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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live Mar 16. 2022

로도스

고대도시의 찬란함과 중세도시의 위엄

  로도스에서 보냈던 며칠은 다른 곳에서와는 달리 비교적 바빴다. 로도스는 섬이었지만 다른 섬들과는 매우 달라서 모든 편의시설이나 도로사정, 주택이나 공공시설들도 대도시 못지않았고 어떨 때는 차량정체 현상도 나타났기 때문에 여기저기 중요하고 유명한 곳들을 방문하려니 자연 시간을 빠듯하게 써야했다. 더욱이 여기서 우리는 로도스 시내로부터 1시간가량 떨어진 한가한 바닷가에 숙소를 잡았기 때문에 차를 렌트하지 않을 수 없었고 서울에 살 때처럼 이곳저곳을 갈 때마다 차를 타고 운전해서 갔으므로 섬에 와서 다시 도회지 생활을 하는 느낌이 들었다. 크레타나 로도스를 제외한 다른 작은 섬들은 조용하고 목가적이고 그림 같은 분위기로 정말 이곳이 섬이로구나, 아름답다 하는 느낌을 주는 반면에 로도스 같은 곳은 섬과 도시의 맛을 동시에 느끼게 해주면서도 과거의 유적들이 엄청나게 많이 남아 있어서 봐야할 곳이 많았던 탓이다.     


  로도스는 일본의 유명 작가인 무라카미 하루키가 1986년 가을부터 1989년 여름까지 이탈리아와 그리스에서 살면서 그 체험을 토대로 <먼 북소리>라는 수필집을 썼던 곳 중의 하나로서도 유명한데 이 책은 우리나라 독자들에게도 많이 읽혀지면서 그리스에 대한 동경과 여행욕구를 이끌어낸 책으로도 유명세를 탔다. 하루키의 책을 보면 그가 이 섬에 체류했던 시기가 겨울이었기 때문에 그는 추운 날씨 때문에도 고생을 많이 했고 이탈리아에서는 일본차 대신 샀던 Fiat차가 또 말썽을 부려서 그다지 재미를 못 보기도 했지만 그 기간 동안 두 개의 소설을 완성시킬 수 있었던 만큼 그에게는 나름 의미 있고 결실을 맺은 체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걸 보면 어떤 계절에 어떤 곳을 찾고 방문하느냐가 그곳의 인상을 결정짓는 주요 요인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고 모든 일에는 행운과 불운이라는 신의 영역이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우스개 같은 생각도 하게 된다.      

  그리스 내의 섬들 중 크레타 다음으로 네 번째로 큰 섬에 속하는 로도스는 터키와 아주 가까이, 에게 해의 동쪽 끝에 위치하고 있다. 도데카니사 제도의 중심지로서 고구마 모양으로 길쭉한 타원형의 모습인데 남북으로 길고 동서로는 짧은 모양새다. 가장 큰 도시는 북동쪽에 위치한 로도스 시이며 중세도시 로도스(Medieval City of Rhodes) 라는 특별한 명칭으로 불리운다. 동남쪽 아래쪽에는 린도스라는 고대도시가 있었으며 지금은 아크로폴리스의 흔적이 남아있다.     


  로도스 섬에는 B.C.10세기경 그리스계의 도리아족이 이주해서 식민지를 건설하면서 역사가 시작된다. 도리아인들은 로도스섬에 고도로 발달된 문명을 자랑했던 린도스, 카메이로스, 이알리오스 등의 세 고대국가를 건설하였다. 지금의 로도스시는 B.C. 5세기 말에 밀레토스의 히포다모스 도시계획에 따라 세 고대국가를 통합하여 건설되었고 B.C. 333년에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이집트를 정복한 후 알렉산드리아가 지중해 무역의 중심지가 되면서 로도스 섬은 지중해와 서아시아를 이어주는 중계무역의 중심지로 번영과 영화를 누리기 시작했고 막대한 부와 군사력을 자랑하며 고대도시로 우뚝 섰다. 이후 로마의 중요한 동맹국 중 하나였다가 로마의 보호국이 되고 끝내는 로마제국의 직접적 통치를 받게 된다. 로마제국이 분할된 이후에는 동로마제국에 편입된다. 1309년에 이르러서는 구호기사단(요한기사단, 오스만제국에 의해 축출돼서 후에 몰타로 물러가 거기에서 명맥을 잇게 된다.)에게 점령되어 통치 받다가 16세기에 오스만제국의 슐레이만 1세에게 다시 점령된다. 그 후 1912년에 이탈리아와 터키간의 전쟁에서 이탈리아가 승리하면서 이탈리아령이 되었다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이탈리아가 패하자 나치독일의 점령지를 거쳐 1947년에서야 그리스로 반환되었다.   

