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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live Mar 11. 2022

불리아그메니

아테네에서 수니온 곶까지 이어진 해변산책길

                             

                                                                                                                                                  

 바다는 언제나 경이롭다. 인간을 겸허하게 만들어준다. 특히 그리스의 망망대해 앞에 서면 어쩔 수 없이 그런 느낌이 든다. 작렬하는 태양빛 아래 짙푸른 물결로 출렁이는 에게 해는 언제나 태초의 어느 시점인가로 나를 이끈다. 자연의 무상함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인간이라는 존재에게 거대하고 광막한 바다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바다는 그래서 더욱 경외의 대상이 된다. 연인 앞에서 수줍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얼굴만 붉히는 어린 처녀처럼 나는 언제나 바다 앞에서 뜨거운 열정만 품은 채 허둥대고 만다.     

 

  이곳 아테네 근교 불리아그메니의 바다는 평화롭다. 해안가 어느 곳도 사람들로 북적대지 않는다. 남녀노소 누구나 가벼운 옷차림으로 비치 타올을 들고 와서 물속에 몸을 담갔다가 조용히 떠나가곤 한다. 일행이라야 둘, 셋이 고작이고 혼자서 수영하러 와서 익숙한 방법으로 수영을 즐기다가 짐 싸들고 다시 돌아가는 사람들도 수없이 많다. 바다에서 물놀이하는 것이 그리스 사람들에게는 생활의 일부이고 더욱이 여름철에는 삼시 세끼 밥을 먹는 것만큼 빼놓을 수 없는 일상적 행위인 듯하다. 그들이 그렇게 바닷가에서 놀다가 돌아가는 모습을 지켜보면 구경하는 나조차도 무심해지고 평화스러워 진다. 그들의 모습에선 특별하거나 과장스러운 몸짓, 사치스러움, 요란스러움이 없다. 입고 있는 수영복도, 깔고 앉는 비치 타올도, 신고 다니는 신발, 입은 옷, 선글라스 등 어느 것 하나도 특별하지 않고 소박하다. 여기에선 돗자리나 비치파라솔도 돈을 주고 빌리지 않는다(물론, 고급호텔이나 레스토랑에 딸린 private beach는 예외지만). 해안가 어느 곳에서나 누런 야자수 잎사귀가 바람에 펄럭이는 파라솔이 드문드문 서있고 아무나 와서 그 밑에 자리를 깔면 그것으로 끝이다. 어디선가 누군가 지켜보고 있다가 득달같이 달려와서 돈을 내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한국에서는 이런 일로 얼마나 마음이 많이 상하고 가격을 갖고 옥신각신하며 승강이를 해야 했던가) 굳이 이해를 해 보자면 어디에나 사방에 널려있는 비치에서 돗자리나 비치파라솔로 상행위를 하는 것이 가당치 않는 일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불리아그메니는 아테네에서 차로 1시간, 지하철로는 40분 정도면 닿게 되는 아테네 근교의 도시이다. 아테네 도심의 거리들은 위기를 맞은 경제 때문에 을씨년스럽고 사람들 통행도 드물고 여기저기 문을 닫은 가게들로 인해 폐허 직전의 도시로 보이기까지 한다. 내가 아테네에서 묵었던 호텔은 오모니아 지하철역 근처에 있었는데 거기서 길만 건너면 관광객들의 필수 코스인 국립고고학 박물관이 나온다. 아테네 시내에서는 제일 번화가라고 할 수 있는 곳이었는데도 차들이 많이 다니는 대로에서 한 블록만 안으로 들어가면 굳게 닫힌 문과 깨진 유리창(broken window)이 심심찮게 보여서 낮 동안에도 걸어 다니기가 불안하고 이미 중국인들이 점령해버린 듯한 골목이 수십 미터씩 이어지기도 해서 좀 처참한 기분이 드는 반면에 이 동네 불리아그메니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여기서는 집들도 모두 깨끗하고 정원들 관리도 잘 돼있고 지나다니는 차들도 고급이고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들은 사람들로 북적인다. 한 마디로 물 좋은 동네라는 것을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아테네에서 유학한 적이 있는 우리가 아는 교수 한 분은 안식년을 그리스에서 보내게 된다면 아테네 시내가 아닌 이곳에서 살고 싶다고 기대를 가득 담은 눈빛으로 말한 적이 있다. 유학기간 동안 이 동네가 그렇게 마음에 들었나 보다. 내가 보기에도 이곳 사람들은 차림새부터가 다르고 표정에도 훨씬 여유로움이 느껴진다. 이방인의 눈에도 빈부의 차이가 이처럼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두 도시를 보는 것은 굳이 하고 싶은 경험은 아니었다.     


