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에 경복궁 옆 국립현대미술관에서 하는 <데이미언 허스트>전에 다녀왔다. 내가 별로 좋아하는 아티스트는 아니지만 문제적 작가임에는 틀림이 없고 내가 그에 대해서 듣기만 했지 실물로 본 작품은 없었기 때문에 이번에 못 보면 반드시 후회하리라 생각해서 부랴부랴 예약을 하고 관심없어하는 남편을 대동하고 제대로 마음 먹고 다녀온 전시회였다. 11시 예약이었으니 한 시간 남짓 전시를 보고 그 근처에서 점심을 먹으면 맞춤이겠다는 계산도 한몫했다. 예상한 바와 같이 전시회는 사람들로 만원을 이루었지만 사람들에 떠밀려 다닐 정도는 아니었기에 관심있는 작품에는 곁들여진 설명도 읽으면서 깊이있게 감상할 수 있었다. 전시회의 제목은 <진실은 없어. 그러나 모든 것은 가능하지>(Nothing is True, but Everything is Possible)였다.
그의 생애를 간략하게 기술하자면 다음과 같다. 그는 1965년에 잉글랜드의 브리스톨에서 태어나서 일찍부터 그림에 재능을 보였으며 반항기 가득한 소년시절을 보내고 난 후 골드스미스 미술대학에 입학하여 재학 중에 그가 큐레이터로 참여한 <Freeze>(1988)라는 전시회에서 센세이셔널한 작품을 발표하여 주목을 끌기 시작했다. 이를 계기로 그를 포함한 YBA(Young British Artist) 작가그룹이 차세대를 이끌어갈 새로운 예술가군으로 영국미술의 주축이 되어서 혁신적인 시도를 계속해 나갔으며 그전까지의 영국미술계의 지형을 바꾸는 사건이 되었다.
데이미언 허스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뱀상어의 사체 작품 <살아있는 자의 마음 속에 있는 죽음의 물리적 불가능성>(The Physical Impossibility of Death in the Mind of Someone Living)(1991년 작) 앞에는 역시 많은 사람들이 몰려 있었는데 그것을 직접 본 나의 소감은 워낙 그전부터 그에 대해 많은 생각과 느낌을 품고 있었던 탓인지 조금 심상해서 나도 스스로 놀랄 지경이었다. 그는 이 작품으로 커다란 상업적인 성공을 이루면서 돈방석에 앉았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대단한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이 작품을 계기로 런던의 유명한 미술상인 찰스 사치(Saatchi)로부터 후원을 받게 되고 그는 고액으로 허스트의 작품을 사들이며 밀접한 관계를 맺게되는데 세계 미술계에 화제성과 문제성을 부각시키는 데에는 일단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내 나름대로 솔직하게, 냉정하게 말하면, 커다란 상어의 사체를 부패하지 못하게 포름알데히드 용액으로 채운 커다란 유리상자 안에 넣어놓고 보란 듯이 내놓은 것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그래, 저게 어떻다고? 저게 뭐야? 저게 그렇게 대단해? 저게 무슨 예술작품이야?“ 라고 단순화해서 말할 수 있는, 대다수가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물건이라고 할 수도 있는 차원이었다. 어찌보면 작품 자체보다 작품의 제목이 더 사람의 이목을 끄는, 주객이 전도된 작품이라고 할 수도 있었다. 그런 면에서 누군가 거칠게 “사기꾼”이라고 욕을 해도 이해될 수 있을 정도다. 데이미언 허스트의 교활한 목적이 처음 그 작품을 보고, 또 길기만한 작품 제목을 읽고나서 눈앞의 대상과 제목을 일치시켜 보려고 사람들 머리를 쥐어짜게 하는데 있었다면 그것은 대단한 성공작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런데 우리가 유리수조를 통해 물고기나 수중동물을 관조하는 것은 이미 세상에 허구 많은 아쿠아리움(수족관)에서 많이 해왔던 것이고 특히나 농담 비슷하게 말한다면 살아있는 동물과 죽은 동물의 차이라는 것이 다를 뿐, 수많은 우리나라 횟집건물 앞의 유리수조 속에서 익히 보았던 것이 아니던가. 그것이 엄청 크다는 것, 죽은 동물의 사체라는 것이 차이점이라고 해도 죽음의 이면에 놓인 모든 개념과 철학과 감정을 이해하기 위해서 꼭 이런 충격적인 상어사체가 필요한 것인지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어떤 의미에서는 <죽음의 미학>의 최고치라고 평가할 수도 있겠지만 나의 세계관에는 맞지 않는 껄끄러운 무언가가 느껴졌다. 이미 저명한 작가의 저명한 작품에다가 뭐라고 토를 단들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마는 이 작품은 우리나라의 작가 백남준씨가 말했던, “현대예술은 사기이다”라는 명제를 눈앞에서 확인하게 해주는 확실한 실체였을 뿐이다. 그의 다른 작품들도 대부분 <죽음>과 관련된 것이 많으니까 그를 “<죽음>에 천착하고 집착한 괴짜”라고 칭할 수도 있겠으나 <죽음>이라는 문제를 부각시키고 집중적으로 다뤘다고 해서 그를 ‘반드시‘ 위대한 예술가라고 해야할 이유도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1991년에 시체안치실에서 찍은 사진을 확대하여 작품으로 만든<죽은 자의 머리와 함께>는 한번 일별하는 것만으로도 가슴 속에 심한 파란을 일으킨다. 보통 사람이라면 차마 하지 못했을 악동 같은 짓을 함으로써 그의 유별성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죽음은 인간존재가 피할 수 없는 숙명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존재뿐 아니라 모든 생물은 죽고 소멸한다. 삶과 죽음은 영원히 순환된다. 한번 생명을 얻었던 존재는 죽음이라는 과정을 통해 영원한 안식을 얻고 망각되며 그로써 영원히 소멸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인간은 죽음 앞에서 겸허해지고 숙연해져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데이미언 허스트가 어린 시절부터 가졌던 죽음에 대한 공포와 불안과 충격을 나 또한 일찍이 경험했었다. 유난히 예민성이 높은 내가 느꼈던 공포와 불안을 그도 역시 느꼈던 듯하다. 나는 유년시절에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라는 명제 앞에서 기절할 듯 놀라서 그 사실을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이기까지 신경증을 앓기도 했었다. 공포는 그림자처럼 내 등짝에 달라붙어서 어두워진 다음에는 집앞 골목길로 나가는 것조차 벌벌 떨면서 진땀을 흘리면서 억지로 해야했거나 그것조차 불가능하다고 여겨질 땐 피해 달아났던 숱한 기억이 있다. 허스트도 그런 불안을 안고 살았을까? 그러나 그가 죽음을 대하는 방법은 참으로 기괴하다. 공포를 더이상 공포가 아닌 것으로 느끼게 하기 위한 방법으로써 그는 자꾸 그것과 직면하게 하고 유희화하고 친숙하고 평범한 것으로 만들어 공포의 수위를 낮추려고 시도하고 있는 것일까?