        

  로도스 항구(만드라키온 항구)에는 고대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꼽히는 로도스의 거상(The Colossus of Rhodes)이 세워져 있었다고 하는데 무려 12년간의 제작기간이 걸렸고 15m의 대리석 기단 위에 세워진 33m에 달하는 거상으로서 석재와 철로 제작해 겉을 청동으로 덮은 것인데 내부에는 나선형 계단이 있어서 받침대에서부터 꼭대기까지 걸어 올라갈 수 있었다고 하며 꼭대기에는 불을 켤 수 있도록 설계되어 밤에는 등대의 구실도 했다고 전해진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장군인 프톨레마이오스 1세와 소아시아 안티고누스 왕조의 데메트리오스 1세와의 전쟁 시기에 로도스인들은 프톨레마이오스 편에 서서 싸웠고 두 차례의 큰 전투에서 승리하고 안티고누스 세력이 물러가자 그 승리를 축하하는 의미로 로도스 섬의 수호신이었던 태양신 헬리오스에게 바치는 상징물로 기원전 280년에 세워졌다고 한다. 그런데 56년간 항구를 지켰던 이 청동상은 기원전224년에 지진으로 무릎부터 꺾이면서 무너져 내렸다. 이 거상을 그린 고대의 삽화와 그것을 직접 본 고대인들의 설화에 의하면 거상의 두 발이 두 개의 대좌를 밟고 양 다리를 벌리고 왼쪽 손은 살짝 내리고 또 오른쪽 손은 위로 올려 횃불을 들고 있으며 어깨에는 화살통을 메고 있는 모습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현대의 엔지니어들과 과학자들은 그 밑으로 배들이 지나갈 수 있도록 그렇게 다리를 벌려 세우는 것은 불가능하며 두 다리를 곧게 하고 서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설도 있어서 어떤 것이 정확한 모습인지 알 수 없다. 그러나 로도스 전역의 기념품점에서 팔리는 거상을 본뜬 모형은 모두 다리를 벌리고 서 있는 모습을 하고 있고 그것이 훨씬 더 멋있게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지금도 항구 입구에는 옛날의 두 다리가 버티고 서 있었을 것 같은 위치에 커다란 원통형 좌대가 두 개 서 있고 그 위에는 현재 사슴 두 마리가 서 있다. 옛날의 거상을 직접 눈으로 본 것은 아니어서 비교할 수는 없지만 이 사슴들도 바다를 향해서 높은 곳에 서서 눈길을 먼 곳으로 향하고 있는 모습이 항구로 들어오고 나가는 배들이나 사람들에게 멋진 풍경을 선사해주고 있으며 해양 도시였던 로도스와 너무 잘 어울리는 항구의 풍경을 그려내고 있다.          


