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의 상자를 열어낼 용기
나는 어릴 적부터 물리학을 좋아했다. 하지만 그 사랑은 학부생 시절 <양자역학>을 수강하면서 산산조각이 났다. 끝없는 수학과 그 난이도에 나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어느 순간부터 강의 시간 내내 고개를 떨구었다. 그리고 ‘C만 받지 말자.’는 타협적인 목표를 세웠다. 당시 수강한 <양자역학>에 대한 기억과 상처는 내가 이론 물리학자의 꿈을 포기하는 계기가 되었고, 오랫동안 일종의 트라우마로 남았다.
시간이 흘러 트라우마는 잊히는 것 같았다. 감사하게도 나는 올해 신임 교수로 임용되었다. 하지만 기쁨은 1주일도 가지 못했다. 온갖 걱정이 닥치기 시작했다. ‘내가 교수가 될 자질이 충분할까?’‘학과 교수님들이 나를 좋아할까?’ 등등. 하지만 당시 가장 큰 불안은 그때의 그 <양자역학>을 내가 강의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정말이지, 내가 겪은 좌절을 대물림하고 싶지 않아서 나는 임용일 이전까지 여러 책과 인터넷 강의를 들으며 열심히 강의를 준비하였다.
양자 세계의 가장 유명한 사례가 ‘슈뢰딩거의 고양이’라는 사고실험이다. 밀폐된 상자 속에는 방사성 물질이 붕괴할 시에 독가스가 배출되는 장치가 있는데, 그 안에 갇힌 고양이는 죽거나 살 수 있다. 방사성 물질의 붕괴가 다만 확률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이다. 내가 산 복권의 당첨은 긁어보아야 알 수 있는 것처럼, 고양이의 생사는 상자를 열어보아야만 한다. 그 이전까지 고양이는 죽은 상태와 살아 있는 상태가 공존하는 중첩(superposition) 상태에 있을 뿐이다.
내 생각은 이렇다. 긁지 않은 복권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처럼, 상자를 열기 전까지 고양이가 ‘죽은 동시에 살아있는 상태’라는 신비로운 현상은 의미가 없다. 중요한 것은 현실이다. 내가 사랑하는 고양이가 안타깝게도 죽었는지, 아니면 다행히도 살아남았는지가 중요하다. 그러니 상자를 열기 전에 미리 애도할 필요도, 또 안도할 필요도 없다. 우선 내 손으로 직접 상자를 열 용기가 필요할 뿐이다.
임용 이후에 벌써 여러 학생과 상담했다. 저마다의 고민과 걱정을 듣고 있으니 자연스레 내 인생을 되돌아보게 된다. 대학생 시절 나는 내 미래와 인생에 대한 걱정으로 질식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불안은 불안으로만 이어질 뿐, 대부분은 큰 의미가 없었다. 돌이켜 보면 나는 앞날을 맞이할 용기도 없었으면서, 마냥 불안했다. 그렇다고 불안을 이겨내기 위해 그리 성실한 인생을 살지도 않았다. 다만 나는 조바심만 있던 게으른 학생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학생에게 이런 말을 많이 한다. 불안하기 이전에 현실을 직시할 용기를 우선 가지라고.
한 학생과 상담하다가 무심코 나는 <양자역학> 강의의 부담감과 신임 교원으로서 적응에 대한 불안을 솔직히 말했던 적이 있다. 그 학생이 깜짝 놀라면서 이렇게 말했다. “사람 사는 것이 다 똑같군요.” 그렇다. 학생이든 교수든, 우리 모두에게는 불확실한 현실 상자가 있다. 하지만 잊지 말자. 상자를 열기 전까지의 불안은 현실이 아닌 상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마지막으로 내가 열어본 상자의 결과는 이러하다. <양자역학> 강의를 준비하다 보니, 비로소 나는 대학생 시절에 이해하지 못했던 많은 부분이 그리 어렵지 않으며, 다만 너무 겁을 먹어 내가 도망친 결과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렇게 나는 오랜 트라우마를 극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강의를 듣는 학생들의 흔들리는 눈동자는 내 불안과 일치했다. 어쩌겠는가? 나는 교수로서, 학생은 학생으로서 저마다의 역할에 최선을 다할 뿐이다. 그뿐이다. 다만 학생들이 용기를 갖고 성적의 상자를 열어보길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