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졸로 파이어족 되기

성실함이 곧 자산

by 원빌리

나는 공부를 정말 못했다. 초등학교 때는 꼴찌도 해봤고, 중학교도 밑에서 2~3등을 깔아줬다. 중 3쯤 되니 현실파악이 되면서 위기감이 느껴졌다.



"이러다가 백수로 늙어 죽는 거 아닌가?" 싶었다. 내가 중학생 때만 해도 아직은 신문으로 정보를 더 많이 볼 때였는데, 엄마가 신문에서 부산 모 실업계 고등학교에서 대기업 채용을 매년 분기마다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런 고등학교가 있는지도 몰랐는데 선택지도 없었다. 다만 내 성적으로는 그 고등학교도 간당간당해서 중3부터는 국영수는 포기하고 암기과목 위주로 성적을 올렸다. 가산점을 받기 위해서 그림도 열심히 그렸다. 장려상을 받으면 1점을 줬고, 봉사활동을 하면 또 1점을 줬다. 거의 턱걸이 느낌으로 겨우 성적을 맞춰서 입학할 수 있었다.


다행히 나와 같은 사람이 모이다 보니 고등학교 내내 전교 5등 안에 들었다. 막상 그 고등학교를 가니 다른 기회의 길도 많았는데, 교육청과 연계된 해외 취업이라던지, 대기업도 두세 곳 원서를 넣을 수 있었다. 막연하게 해외 취업이 하고 싶어서 당시 최저 시급도 못 받고 알바를 해서 영어 학원도 내 힘으로 다녔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내가 빠른 연생이라는 이유로 취업비자가 안 나와서 막바지에 못 가게 됐다. 그날 세상 떠나가라 엉엉 울었는데 담당 교사가 빠른 년생은 뽑지 말라고 한 문구를 미쳐 못 본 것이 원인이었다.


이제 선택권이 없어져서 대기업 두 곳에 원서를 넣고 두 곳 다 붙었다. 대기업은 전부 윗지방에 위치해서 어쩔 수 없이 집과 거리가 4시간 거리로 취업을 가게 됐다. 막상 가니 정말 너무 힘들고 학교가 아닌 분위기에 적응을 할 수 없어서 1년 넘게 방황했더랬다. 엄마도 아빠도 기댈 수 있는 분들이 아니었고, 내가 힘들다고 하니 본인이 더 힘들다며 오히려 나를 몰아세웠다. 그때 내 나이 고작 19살이었다. 졸업 전에 취업을 나가서 미성년자였다. 이때부터 약간 마음속에 내 부모와 나의 거리가 생겼다고 느꼈다.


여기서 그만두고 돌아간다면 어차피 받아 줄 집이 없다는 생각에 그냥 악착같이 버텼다. 설비 골목 깊숙한 곳에 나를 밀어 넣고 갈구던 선임 언니. 얼마나 잘되나 보자며 이를 바득바득 갈고 버텼다. 그렇게 흘러 흘러 나는 다른 계열사로 이직했고, 지금은 내가 그 언니보다 직급이 높다. 덮어 놓고 저축하다 보니 어느새 나는 집 한 채와 세단 한대를 보유한 어엿한 내 가정의 구성원이 됐다. 부모와 먼 거리에 떨어져 나와 강제로 독립했지만, 결국 그게 나의 새로운 가정을 꾸리는 데에 도움이 됐다.



내가 다른 건 못해도 절대 지각은 하지 않을 것. 그리고 몸이 아프지 않은 한 일을 할 것.


그렇게 나는 이제 파이어족을 목표로 유동자산 10억 모으기에 접어들었다. 매년 6천만 원 정도 저축 중인데, 애들이 커감에 따라서 소비도 늘어나서 요즘 좀 걱정이다. 적어도 나는 자녀에게 학업에 전념 하라며 전월셋방정도는 바로 구해 줄 수 있는 그런 부모가 되길 바라며 애들 명의로 주식 투자 중이며 이것도 꽤나 수익률이 좋다. 개인연금 년 600만 원을 채워서 연말정산 공제도 받고 연금도 모으고 있다. 이번 달부터는 ISA 계좌를 만들어 연 2000만 원을 모아 볼 계획이다. 투자에 관심이 생기니 자연스레 파이어족도 50세 전 후 로 가능할 것 같다.


- 하와이 신행에서 봤던 거북이. 만지면 벌금이 100만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