  아테네의 피레우스 항구에서 크루즈 선박에 몸을 싣고 하룻밤을 자면서 로도스로 가게 됐던 이번 여행은 특별히 배 안에서 먹었던 저녁식사가 기억에 남는다. 그리스에서는 관광지라고 해서 음식료 값에 바가지를 씌우는 일은 별로 없기 때문에 보통 때는 둘이서 그릭샐러드 하나, 각자 메인으로 기로스나 스테이크같은 요리 하나, 미네랄워터 큰 병 하나 정도 시키고 후식으로 에스프레소 커피 한잔 씩 시키면 대략 일인당 20유로가 나왔었다. 그런데 배 안의 호화식당엘 들어가니 가격이 배로 뛰는 것이었다. 모처럼 배에서 하는 식사이니 만큼 와인도 곁들여서 매일 먹던 비슷한 메뉴에서 벗어나 해물 수블라키, 양고기 찜, 깔라마리 등등을 시켰더니 나중에 가격표를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하여간에 맛도 최고였고 쉐프가 직접 와서 요리 설명을 해주고 와인도 따라 주고 하니 기분이 한껏 업 되는 느낌이었다. 돈을 아낄 땐 아끼더라도 이럴 땐 쓰는 기분도 느껴야한다는 우리 남편의 평소 지론처럼 먹은 날이었는데 목소리도 커지고 말도 웃음도 많아지고 농담도 쉴 새 없이 터지고 하는 남편을 보니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아침에 항구에 도착해서 배에서 내린 우리는 차를 렌트하기 위해 항구 둑길을 한참 걸어서 <Hertz>라는 간판을 달고 있는 어느 사무실로 들어갔다. 미리 예약하지 않았으므로 이것저것 물어본 끝에 스페인  Ibiza 렌트해서 00아파트망이라고 이름 붙은 숙소까지 1시간을 달려서 도착했다. 도착한 숙소는 거실과 침실이 따로 있고 부엌도 있는 아주 넓은 독채 펜션이었다. 앞으로는 넓은 잔디밭이 펼쳐져 있었으며  밑으로는 막힘없이 바다가 훤하게 내려다 보였다. 숙소가 자리한 동네는 대부분의 집들이 이렇게 펜션이거나 레스토랑으로 영업하는 집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작고 한적하고 조용한 바닷가 마을이었다. 기념품이나 생필품을 파는 가게들도 작고 아담하고, 번잡한 로도스 시내와는 달리 어찌 보면 시골 마을처럼 너무 조용해서 약간   듯한 느낌까지 주었다. 숙소 예약은 언제나 남편 몫이었기 때문에  이런 곳으로 예약했느냐고 물었더니 시내 쪽은 너무 복잡하고 도시의 느낌이 너무 강해서 일부러 섬의 아늑한 분위기를 느끼기 위해서 그랬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나는 어쨌든 숙소가 넓고 깨끗하고 가정집 같은 분위기에다 번잡스런 곳에서 약간은 떨어져 있는 곳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대만족이었다. 사실 우리가 2 전에 다른 일로 로도스에 왔을  항구 옆의 바닷가 바로 앞의 대형 호텔에 묵었기 때문에  다시 그쪽의 호텔에 묵을 필요는 없어 보였다. 로도스 섬이   편이기 때문에 여러 곳을 경험해 보는 것이 훨씬 나을  같았다. 우리는 대강 짐들을 풀어서 정리해 놓은 다음에 점심을 먹기 위해 마을로 내려갔다. 바닷가 끝에 유난히 마당이 넓고 파란색 페인트칠이 반짝반짝 빛나는 곳이 눈에 뜨여 그리로 들어가서 포크스테이크와 생선튀김 등으로 만족스러운 점심을 먹었다. 특별히 포크스테이크는 크기도 손바닥만큼 큰데다가 맛도 그만이어서 포크스테이크에 대한 기존의  기억을 확실하게 바꿔 주었는데  후로도 여러  다른 레스토랑에서도 시켜봤지만 그때만큼 맛있지는 않았다.  레스토랑은 대부분의 바닷가 그리스 식당이 그러한 것처럼 해산물 요리를 특별히  하는  같았다. 생선튀김도 아주 훌륭했다. 그곳은 가족들이 운영하는 식당으로 보였으며 뚱뚱한 그리스 아줌마가 부지런히 손을 놀려 음식을 만드는 동안 아들로 보이는 어린 청년과 남편으로 보이는 아저씨가 테이블을 정리하고 음식을 날라다 주었다. 전형적인 바닷가 마을 식당의 풍경이었다. 점심 식사 후에는  바퀴 동네 산책을 하고 나서 남편은 바닷물 속에 들어가 수영을 하고 나왔는데 물속이 정말 따뜻하고 맑다며 엄지를 추켜세웠다.          

