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노란 들국화

by olive

제주도 동쪽 바다의 섭지코지를 한 바퀴 돌아나오면 땅위에 낮게 피어있는 노란 들국화들로 눈도 즐겁고 코도 즐거워진다. 언덕을 오를 때면 눈앞에는 보이지 않는 들국화 향기가 코에 미리 전해진다. 이윽고 언덕을 올라 발을 멈추고 둘러보면 환하게 핀 노란 들국화 무리가 천지에 가득한 채 인사를 하듯 웃는 모습이다. 키작은 들국화들이 땅에 지천으로 많이 피어서 진한 향기를 뿜어대는 통에 생각지도 못했던 선물을 받기라도 한듯 행복해진다. 국화향기는 누구나 느껴봤겠지만 아주 청량하고 상쾌하고 그윽하면서도 기분 좋은 냄새다. 어떤 사람들은 장미꽃 향기를 좋아한다지만 나에겐 뭐니뭐니해도 국화꽃 향기가 으뜸이다. 익숙하고 늘 곁에 있었던 듯 평범한 것 같아도 바람에 실려 코에 느껴지면 붕—하고 기분이 솟아오르고 마음이 떨려오기까지 하면서 왠지 고마워진다. 기대하지도 않았는데 나를 위해서 누군가 귀한 선물을 마련해서 전해주는 듯 행복한 느낌이다. 들판에 가득 핀 들국화들이 그렇게 정겹고 사랑스러울 수가 없다. 키도 아주 작고 꽃송이도 몹시 작아서 무리지어 피지 않으면 자칫 눈에 띄지도 않을 평범한 꽃이지만 그런 특성을 알고 보완하기라도 하듯 들국화는 보통 들판 가득 피어서 진한 향기로 사람들에게 손짓하는 모양새다. 그 모습이 정말로 귀하고 아름답고 특별해서 자연의 섭리를 몸소 전하듯 내게 겸손을 요구한다. 나는 그 향기를 맡으며 노오란 그 작은 송이들을 볼 때마다 저절로 겸허해진다. 그들은 그 누구에게도 그 무엇에게도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때가 되면 자기 본모습 그대로 세상에 나타나서 사람들에게, 혹은 동물들에게 즐거움을 주고 땅을 온통 뒤덮으며 한동안 피어있다가 또 때가 되면 조용히 사라진다. 살아있는 동안 들판에, 바위 틈에, 나무 밑에, 길옆에 가득 피어서 눈부신 노란 색의 향연을 펼치다가 눈이 오면 그밑에 묻히기도 하다가 아무도 신경쓰지 않을 때 어느새 사라져간다.



나는 그런 생명들에 동화되고 일체감을 느끼면서 자연의 섭리를 깨우친다. 각 생명들마다 주어진 수명과 사명을 다하다가 언젠가 지구상에서 사라지는 것, 그것이 우주의 섭리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런 점에서 작디작은 들국화도, 작은 참새들도 또 그 보다 더 작은 개미들도 사람과 무엇이 다른가. 인간이라고해서 나는 뭔가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옛날엔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는 말에 솔깃해서 인간하고 동물이나 식물같은 미물하고의 비교는 말도 안된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나이를 꽤 많이 먹어갈수록 그런 구분이 얼마나 희극인지를 깨닫게 되었다. 신이라는 존재가 있다면 그외의 모든 존재는 태생적으로 시간적으로 물리적으로 한계가 지워진 존재, 즉 신 앞에서는 모두가 미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얼마나 허무함을 느꼈었는지 얼마나 스스로가 하찮게 느껴졌었는지 그때를 생각하면 비참함 비슷한 슬픔이 온몸을 휘감아서 하염없이 울고싶어지곤 했다.


그런데 그런 태생적 한계 속에서 태어나고 자라고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다가 덧없이 스러져가는 인생을 쿨하게 받아들일 때 삶은 비로소 우리에게 감춰졌던 진실을 내보여주는 것 같다. 천년만년 살 것처럼 덤벼들고 무리하면 반드시 그 댓가를 치른다는 것을 깨닫고 허용된 시간 만큼 주어진 운명에 따라 겸허히 살아가면 이 짧은 인생에도 때때로 밝은 햇살이 쏟아지는 파란 하늘을 만나게 되고 계곡물에 발 담그고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보는 망중한의 시간을 즐기게 되는 순간이 온다. 그렇지 않고 욕심껏 살다 보면 뜻하지 않은 낭패앞에서 한순간 삶의 모든 의미가 사라지는 대참사를 겪게 되는 것이 아닐까.


한겨울의 서릿발 같은 추위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들판 가득 환하게 피어서 몽환적인 향기를 고요하게 내뿜고 있는 노란 들국화가 어쩐지 내 다정했던 친구의 모습과 같아서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며 이생각 저생각 하다가 미소로 화답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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