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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live Mar 07. 2022

에어푸르트

튀링엔주의 주도, 동독의 옛 영화를 간직한 도시

 이 도시는 언제나 안개에 싸여있는 듯하다. 어제 밤에도 짙은 안개가 도시를 뒤덮어 낮에 보았던 마리언 대성당이 안개 속에서 뾰족한 첨탑 부분만 남기고 아랫부분은 사라진 듯 뿌옇게 떠있는 모습이었다. 그것이 매우 환상적이고 몽환적 분위기를 자아내어 엽서의 한 장면, 그림책의 한 장면을 연상케 하더니 오늘 아침도 10시가 넘어가는 지금 이 시간에도 언제쯤 안개가 걷힐 것인지 도무지 감이 안 올 정도로 도시 전체가 흐릿하게 보인다. 뿌연 안개 속에서 호텔 창문으로 보이는 건너편 레스토랑의 지붕이 습기에 젖어서 짙은 벽돌색으로 몽롱하게 빛나고 있었고 그 뒤로 보이는 키 큰 나무들의 가지가 하늘로 뻗어있는 모습도 더욱 몽롱하게 보였다. 가지 끝 부분은 안개 속에서 사라져 실루엣만 드러나 있었다. 안개에 뒤덮인 도시는 촉촉한 느낌을 내면서 차가운 대기를 더욱 차갑게 만들고 있다. 10월 중순의 독일 날씨에 짙은 안개가 더해져 다가올 추운 겨울을 미리 예고하는 듯하다.          

 호텔 앞을 흐르는 폭이 좁고 얕은 작은 강가에서는 청둥오리와 갈색 오리들이 뒤섞여서 부지런히 먹이를 찾으며 물 위를 헤엄치고 있었다. 강이라고 부르기에는 한참 모자랄 정도로 폭도 좁고 얕아서 개천이라고 불러 마땅한 이 강물은 그래도 도시 곳곳을 휘감고 지나가기 때문에 골목길을 돌아가다 보면 또 앞쪽에서 나타나기도 하고 옆쪽에서 나타나기도 하면서 끊임없이 길고 길게 흘러서 어디론가로 흘러가고 있었다. 아무리 작은 강이라고 하더라도 물은 물인지라 곳곳에서 그 위에 걸쳐진 다리들을 볼 수 있는데 어떤 다리는 그냥 소박하게 기능적인 면에만 치우친 다리도 있지만 또 어떤 다리는 제법 눈에 담고 싶을 정도로 예쁜 것도 있었다.           

 내가 묵었던 호텔(Hotel am Kraemerbruecke)에서 바로 왼쪽 옆에 놓여진 다리는 아주 특별한 다리였다. 크레머다리(Kraemerbruecke)라는 이름의 이 다리는 이 도시에서 대화재가 일어나고 난 뒤 폐허가 된 도시에서 집을 잃은 사람들이 그 위에 집을 짓기 시작하여 3,4층의 건물들과 상점들로 가득 차서 다리의 모습을 알아 볼 수 없게 만들고 있기 때문에 건물 아랫부분의 다리 아래쪽의 기둥을 눈여겨보지 않으면 거기에 다리가 있었는지 전혀 알 수 없게 변해 있었다. 나 역시도 이 도시에 사는 지인이 얘기해 주어서 그것을 알아보았으니 말이다. 그런데 나중에 이 도시의 안내책자를 보니 그 다리에 대해서 보다 자세한 설명을 해 놓은 것으로 보아 이 도시를 대표하는 명물로 자리 잡은 듯 했다. 나는 거기에 머무는 4일 동안 수없이 이 다리 위를 오르락내리락 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호텔을 나와서 시내 중심부로 향하려면 그 다리 위로 올라가는 길이 제일 빨랐기 때문이다. 다리 끝 부분에 이층으로 지어진 레스토랑은 전형적인 독일 튀링엔 지방의 음식을 하는 곳이었고 길 쪽으로 삐죽 튀어나온 둥그런 모양의 이층 발코니는 언제나 내 호기심을 자극해서 그 길을 지날 때마다 자꾸 올려다보게 만들었다. 마치도 옛날 동화책의 마녀와 난장이들이 사는 집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떠나기 이틀 전 저녁에 그곳 지인들과 함께 드디어 그 레스토랑에 들어가 볼 수 있었는데 메뉴를 보며 고민하다가 항상 먹던 음식인 돼지고기 구이(Schweinebraten)를 골랐다.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은 역시 내 스타일이 아니었나 보다. 튀링엔 지방에 와서 튀링엔 음식은 먹지 않고 익숙한 것에 굴복하고 말다니, 나중에 생각해도 이런 내 결정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음식은 꽤 맛있었고 무엇보다 좋았던 것은 아늑하고 따스한 분위기 속에서 함께 여행 간 동료와 지인들과의 유쾌한 대화로 시간 가는 줄을 모를 만큼 들뜬 분위기 속에서 내일모레면 이곳을 떠난다는 아쉬움과 함께 그 시간이 더 오래 계속되었으면 하는 미련이 생길 정도였다는 점이다.