   다음 날은 구호기사단( 요한기사단) 로도스 성채로 갔다. 그곳에는 그랜드마스터 궁전  고고학박물관, 기사단 거리, 성벽, 일반인들이 거주했던 올드타운 등이 있다.  궁전은 구호기사단의 요새이며 본부로 쓰였고 기사단장이 거주하던 곳이었다. 동로마제국 시대인 7세기에 최초로 요새 용도로 지어졌던 것을 구호기사단이  보강하고 개조해서 오늘날의 궁전 모습을 완성한 것인데 특이한 것은  유적은 그리스에   되지 않는 고딕양식건축물이라는 점이다.  궁전을 처음 보는 사람은 누구나 “하는 탄성을 지르게 된다. 규모가 엄청났을  아니라 복잡하고 정밀하고 아름다운데다가 요새의 역할까지 완벽하게   있는 구조를 보면서 어떻게 이런 건물을 7세기에 지을  있었을까 믿을  없는 기분까지 들기 때문이다. 요즘 젊은 애들이 하는 유행어처럼 정말 “가슴이 웅장해지는건물인 것이다. 요새란 모름지기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 모범답안이라도 보는 느낌이었고 웬만한 대포알은 도로 튕겨져 나갈 만큼 견고하고 웅장하고 화려한 모습이 놀라웠다. 내가 이제까지 보았던  어느 궁전이나 요새 보다 상상을 뛰어넘는 웅장함과 거대함으로 보는 사람을 압도해 왔다.           


  거기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헬레니즘 미술의 최고 걸작이라 할 수 있는 <라오콘 군상>이라는 조각상이었다. 라오콘은 아폴론의 사제였는데 트로이 전쟁이 일어났을 때 그리스 군이 거대한 목마를 해안가에 남겨두고 간 것을 보고 그 안에 그리스 병사들이 숨어있을지도 모른다며 불태워 버릴 것을 주장했다가 두 아들과 함께  포세이돈이 보낸 왕뱀에게 물려죽은 신화 속의 인물이다. 본래 이 대리석 상은 1506년 로마의 한 포도밭 농가에서 발견되었던 것인데 지금은 바티칸 박물관에 설치되어 있으며 로도스에 있는 것은 복제품이다. 이 조각상은 B.C. 175년에서 150년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역사가들이나 미술사가들에 의해 극찬을 받은 작품으로서 라오콘과 두 아들의 죽어가는 순간의 고통을 생생하고 역동적이고 극사실적으로 묘사한 것으로 유명하다. 헬레니즘 시대의 예술작품에 매료된 독일의 요하임 빙켈만은 이 라오콘 군상이 고전시대 예술정신의 핵심인 “고귀한 단순성과 고요한 위대성”을 가장 잘 나타냈다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작자는 로도스 섬의 조각가 아게산드로스, 아테노도로스, 폴리도로스 등으로 전해지며 그러한 이유로 이 조각상이 로도스 섬에 있는 것이라고 짐작된다. 이 대리석 조각상은 독보적으로, 약간 어두운 조명 속에서 아주 넓은 홀에, 다른 가구나 장식품이 없는 곳에 홀로 세워져 있었다. 바티칸에만 있는 줄로 알았던 조각상을 비록 복제품이긴 하지만 이곳에서 볼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약간 흥분되었다. 긴 긴 세월을 이겨내고 전해 내려온 신화와 전설의 실제 인물과 만난 느낌이었다.     


