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모는 올해 아흔 둘, 매우 고령이시다. 불과 일, 이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카랑카랑한 목소리며 반짝반짝하는 눈동자 등이 연세에 비해 건강해 보이셔서 나는 이모를 뵙고 돌아서 올 때마다 마음이 가벼웠었다. 그런데 세월에 장사 없다는 말처럼 요사이 부쩍 쇠약해지신 이모를 보면 저으기 걱정이 많아지고 속상한 마음에 뒤돌아서서 눈물을 참기 힘들어질 때가 있다. 그렇게 건강하셨던 분이 목소리에 힘이 하나도 없어지시고 걷는 것조차 힘들어서 주위 가구나 벽들을 짚고 어렵사리 걸으시는 것을 보면 마음이 아려온다.
이모는 이제 내게 남은 유일한 어른이시다. 내 친어머니와 아버지는 벌써 오래전에 돌아가셨고 시어머님과 시아버님도 돌아가신지가 꽤 되었다. 부모님들이 두분 다 이북에서 내려와서 남한에 정착하셨고 우리 아버지는 원래가 외아들이셔서 내게는 삼촌이나 고모가 처음부터 있을 리가 없었다. 엄마에게만 여동생이 둘 있어서 내게 이모라는 호칭으로 부를 수 있는 어른이 두 분 계셨던 셈이다. 친척어른이 별로 없었던 우리 형제들에게 이 두 분 이모들마저 안 계셨다면 우리들은 마치도 천애고아의 심정 비슷한 것을 느끼면서 매우 외로운 기분을 절절히 느꼈을지도 모른다. 명절 때마다 고요한 절간 같은 우리집과는 달리 일가친척들이 찾아와서 북적북적한 친구네 집을 보면 알 수 없이 외로워졌던 기억이 떠오른다. 우리 엄마하고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아직 결혼 전인 이모들에게 자식들이 있을리 만무했고 사촌형제들을 보게 된 것도 아주 한참 후의 일이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우리들에겐 이모들이 각별하다. 이런 심정은 역으로 이모들께서도 마찬가지였으리라 생각한다. 그런데 작은 이모가 큰 이모보다 먼저 작년에 돌아가셨기 때문에 이제는 큰 이모만이 살아계시는데 그 이모마저 눈에 띄게 쇠약해지신 모습으로 힘없는 목소리로 말씀하시는 것을 볼 때면 이별의 시간이 그리 멀지 않겠구나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나 또한 이제는 당연히 ‘할머니’라는 호칭이 어색하지 않은 나이가 되었으므로 “나이듦”의 안타까움과 슬픔, 초조함의 감정에 결코 강 건너 불을 보는 듯한 심경일 수 없음으로 십여 년 전과는 다른 동변상련의 엷은 고통을 느끼고 있다. 생노병사, 인생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는 인간의 삶의 과정이 더욱 크게 다가오는 것이다. 여러가지로 말할 필요조차 없는 노년의 허무함은 막연히 머리 속의 상상으로 머물 때와는 확연히 다르다. 그것은 분명한 실체로 눈앞에 똑똑하게 드러나게 된다. 늙음에 필수적으로 따라오는 여러가지 질병과 약함, 장애와 더불어 힘겹게 살아내야 하는 날들이 사람에 따라서는 수 년간, 혹은 수십 년간이 될지 모른다.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는 생활 부분의 여러 제약들이 신체적 불편함과 고통을 가중시키고 정신적인 괴로움과 불행하고 허무한 마음 또한 비례해서 커진다.
우리 이모들은 ‘한미모’ 하시는 분들로서 옛날 사람들치고는 꽤 돋보이는 미모를 자랑했는데 약간 샤프하고 날카로운 인상의 작은 이모보다는 부드럽고 따뜻해 보이면서도 크고 둥근 눈의 큰 이모가 특히 눈에 띄는 편이어서 온 동네 총각들의 마음을 훔치고서도 끝내 태연자약하게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말끄럼한 모습의 이모를 어린 나도 어렴풋이 눈치챌 수 있을 정도였다. 어린 내게 ‘아름다움’의 표상으로 생각될 만큼 이모의 미모는 특출했다. 거기다가 이모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는 다른 사람이 거의 반박의 논리를 세우기 힘들 만큼 완벽한 논리로 이루어져 있어서 나도 나이가 먹을 만큼 먹은 후에도 이모가 뭐라고 하시면 그대로 수긍하고 말 뿐이었다. 어디 하나 틀린 말씀이 없기 때문이다. 말 잘하는 사람들은 겉으로만 완벽할 뿐 뒤로 돌아서면 허술한 구석이 있거나 말과는 달리 이율배반적인 모습도 많이 노출시키곤 한다. 그러나 우리 이모는 말씀도 조리 있으셨을 뿐 아니라 행동도 빈틈이 없으셔서 그야말로 카리스마 짱짱한 어른이셨다. 그랬던 분이 오늘에 이르러 이렇게 허약해 지시다니 !! 부정할 수 없는 현실에 그저 목구멍이 부어오르는 듯한 통증만 느껴진다.
