니까 둘 사이의 첫 시간에 다다른다. 시린 바람과 파도가 사뭇 쓸쓸해 보이는 몬탁 해변가. 클레멘타인은 말한다.



“때가 됐어. 이제 곧 사라질 거야.”


그리고 이어지는 대화.


“알아.”

“우리 어쩌지?”

“이 순간을 즐겨.”


이렇게 저 둘은 몬탁 해변가를 늦은 밤까지 걷는다. 모르는 사람 집에 들어가 술도 먹고 이야기도 한다. 그리고 이미 못 했던 작별 인사를 한다.


“안녕, 조엘.”

“사랑해.”

“몬탁에서 만나.”


해가 뜨자 그녀는 사라졌다. 조엘은 그녀를 잊어버렸다. 하지만 그에게 축복은 없다. 그녀가 지워진 마음에 남겨진 커다란 구멍은 클레멘타인이라는 한 여자의 형상을 하고 있다. 그러니 실수로, 혹은 우연히도 조엘이 몬탁에 간 것은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영화는 다시 맨 처음으로 돌아온다. 조엘은 우연을 가장한 필연에 이끌려 몬탁으로 간다. 이렇게 그 둘은, 전혀 맞지 않는 이 두 남녀는 다시 만남을 시작한다. 클레멘타인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완벽하지 않아요. 마음의 평화를 찾으려는 망가진 여자일 뿐이죠. 완벽하지 않다고요.”


그녀는 그와 자신이 이미 한 번의 실패를 겪었기 때문에, 두 번의 실패도 예견되어 있다고 하소연한다. 하지만 조엘은 이렇게 말한다.


“괜찮아요.”


결국 속는 셈 치고 다시 믿어보는 것이 사랑이다.


이렇게 영화는 반복된다. 조엘과 클레멘타인은 다시 서로를 미워하고, 헐뜯고, 실증내고, 그리고 사랑할 것이다. 그리고 헤어질 것이다. 하지만 또 만나겠지. 끝없는 도돌이표의 순환 속에 저들의 사랑은 눈 내리는 저 심심한 몬탁 해변가를 장식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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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읽는 그녀가 평안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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