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수기

by 원빌리


첫째가 5개월에 접어들 무렵, 집 안에 쌓여 가는 생수 페트병들을 보며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연년생으로 둘째까지 키울 예정이었기에 생수를 계속 배달시켜 먹기에는 부담이 컸습니다. 결국 급히 정수기 렌탈을 알아보게 되었죠.

정수기 렌탈비는 한 달 2만 7천 원. 솔직히 페트병 생수를 사 먹는 것보다 비싸게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정수기 전용 신용카드로 결제하면 1만 7천 원으로 할인된다는 설명에, 별다른 의심 없이 계약을 해버렸습니다. 더 오래 쓰면 더 저렴해진다는 조건에 끌려 무려 60개월 계약을 맺었습니다.


당시엔 아이 키우느라 정신이 없어 깊게 따져보지 않았습니다. 눈앞의 편리함이 너무 크게 보였던 거죠.

문제는 그때부터 ‘카드 실적 채우기’라는 새로운 숙제가 생겼다는 점입니다. 처음에는 아이들 기저귀 구매가 많아 실적 채우기가 어렵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이 점점 자라고 기저귀 사용량이 줄자 카드 사용이 예전만큼 늘지 않았습니다. 어린이집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집에서 보내는 시간도 줄었고, 정수기 사용량도 자연스럽게 감소했습니다.


카드를 억지로 쓰기 위해 필요하지 않은 소비까지 하게 되는 순간이 오자, 이게 정말 절약인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럴 바엔 차라리 생수를 사 먹는 편이 더 나았겠다 싶었습니다.

또 하나 예상 못 한 지출은 ‘이전 설치 비용’이었습니다. 이사할 때마다 3만 원의 이전 비용을 내야 했는데, 인터넷은 무료로 이전 설치를 해주는데 정수기만 돈을 내야 한다는 점이 못내 억울했습니다. 그 돈이 크지 않더라도, 반복될수록 결국은 생활비에 적지 않은 부담이 됩니다.

렌탈 구조는 늘 같습니다. 계약 기간이 길수록 월 사용료는 싸지지만, 그만큼 ‘노예 계약’에 가까워집니다. 카드 실적을 채우지 않으면 할인도 사라지고, 계약을 중도 해지하려면 위약금이 100만 원에 달했습니다. 명의 이전도 불가능하다 했습니다. 처음에는 작은 할인으로 시작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오히려 더 큰 족쇄가 되어버립니다.


결국 손해 보는 장사는 없다는 말을 실감했습니다.

그래서 선택한 방법은 단 하나. “어차피 계약했으니 최대한 쓰자.” 라면을 끓일 때도, 쌀을 씻을 때도, 물을 마실 때도 무조건 정수기를 사용했습니다. 귀찮게 물병을 씻어 쓰면서까지 정수기를 쓰다 보니 물 섭취량은 늘었고, 요리에도 자주 활용되었지만 설거지가 하나 늘어난 건 작은 불편이었습니다.

그렇게 억지로 채워온 60개월. 드디어 계약이 끝나던 날, 미리 눈여겨봤던 간이 정수기를 구입했습니다. 본체는 약 3만 원, 필터는 한 개에 1만 5천 원으로 3개월 사용이 가능했습니다. 의무 사용 기간도, 실적 카드도 필요 없는 자유로운 정수기였습니다.


내 집에 내 물건이 있다는 단순한 사실이 생각보다 큰 자유를 주었습니다. 정기적으로 물병을 세척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지만 그 정도는 감수할 수 있었습니다.

정수기 경험 이후, 저희 집은 OTT 구독, 렌탈 가전, 정기 배송 서비스 같은 것들을 전혀 사용하지 않습니다. 편리함이 분명 있지만, 그것은 편리함을 가장한 과소비일 수 있다는 걸 몸으로 배웠기 때문입니다. 편리함은 달콤하지만, 그 달콤함 뒤에는 늘 ‘놓치고 있는 진짜 비용’이 숨어 있음을 이제는 압니다.


장난감 단기 대여처럼 ‘정액제가 아닌, 필요할 때만 쓰고 반납할 수 있는 구조’라면 괜찮습니다. 하지만 겉보기에 소유처럼 보이는 장기 렌탈은 결국 해지도 쉽지 않고, 중간 이익은 모두 회사 몫이 됩니다.



결국 세상에 손해 보고 빌려주는 회사는 없습니다. 그렇기에 저만의 원칙을 세웠습니다.

1. 12개월 이상 장기 렌탈은 피할 것
2. 정액제보다는 비싸더라도 필요한 순간에 제값을 지불할 것
3. 불편하더라도 대체제가 있다면 그것을 선택할 것


편리함을 선택할 수도 있지만, 그 대가가 과연 합리적인지 늘 따져 보는 습관. 그것이 손해 없는 삶의 시작이라는 걸 저는 정수기를 통해 배웠습니다.




<<한 푼을 절약하는 것은 한 푼을 버는 것과 같다. - 벤자민 프랭클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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