  궁전의 병원 건물은 이제 고고학박물관이 되어 로도스 섬에서 출토된 수많은 유물들을 시대별로, 구역별로 나누어 전시하고 있었다. 특히 도자기 종류와 조각상들, 가문의 문장들, 묘석(Gravestone)들이 많이 전시되어 있었고  방대한 양과 정밀한 표현력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것들을 보는 사이에  다리는 이미 장작토막처럼 딱딱하고 뻣뻣하게 굳어서  이상 걷기가 힘들어졌다. 우리는 기사단의 거리로 내려가서 건물들 사이에 있는 분위기가 좋고 나무들이 많이 보이는 정원 카페에 들어가서 식사를 하였다. 입에 음료가 들어가고 먹을 것이 들어가니 힘이 조금 돌아오는  같아서 카페에서 나와서 다시 건물 밖으로 빠져나와 성곽 안에 있는 해자를 둘러보았다. 그곳에는 이미 물은 없었고 잔디와 나무들이 넓은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에는 성곽 위를 걸었는데 성곽이 투박스러울 정도로 단단하고 견고하게 지어진 것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1512년에 북서쪽을 향해 세운 앙부아즈 성문(Amboise Gate) 성벽의 두께가 12m 이를 정도라고 하며 성벽의 전체 길이는 4km 달한다. 성곽 위에서는  멀리 로도스  바다가 시원하게 시야에 들어왔다. 로도스를  중세도시(Medieval city of Rhodes)라고 부르는지  이유를   있을 정도로 성안에만도 6000명이 살고 있다고 하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로 성안의 올드타운에는 주민들과 관광객들로 넘쳐나고 있었다.  도시는 1988년에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고 고딕시대의 가장 아름다운 도시의 조화를 보여주는 건축으로 역사적인 의미가 깊다.


   다음 날의 우리의 목표는 카메이로스 고대도시국가 유적지였다. 그곳은 서쪽 해안가에 있어서 우리가 묵고 있던 동쪽 해안가에서는 차로 2시간 이상을 운전해서 가야만 했는데 가는 동안의 길이 매우 험했다. 조그만 섬이었는데도 섬의 중앙부에는 높은 산들이 많았고(최고봉 아타이로산, 1219m)  중턱에는 작은 마을들이 흩어져 있었다. 가는 길의 대부분은 1차선 정도의 좁은 길이 많았고 중간 중간 만났던 마을들도 인가가 미처  는 안 되는, 수십 채의 산골마을이 대부분이었다. 가끔씩 골짜기 깊은 곳에 수도원(Monastery)들도 만났지만 들어가  시간적 여유가 없어서 지나칠 수밖에 없었다. 카메이로스는 기원전 1000 경에 본토의 도리아인들이 이주해 와서 건설한 3개의 도시국가 린도스, 카메이로스, 이알리소스 중의 하나인데 이번 여행에서 아이올로스는 제외하고 카메이로스와 린도스만 가게 되었다.      


  소문만 듣고 찾아간 카메이로스는 우리의 기대를 훨씬 뛰어넘은 진정한 고대도시국가라고   있었다. 도시규모도 엄청  편이었고  당시의 생활상을 짐작할  있는 유적들도 매우 많이 남아 있었다. 3000 전에 이미  정도의 생활문화를 누리고 살았다는 것이 믿겨지지 않을 정도였다. 도시의 제일  북쪽에는 거기서 살고 있는 주민들의 식수를 책임지는 커다란  저장고(Cistern) 건설되어 있었고 집집마다 목욕탕이 딸려 있었고  계단을 내려오면 수십 개의 주랑이 받쳐주는 신전을   있었다. 도리아식 기둥들, 제단들, 회랑들, 신전들... 고대 그리스인들이 얼마나 신전 건축에 진심이었는지를, 얼마나 발전된 문명을 이루고 살았는지를 웅변해주는 유적들을 보니 현재를 사는 우리들이 그렇게 잘날 것도 없다는 씁쓸한 자각이 왔다. 3000년 전이 아니라 불과 500년 전의 유적지라고 해도 믿을 판이었다. 경탄스러운 문명의 발상지에 와서 이런 유적들을 보았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행운아가 틀림없다고 감사한 마음도 들었다. 햇볕 속에 빛나던  고대도시의 유적지는 아직도 강렬한 잔상으로  마음 속에 남아 있다.