  불리아그메니에서는 비치를 따라 조성된 산책길이 끝없이 이어진다. 그 길을 걷다보면 어딘가에서 풍겨오는 진한 꽃향기를 맡을 수 있다. 사람의 손길이 닿은 듯 닿지 않은 듯 여기저기서 자라고 있는 허브 종류와 협죽도나 부겐빌레아 같은 꽃나무에서 바람을 타고 날아오는 것이리라. 산책길은 해안가를 따라 끊어졌다가 이어졌다가 하면서 끝없이 나있는데 나는 한 시간 이상은 걸을 수 없는 신체적 약점 때문에 그 길의 극히 일부분만 걷고 만 것이 아쉽기만 하다. 해변 산책길은 포세이돈 신전이 있는 그 유명한 수니온 곶까지 이어져 있다. 튼튼한 두 다리만 있었다면 걸어서 거기까지 가보는 것도 환상적이었을 것이다.     


 그 산책길 옆에는 대부분 해안가 레스토랑들이 자리하고 있다. 관광객들인지 현지인들인지 모르지만 점심때 이후부터 오후를 지나 밤늦게까지 사람들은 그런 레스토랑이나 카페에 앉아서 식사를 하거나 차를 마시면서 지나다니는 사람들에게 부지런히 눈길을 주곤 한다. 날씨가 항상 따뜻한 지역이니만큼 레스토랑의 테이블과 의자들은 야외에 더욱 많이 나와 있고 사람들은 실내는 제쳐둔 채 거의 대부분 야외에 놓여 진 테이블에서 식사를 한다. 해가 지고 나면 그리스의 저녁은 언제 그런 더위가 있었냐는 듯이 완전히 얼굴을 바꿔 시원해지기 때문에 그리스 사람들의 저녁 식사는 삼시 세끼 중 가장 중요한 일과를 이룬다. 한번 자리를 잡으면 그리스 사람들의 모임은 한 두 시간 안에 끝나지 않는다. 보통 세 시간쯤은 끌어야 그들로서는 만족한 저녁시간이 되는 것 같았다. 우리는 두 어 번 그리스인들에게 저녁 초대를 받거나 beach party에 참가한 적이 있는데 서 너시간 이상은 족히 걸리는 모임에서 부드럽게 빠져나갈 타이밍을 잡기 위해 노심초사하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들의 마지막 순서에는 언제나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시간이 반드시 들어가는데 지독한 몸치인 남편과 나로서는 제일 당황스러운 시간이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 같이 어깨동무를 한 채 세 발작을 앞으로 갔다가 한 발작 되돌아오고 나서 다리 하나를 앞으로 내미는 간단한 스텝을 내가 익혔을 정도이니 그들의 흥겨운 파티가 사람의 기분을 얼마나 느슨하게 풀어주고 행복에 젖게 만드는 것인지 그들과 조금만 친해지면 알게된다. 그리스인들은 역시 디오니소스 신의 후예들답게 지독하게 낙천적이다. 어떻게 하면 자신들의 삶을 풍요롭고 아름답고 행복하게 가꿔 나갈 수 있는지를 생래적으로 알고 있는 것 같다. 그들의 행복에는 그리 많은 물질적 풍요가 필요한 것 같지는 않다는 인상을 준다. 자족할 줄 알고 자유를 무엇보다 사랑하고 열정이 넘쳐나는 그들을 보며 신화와 전설 속에서 삶을 배운 그들의 정신적 토대가 몹시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 <그리스인 조르바> 삽입곡이며 미키스 테오도라키스 작곡의 <조르바의 춤>을 들을 때면 나는 언제나 그때의 장면이 떠올라서 슬며시 미소 짓게 된다.     