      

 그 다리 위에 지어져서 옛날 다리의 모습을 완전히 가리고 있는 3,4층 높이의 좁은 건물들과 작은 골목길은 이제는 관광객들을 위한 기념품을 파는 가게들로 꽉 메워져 있었다. 한 눈에 봐도 영락없는 관광객 차림의 수많은 사람들이 그 골목을 서성이며 가게 안의 물건들에 시선을 빼앗기곤 하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 골목 끝에는 작은 교회가 유난히도 뾰족하고 긴 첨탑을 자랑하고 있었는데 그 구도가 매우 보기 좋아서 나는 몇 번이나 그 골목을 카메라에 담았다. 골목에 있는 상점 중에서 유독 내 눈길을 끌었던 곳은 유리 공예품을 진열해 놓은 가게와 아이들 장난감과 그림책 등을 파는 가게였다. 마치도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 들게 하는 알록달록하고 환상적인 그림들과 앙증맞은 각종 장난감들이 나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냥 지나쳐 가기에는, 들어가서 무언가를 사지 않고 돌아서기에는 너무도 아쉬운 마음이 들게 만드는 가게였기 때문에 나는 그 앞에서 이것저것 구경을 하다가 같이 갔던 지인의 아이들 장난감을 챙겨주어야겠다는 핑계를 생각해내곤 발길을 안으로 들이고 말았다. 독일의 장난감 가격도 만만치는 않았기 때문에 한참을 망설인 끝에 나는 크리스마스 장식을 겸할 수 있는 손으로 깎아 만든 나무로 된 장난감 두 개를 골라서 드디어 목적 달성의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러면서 ‘나라는 사람은 아직도 Kidult 인가’ 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 다리 위를 지나 골목길을 빠져 나가면 작은 광장이 나온다. 여느 유럽의 도시들이 다 그렇듯 여러 개의 카페들이 그 광장을 둘러싸고 영업을 하고 있었는데  바깥으로 테이블과 의자들을 내놓아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유혹했고 그 길을 지날 때마다 어느 날인가엔 그 카페 중 하나에 꼭 앉아봐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카페에 들어갈 것인가를 정하지 못해 마음이 계속 흔들리고 있었다. 드디어 이 도시로 들어온 지  셋째 날에 가장 코너에 있는 카페에 들어가서 카푸치노를 시켜 마실 수 있었다. 바로 옆 테이블에는 갓 스물이 되었을까 싶은 앳된 아가씨 둘이 앉아서 끝없는 수다와 함께 브런치 메뉴로 보이는 음식을 아주 맛있게 먹고 있던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 그저 바라보기만 해도 유쾌해지고 빙그레 웃음이 지어지는 장면이었다. 젊음은 그처럼 찬란한 것이다. 지금 그 카푸치노의 맛을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카페에 앉아서 바깥을 내다보며 다리도 쉬며 천년 이상의 역사를 자랑하는 오래된 도시의 한 가운데에서 한가한 기분에 빠져들었던 시간은 매우 행복했었다.           