2007년에 제작된 사람 두개골 작품<신의 사랑을 위하여>(For the Love of God) 는 또 다른 논란의 중심이 되고 있다. 백금을 입힌 사람의 두개골 표면에 8601개의 다이아몬드를 촘촘히 박아넣은 이 작품은 “도대체 왜 이런 짓을 하는거지?”라는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미친짓”이라는 느낌에 가깝다. 땅속에 묻혀 먼지로 되돌아가야할(제대로 된 안식을 누려야 할) 남의 두개골을 마음대로 가져다가 (물론 그는 고대유적에서 발굴된 그 두개골을 사왔다고 하고 있으나) 거기에 한 개도 아까운 다이아몬드를 수천 개나 박아넣었으니 이 무슨 정신나간 짓인가!! 이것 또한 화제성만으로도 이미 빅히트를 쳤지만 작품의 구매 내용과 관련하여 석연치않은 의문이 따라다녔을 정도로 그의 사기성이 유감없이 발휘된 것으로도 유명하다.(익명의 콘소시엄에 5000만 파운드에 팔려나간 것으로 알려졌으나 사실은 그런 적이 없고 창고에 보관되어 있었으며 거짓 소문을 퍼뜨린 이유는 자신의 작품값을 올리기 위한 자작극이었다는 내용). 몇백 년전에 죽은 인간의 두개골과 찬란하게 빛나는 다이아몬드의 조합!! 당신은 이것 앞에서 죽음에 대한 공포를 더 깊이 느끼고, 죽음과 대비된 삶의 의미를 더 강렬하게 느끼고, 변증법적으로 죽음의 극복을 통한 숭고한 삶의 철학을 고양시키는가?
죽음은 항상 가장 진지하고도 심각한 철학적 문제였다. 모든 사람은 죽음 앞에서 당혹해하며 그 의미를 파악하고자 고뇌하고 연구하고 성찰해왔다. 삶과 죽음의 괴리는 너무나 극명해서 살아있는 인간으로서는 죽음의 상태는 짐작조차 어려운 것이고 어떤 인간도 그 문제에 대해 단순명료한 해답을 내리지 못한다. 만일 그럴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그는 단숨에 인류의 모든 문제를 해결한 전지전능한 신의 반열에 오를 것이다. 인류는 아직도 <죽음>에 대한 결론을 내리지 못했으며 인간이 발명해낸 모든 종교는 아직도 이 문제와 씨름하고 있다. 인간에게 영혼이란 것이 있는 것인지, 인간이 죽은 후 내세라는 것이 있는지, 살았을 때 행한 선과 악에 따라 내세에 심판을 받는 것인지 아무도 확실하게 말하지 못한다. 사람들은 단지 자기가 믿고싶은 대로 믿을 뿐이다. 그런데 허스트처럼 죽음을 다양한 방법과 모양으로 상징화하고 변주하고 전시한다고 해서 그에 대한 해답이 주어지는가.
그외 다른 작품들로는 <알약>, <천년>, <스핀 페인팅>시리즈, <스팟 페인팅>시리즈, <나비날개>시리즈 해골시리즈 등 일관되게 <죽음>을 주제로 한 작품들이 많다. 그는 이에 대해서 “나는 다만 인간 존재의 무상함을 형상화하여 삶을 찬미하고 싶었을 뿐이다. 죽음의 상징을 사치, 욕망, 타락의 상징으로 포장하는 것보다 더 나은 방법이 있겠는가?“라고 항변한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해명 역시 앞서 죽은 상어사체에 붙인 기나긴 제목처럼 현란한 말솜씨로 대중을 현혹하는 빈 껍데기뿐인 사기수법에 지나지 않는다고 혹평하고 싶다. 나와 같은 예술에 대한 문외한이 뭐라 한다고 지금의 그가 누리고 있는 전무후무한 부와 명예에 단 한점이라도 누가 될 수 있으랴마는 이 생각 또한 누가 뭐랄수 없는 나만의 엄연한 평가인 것을 어찌 하랴.
현대에 와서 데이미언 허스트 외에도 앤디 워홀이나 제프 쿤스같은 상업주의에 경도된 소위 ‘현대미술가’들이 득달같이 나서서 성가를 드높인 것이 이미 여러 해이지만, 또 그에 못지않은 아류들을 우리 주변에서까지 보게 되지만 그들에 대한 평가가 세기를 넘어서 수 백년, 수 천년 뒤까지 이어질지는 미지의 영역으로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