 섬머 타임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7월 중순인 이때, 이곳의 일몰 시간은 유난히 늦어서 저녁 8시 40분경이라고 했다. 나는 이곳에서의 일몰을 한번 제대로 꼭 보고야 말겠다는 결심을 하고 호텔에서 쉬고 있다가 8시 20분경 해안가로 나가 일몰을 감상하기에 위치가 괜찮은 벤치위에 앉아서 해가 지기를 기다렸다. 바닷가에서 해가 지는 풍경은 왠지 모르게 가슴을 설레게 한다. 하루마다 한번 정확하게 되풀이되는 풍경이지만 그래도 그것은 사람의 가슴에 알 수 없는 흥분과 놀라움, 그리움, 쓸쓸함, 슬픔을 불어넣는 것 같다. 그날의 일몰도 역시나 불타오르는 강렬한 붉은 빛이 근처에 있는 구름에 번져가며 황홀한 광경을 연출했다. 인간들은 왜 이렇게 일출이나 일몰에 열광하는 것일까? 나도 그 이유를 잘 모른다. 그냥 남들이 그러니까 그런 것일까?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황홀한 일출과 일몰에는 가슴을 뛰게 하는 뭔가가 있다. 무언가의 시작이며 끝이라는 의미이기 때문일까? 장엄하고 엄숙하고 가슴 떨리는 일출과 일몰은 자기 자신을 뒤돌아보게 하는 하나의 의식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나는 기대했던 것을 보았다는 안도감으로 가슴이 후련해져서 해가 진 뒤에도 한참동안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수영을 즐기던 사람들 중에는 해가 진 뒤의 흐릿한 어둠 속에서도 그대로 물속에 있는 사람들, 뭍에 앉아서 노을을 감상하는 사람들, 아니면 그냥 그 자리에 앉아서 같이 온 일행들과 나직이 대화를 주고받는 사람들로 여전히 바닷가에는 수선스러움이 남아 있었다. 나는 바다에 완전한 어둠이 내려 더 이상 바다와 하늘을 구분할 수 없게 깜깜해 질 때까지 앉아 있다가 발길을 돌려 호텔 방으로 향했다. 그날은 점심을 너무 늦게 먹은 데다가 그것도 평소의 양을 초과해 너무 많이 먹은 탓으로 배가 더부룩해서 저녁을 거르고 뮈슬리와 우유로 때우려고 했던 터라 저녁을 먹기 위해 레스토랑으로 가지는 않고 곧장 호텔로 돌아가려고 발길을 돌렸는데 호텔로 가는 길 어귀에 위치한 조그만 교회에서 땡~ 땡~ 종소리가 들려오면서 가로등이 비추는 밤거리를 더욱 운치 있게 만들어 주었다. 여름날 밤의 짤막한 산책이 기분 좋았던 나는 호텔 방으로 들어가서 오랜만에 달콤한 잠을 잘 수 있었다.      


  그리스에서는 몇 번을 제외하고는 어디서나, 식당이나 호텔 등에서 불쾌한 경험을 한 적이 별로 없다. 그리스 사람들은 이방인들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을 당연한 의무로 여긴다. 제우스신의 명령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여행자나 이방인을 변장을 하고 나타난 신이라고까지 생각했기 때문에 그들에게 환대(hospitality)를 베풀지 않으면 자신들이 벌을 받게 되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꼭 그런 신들에 의한 명령이나 죄의식 때문이 아니더라도 그리스 사람들의 따뜻한 마음씨는 일년 내내 따뜻하고 온화한 기후와도 관련이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오딧세이>에서도 오딧세우스 일행은 이타카로 돌아가기까지 10년 동안이나 방랑과 모험을 하지만 그들은 가는 곳마다 주민들과 그곳의 왕들에게 환대를 받는다. 이처럼 신화에도 나타난 그리스인들의 환대의 전통은 오늘날까지도 수천 년 동안 이어져 내려와 그리스의 여러 가지 매력에 더하여 더욱 따뜻하고 괜찮은 나라라는 인상을 주는 것 같다. 눈에는 보이지 않는 정신적 바탕이 이 세상 어느 나라 사람보다도 튼튼하고 건강하고 깊은 사람들, 그것이 그리스인들에 대한 나의 느낌의 총체이다. .          

 (2019.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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