 에어푸르트에서 먹은 음식 중에서 빼놓으면 서러울 것이 바로 예거쉬니첼(Jaegerschnitzel)이다, 대성당을 구경하고 나온 터라 다리도 아프고 배가 고팠던 우리는 대성당 아래에 있는 돔광장(Domplatz)에서 식당을 찾아 두리번거리다가 레스토랑의 외관도 깔끔하고 예쁘고 제법 규모도 있어 보이는 식당을 발견하고 왠지 괜찮을 것 같아서 고민 없이 들어갔다. 나는 어디 여행을 가도 특별히 맛집을 미리 검색해서 찾아다니는 사람은 아니다. 겉으로 보이는 식당 분위기에서 대충 예상을 하고 들어가곤 하는데 어떨 때는 지독한 실패를 할 때도 있긴 하지만 확률적으로는 큰 차이가 없다는 결론이다. 이 식당은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고 들어갔던 데 비해서는 아주 대성공이었다, 일단 실내에 들어가니 생각보다 많은 손님들이 이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휙 둘러본 그들의 표정은 이미 맛있는 음식에 대한 강한 기대로 설레고 있는 듯 했고 먼저 나온 음식을 먹고 있는 사람들의 얼굴에도 만족스러운 빛이 역력했다. 주문했던 예거쉬니첼은 손바닥만큼 큰 크기에 겉바속촉(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한)의 맛으로 우리로 하여금 딴 말 필요 없이 폭풍흡입하게 만들 정도로 완벽했다. 커다란 고기 위에 뿌려진 버섯소스의 독특한 풍미는 이전에 다른 곳에서 먹어보았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맛이었다.          

 에어푸르트는 독일의 정중앙에 위치하고 있는 튀링엔 주의 주도이며 인구 20만 정도의 그리 크지 않은 도시이지만 역사는 매우 깊어서 중세 때는 한자동맹에 가입하였고 1392년에는 쾰른대학과 함께 독일에서 제일 먼저 시립대학인 에어푸르트 대학교가 설립되었다. 거기에서 종교개혁의 선구자 마르틴 루터가 공부하였다 해서 시내 중심가에는 마르틴 루터 동상이 세워져 있다. 그 외에도 18세기에 들어서는 괴테와 실러 훔볼트 등의 학자들이 활약을 했을 정도로 중요한 도시였지만 그 후 서서히 쇠퇴하였고 동독으로 편입되면서 내리막이 가속화 되었다, 그래서 그런지 시내를 돌아다녀 보면 정말로 오래된 건물들이 수백 년을 견뎌내고 서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어서 중세의 한 가운데로 시간 여행이라도 온 듯한 이상한 기분을 느끼게 했다. 도시 전체가 중세 박물관이라고 말해도 과하지 않을 만큼 오래된 건물들이 즐비했다. 그리고 도시 어디에서나 뾰족한 첨탑지붕을 한 교회들이 많아서 마르틴 루터가 이곳에서 수학하고 수도한 것이 우연이 아니란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그 루터의 동상은 가장 현대적인 건물들이 몰려있는 시내 번화가 한복판에 있었던 것이 이채로웠다.     

 에어푸르트에서 가장 유래가 깊고 인상 깊은 건물은 역시 마리언 대성당이다. 도시 한 가운데에 옆에 큰 언덕을 끼고 마리언 대성당의 하늘을 찌를 듯한 첨탑이 높이 세워져 있어서 왠만한 곳에서는 어디서나 그 성당의 첨탑이 눈에 들어왔다. 이 성당은 742년에 최초로 건립된 이후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내부 장식이 이루어졌고 그후 14세기에 다시 고딕양식이 추가되었다고 한다. 대성당 바로 옆에는 조그만 광장을 사이에 두고 성 세베리 성당이 있었고 그곳에 매우 큰 십자가상이 있었는데 거기에 매달린 그리스도의 얼굴이 아직도 기억이 날 만큼 몹시 슬퍼보였던 것이 인상 깊다.      