  돌아가는 길은 거의 비슷한 코스를 택했는데 중간에 카페에 들어가려고 들른 마을에서는 이것저것 구경하다가 그곳이 유명한 꿀 생산지라고 하기에 꿀단지를 하나 샀다. 그 꿀을 팔던 아저씨는 키가 크고 얼굴에 구레나룻을 기르고 있었는데 무슨 말인가 하던 끝에 자기 이름이 ‘야니’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 말에 그 사람 얼굴을 찬찬히 보니 실제로도 얼굴이 야니와 많이 닮은 듯했고 어찌 보면 <그리스인 조르바>에 나왔던 안소니 퀸과도 비슷하게 생겨서 기억에 남아 있다. 그리스 남자들은 대체로 아주 잘 생긴 편이다. 그리스 조각들의 얼굴과 거의 닮아있다. 고대의 조각가들은 그 잘생긴 얼굴들을 자기 작품에 새겨서 남기고자 했는지 모른다. 꿀을 사고 나와 마을을 이리저리 둘러보면서 조용하고 작고 아름다운 시골 마을이 정겹게 느껴졌다. 비탈진 산기슭에 아슬아슬하게 지어진 산골마을 집들의 지붕이 점점이 눈에 들어오면서 이런 산골에서 사는 삶은 어떤 것일까 풀어내보려 했지만 나로서는 알 수 없는 영역이었고 그저 신비롭게 생각될 뿐이었다.     

 

  꽤 고단한 하루를 보냈던 우리는 숙소에 돌아와서 그 전날 다른 레스토랑에서 먹었던 해물 리조또를 흉내내어 후다닥 저녁을 해결하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 날은 린도스에 가기로 해서 체력을 방전시키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린도스로 가는 길은 차로 30 정도밖에  걸렸다. 가는 길은 수월했지만 차를 주차시키고 나서 아크로폴리스로 올라가는 길에서 길을  번이나 잘못 들어서 더운 날씨에  그래도 힘든데 고생을  했다. 아크로폴리스로 올라가는 길의 중턱까지는 양쪽이 가게들과 식당들로   상가 골목이었고  이후부터 주택가 골목이 이어지다가 다음에는 산길인데 길을 헷갈려 주민인 듯한 사람한테 물어봤더니 엉뚱한 길을 가르쳐줘서 헤맬 수밖에 없었다. 아래쪽 입구에서부터 당나귀를 타고 올라가는 사람들이 드문드문 보였는데 그제서야 당나귀를 안타고 걸어가겠다고 작정한 에 대해서 후회막심이 되었다. 긿을 잃고 헤맨데다가 날씨까지 몹시 더워서 겨우겨우 발걸음을 떼어놓던 나는 아크로폴리스 정상까지 올라가고 나서야 비로소  하고 한숨을 쉬며 흘러내리는 땀을 닦고 정신을 차릴  있었다. 표를 끊고 아치형 문을 지나 입장하자 시원한 바다가 내려다보이면서 아크로폴리스의 전경이 눈에 들어왔다. 고대도시의 찬란한 문명의 흔적을 한곳에서 오롯이   있는 가슴 벅찬 장소였다. 이십 미터쯤  보이는 도리아식 기둥들만   남아 있는 아테나 신전이나 궁전의 남은 흔적들, 계단들, 회랑들이 눈부신 햇빛 속에서 사람들을 맞고 있었다. 그동안 무수히 많은 신전들을 보아왔지만 대부분은 세월 속에서 허물어진 모습이고  허물어진 모습도 제각각이라서 신전들의 남은 부분도 제각기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런 모습들이  각각의 다른 상념을 불러일으킨다. 이곳의 아테나 신전도  색다른 모습으로 에게 해의 동쪽에서 자기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었다.  오래된 돌무더기들이  그리  마음을 건드리는지 모를 일이었다. 나는 아득한 마음이 되어서 신전의 기둥을 올려다  보았다.       