두 달 전에 태어난 나의 둘째 손녀는 자주 보지는 못 하지만 사진으로 보면 보일락말락 작고 희미하게 피어나는 여린 꽃잎을 보는 듯 아슬아슬한 심정이 되곤 한다. 몇 년 만에 다시 작은 생명을 품에 안아볼 때마다 긴장해서 조심스러워진다. 머리를 가누지도 못하는 어린 것이 울음을 울 때조차 소리도 제대로 힘차게 내지 못하고 갸날픈 울음소리를 낼 때면 가슴이 두근거려지며 어떻게든 그 울음을 그치게 하려고 분주하게 뭔가 행동하게 된다. 모든 생명의 어린 시절은 이렇게 연약한데 생명이 꺼지기 전 그 마지막 시간들도 말라서 바스락거리는 연약한 잎들처럼 힘이 없다.
무슨 말을 덧붙일 수 있으랴. 묵직하게 가슴을 누르는 형언하기 힘든 슬픔이 둔중하게 다가온다.
내 나이가 나이인지라 어쩌다가 심심치않게 가까웠거나 그냥 알고만 지냈던 사람들의 부고 소식이 들려올 때가 있다. 친소에 따라 멀리서 안타깝게 그 소식을 들으며 한숨 지을 때도 있지만 어떤 때는 몸소 병원을 찾아 정중하게 문상을 드릴 때도 있다. 그 누구의 죽음에도 어김없이 느껴지는 허무감과 무력감과 슬픔은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어쩔 수 없는 통과의례일지도 모른다. 그런 순간이면 고등학교 학생일 때 2년 가까이 나를 심각하게 괴롭혔던 허무주의가 다시금 그 날카로운 사슬로 나를 옭아매는 듯한 기분에 취해서 한동안 휘청이게 된다. 인간이란 뭐 크게 잘날 것도 없는 비루하고 연약한 동물일 뿐이란 자각이 나를 놓아주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의 죽음 앞에서 피할 수 없이 몰려드는 회한 비슷한 것이 무슨 까닭인지를 몰라서 나 자신도 어안이 벙벙하다. 아등바등 살아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어차피 이렇게 죽고 나면 허무한 것을. 아무리 잘난 사람이라도 못난 사람이라도, 아무리 귀하고 부자였던 사람이라도 가난하고 비천했던 사람이라도 죽음에는 차이가 없다. 그 무시무시한 사실 앞에 무력하기 짝이 없는 인간이란 얼마나 우스운가, 나는 언젠가 다가올 나의 죽음을 어떻게 맞이할지 그냥 먹먹해진다.
인간의 수명이란 고작해야 100년 남짓이고 이 백년이라는 시간은 상대적이므로 각 주체에 따라서 짧게도 길게도 느껴진다. 어떤 사람에게는 길고도 고통스러운 세월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눈 깜짝할 순간에 지나버린 아쉽고 짧은 시간일지도 모른다. 별것 아닌 듯한 인생이라도 책이나 영화로도 다 풀어내지 못할 무궁무진하고 깊고 깊은 사연이 숨겨져 있고 그 인생을 살아낸 각자에게는 고유하고 심각하고 진지한 내용들로 가득 차 있을 것이다. 나는 우리 인류에게 빛을 비춰준 위대한 영웅들의 이야기에는 사실 관심이 없다. 훌륭하고 멋있고 아름다운 이야기는 어찌 보면 뻔한 것이기도 하고 그 이야기들은 사실은 예외적인 것들이므로 바닷가의 모래알 만큼이나 셀 수 없는 숱하고 평범한 인생의 진실들과는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나는 모든 사람들의 인생을 아름답다고 느낀다. 그러면서도 이 감정에는 허무가 짙게 깃드는 것을 나로서도 어쩔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