 아우구스티너스 수도원은 바로 루터가 공부하며 수도생활을 했던 곳이다 종교개혁 이래 지금은 개신교 교회로 변해 있다. 외관은 그저 오래되고 투박하기까지 한 모습이지만 견고함과 아름다움이 조화된 교회의 고딕식 창틀과 벽, 지붕은 수백 년의 세월 동안 그곳에서 길러낸 수도승들과 평범한 교인들의 영혼과 정신이 어린 듯 경건하고 숙연한 분위기가 배어 나오는 듯 했다.     

 크지 않은 도시였기에 매일 매일 걸어서 골목골목을 돌아다녔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그 골목들에는 어김없이 한 구간 마다 하나씩이라고 할 정도로 교회 건물들이 있었다. 이곳 사람들의 생활 속에 교회가 얼마나 큰 역할을 해왔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이곳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개인 집들과 교회들, 자그마한 공원들과 다리들, 카페와 레스토랑들이 조화를 이루어 에어푸르트만의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어 내고 있었는데 오래된 도시가 자아내는 고색창연한 아름다움을 거리 곳곳에서 만날 수 있었다. 그도 그럴것이 에어푸르트에는 다른 도시들과 확실히 구별될 정도로 목조기둥 주택(Fachwerk Haus)이 엄청 많이 남아있다. 이러한 목조기둥 주택이 갖가지 색깔들로 치장한 채 연이어 처마를 맞대고 있는 모습은 어떻게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다, 돌아설 때마다 한 컷씩 사진을 찍어도 그 자체가 그림엽서가 될 수 있을 정도이다, 오랜 세월을 버텨낸 그 치열하고 지독한 아름다움 앞에서 할 말을 잃었다. 그런데 한편으로 달리 생각하면 이 도시가 그렇게 많은 옛날 건물들을 지켜? 낼 수 있었던 것은 동독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동독과 서독이 분리되어 있었던 수십 년 동안 동독은 겨우 현상유지만 했고 별로 발전하지 않았다. 반면에 서독은 전쟁의 상흔을 어루만지면서도 전쟁 이전의 상태를 빠르게 회복하고 그 전보다 더욱 발전해서 유럽에서 강고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유럽의 3대 강대국을 말하라면 영국, 프랑스, 독일이라고 할 수 있지만 영국과 프랑스가 과거의 제국주의적 지위 때문에 여전히 그 자리를 고수하고 있는 반면에 독일은 히틀러의 그 지독한 자기 파괴적 행위 이후에도 재빨리 다시 경제 강국이 되었다. 전후의 서독이 폐허 속에서도 그렇게 빨리 재건할 수 있었던 원인은 그때까지 다져온 독일의 인문학적 전통과 문화적 강국의 면모, 발전된 과학기술, 국민들의 냉철한 이성과 근면한 국민성 등의 통합적 결과가 아닐까 생각한다. 반면 동독은 같은 바탕을 가지고 있었지만 공산주의의 사회체제 안에서 국민들의 역량이 흩어져 분산되고 자유를 잃어버린 상태에서 창의성이 묻혀버리고 체제 유지에만 신경 썼기 때문에 발전의 원동력을 상실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과거 동독에서 살았던 주민들은 독일 통일 후 자기들은 여전히 2등 국민(The Second Class Citizen Identity)이라는 의식 속에서 피해의식을 다스리지 못하고 살았다고 한다. 통일 된지 30년이 지난 지금도 독일정부가 해결해야할 과제로서 앞으로도 얼마의 세월이 흘러야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아이로니컬하게도 그런 동독의 낙후성이 과거 동독이었던 도시들의 현재 시가지 모습을 지켜내고 형성한 결과라고 간주했을 , 관광객이 보았을 때에 그런 도시의 모습을 훨씬  아름답고 사랑스럽다고 느낀다면 발전과 전통고수, 낡은 것과 새로운 것의 함수 관계는 너무나 고차원함수라서 웬만한 수학자들도 풀기 힘든 문제라고   있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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