 그 다음 날은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졌다. 아침에 일어나서 수도꼭지를 틀었는데 물이 나오지 않는 것이었다. 우리는 세수도 못하고 어찌 된 영문인지 몰라서 부랴부랴 펜션 주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한지 한 20분쯤 지나자 펜션주인이 두 손에 하얀 물통 가득 물을 담아 들고 와서는 당황한 얼굴로 설명하길 로도스에 그해 비가 거의 오지 않았으며 강수량이 너무 부족한 상황인데 우리 펜션 옆에 최근에 세워진 거대 리조트에서 물을 너무나 많이 사용한 탓에 물 부족 사태가 일어나서 조그만 펜션들이 피해를 보고 있다는 거였다. 우리는 어이가 없었지만 사태를 이해하고 해결책을 물었는데 거듭 죄송하다고 하면서 몇 시간 내에 꼭 해결해 놓을테니 오늘만 자기가 가져온 물로 급한 일만 해결하면 절대로 다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을 단단히 하였다. 우리로서는 그런 일로 시끄럽게 왈가왈부 해봐야 서로 기분만 상할 것으로 생각해서 그렇게 이해하고 그 날은 로도스 시내 구경을 할 참이었기 때문에 간단히 씻고 시내로 나갔다.    

       

  저녁에 다시 돌아와 보니 펜션 주인과 인부가 건물 옥상에서 한참 무슨 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우리를 보더니 다가와서 수돗물 문제를 해결하였으니 오늘부터는 걱정 없이 물을 사용할 수 있노라고 이야기했다. 어떻게 한 거냐고 물으니 저 거대 리조트가 있는 한 앞으로도 물 부족 문제가 언제든 다시 발생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옥상에 커다란 물탱크를 설치해서 물을 가득 채워 놨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수고하였다며 주인의 재빠른 대처를 치하해 주었다. 그러나 주인은 그때부터 이런저런 이야기를 시작하며 그리스의 현 경제상황과 자기식구들 얘기, 연금 얘기, 물가 얘기로 우리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발생한 일에 대한 미안한 마음과 그동안 참고 참으며 버텨 왔던 그리스 정부에 대한 불만들이 봇물 터지듯 우리 앞에서 터져버린 것이었다. 자기 와이프가 고등학교 영어교사인데 작년부터 봉급이 깎여서 절반만 받고 있다는 이야기, 자기는 아테네 대학 엔지니어 출신인데 사업을 하던 중 잘 안돼서 작년에 이 펜션을 지어 펜션업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 자기 딸이 올해 아테네 대학 경제학과에 진학했는데 한 달에 생활비로 1000유로를 보내고 나면 자기 둘은 겨우겨우 지낼 정도만 생활비가 남는다는 이야기, 망할 경제위기 때문에 그리스 사람들 전부가 고통 받고 있다는 이야기 등등을 한숨을 섞어가며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딱한 생각이 들어서 성의 있게 이야기를 들어주며 맞장구도 쳐주며 빨리 그리스의 경제위기가 지나가기를 바란다며 이야기를 마쳤다. 펜션주인은 힘주어 악수를 하고는 멋쩍은 얼굴로 차에 올라타서 다음에 다시 로도스에 와서 자기 집에 머물러 준다면 10% 정도는 깎아줄 수 있다고 하며 바이바이 하며 돌아갔다. 우리는 그를 배웅해 주면서 한 나라가 경제 위기를 겪게 되면 시민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어떤 고통을 짊어지게 되는지를 피부로 느끼게 된 것 같아서 짠한 마음이 되었다. 말로만 듣던 남의 나라 경제위기가 꼭 남의 이야기만은 아니며 고통 받는 누군가는 언젠가는 내 형제, 부모, 친지, 동료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제발 각국의 정치지도자들이 내 부모형제를 돌본다는 생각으로 정치를 해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묵었던 숙소는 해변과 맞닿은 곳에 있었지만 풀 한포기 안 보이는 커다랗고 가파른 모래언덕을 사이에 두고 읍내라고 할 만한 좀 더 큰 마을과 떨어져 있었다. 그 언덕을 지나치다 보면 염소들이 몇 마리씩 언덕을 오르거나 내려가는 모습도 보였다. 염소들은 누가 지나가는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이었다. 찻길 바로 옆에서 지나가는 차를 멀뚱멀뚱 쳐다보기도 했다. 로도스 시내에서 들어오다 보면 항상 그 읍내를 거치게 되어있어서 몇 번인가 지나치다 보니 그 마을에 대한 호기심이 생겨서 하루는 한낮에 거기에 가서 점심을 먹어 볼 요량으로 그 마을로 향했다. 그런데 뙤약볕이 내리쬐는 더운 대낮에 10살 쯤 되어 보이는 남자 아이들 셋이 낑낑대며 언덕을 오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우리가 지나가며 그 얼굴을 보니 좀 태워주었으면 하는 표정이 읽혀져서 차를 잠깐 멈추고 “태워줄까?” 하고 물으니 냉큼 미소를 띠며 우리 차에 올라탔다. 차에 탄 그들에게 영어로 몇 마디 물었으나 아이들은 영어를 할 줄 모르는지 서로 얼굴만 쳐다보며 수줍은 미소만 지었다. 그맘때의 아이들의 모습은 어디서나 참 귀엽다고 생각하며 마을 입구에서 그들을 내려주니 그리스어로 고맙다고 인사하며 손을 흔들고 사라졌다. 우리는 마을길을 이리저리 돌다가 그중 좀 괜찮아 보이는 식당에 들어가 음식을 주문했는데 맛은 뭐 그럭저럭 수준이었다. 점심을 먹고 나서 한 30분쯤 걸어서 마을을 돌아보니 해변가의 집들이 깨끗하고 새집들이 많은 반면에 이곳의 집들은 수십 년, 수백 년 되어 보이는 집들이 꽤 많아서 아주 오래된 시골 마을의 느낌을 주었다. 한 십 년 전만 해도 해변가는 그냥 빈 해변이었을 것 같다. 그러다가 갑자기 몇 개의 리조트가 생기고 펜션들이 지어지기 시작하자 너도나도 모여들어 또 하나의 새로운 해변마을이 조성된 것이고 읍내라고 할 수 있는 이 마을은 그대로 세월의 더께를 묻힌 채 옛 모습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로도스 섬과 관련된 매우 유명한 우화 하나가 있다. “여기가 로도스다, 여기서 뛰어봐라(hic Rhodus, hic salta!)” 라는 허풍쟁이 5종 경기 선수에 관한 이야기인데 이 사람이 세계 여러 나라에서 대단한 일을 하고 왔다고 장황하게 떠들면서 심지어 로도스섬에서는 그 누구도 해내지 못할 만큼 세계기록의 멀리뛰기를 했다고 자랑했다고 한다. 그러자 구경하던 사람 중 하나가 “좋다, 그럼 여기를 로도스라고 생각하고 한번 뛰어봐라”라고 이야기 했다는 우화이다. 이 말은 “네가 자랑하며 떠드는 말을 믿을 수 없으니 여기서 당장 검증할 수 있게 직접 해보라”라는 의미로 쓰여진다. 철학자 헤겔 역시 위 말을 법철학 강의 서문에서 나름대로 활용한다. “여기가 로도스니 여기서 뛰어보아라”는 말은 미래에 대한 당위론이나 공허한 이론은 접어두고 현실 자체를 파악하는 것이 관건이라는 것이다. 미래가 어쩌구 저쩌구 하는 헛소리를 집어치라는, 한마디로 모든 불쉿(Bullshit)에 대한 엄중한 경고인 셈이다. 헤겔은 “로도스Rhodes”의 어원을 빗대어 “여기에 장미가 있다, 여기에서 춤을 춰라”로 바꾸어 말하기도 한다.  여기서 헤겔이 장미라고 표현한 것은 로도스의 영어식 이름인 Rhodes 가 영어 단어인 장미 Rose의 발음과 같아서 동음이의어의 기능을 한다고 보면 된다.  

    

  로도스는 보면 볼수록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섬이라고 생각한다. 고대에도 매혹적이고 멋있는 곳이었을 뿐만 아니라 지금도, 앞으로도 로도스는  개의 얼굴을 가진  호기심 많은 세계의 여행자들을 끌어 모아 각자의 다른 상념으로 추억하게 만드는 멋진 곳이 되리라 생각한다. 고대도시 3개와 중세도시의 원형을 그대로 품고 있는 , 로도스는 우리의 어떤 완고하고 오만한 생각도  자리에서 녹여버리고 무장해제 시키는, 경이로운 섬이다.      

(20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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