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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live Feb 15. 2022

프랑고카스텔로

그리스의 크레타섬 남쪽 끝에서 바다와 만나다.

 뜻하지 않은 장소에서 뜻하지 않은 체험을 하는 것은 대개 원래의 계획이 어긋나서 빚어진 우연들이 합쳐진 결과일 때가 많다. 이번 프랑고카스텔로에서의 체험이 바로 그랬다. 원래 우리는 이곳에 3일 있기로 했고 그 기간 동안 사마리아 계곡과 페스토스에 갈 예정이었다. 차를 렌트한 다음 하루는 사마리아 계곡에 가고 또 하루는 미노아 문명의 두 번째 궁전이 있는 페스토스로 가려고 했지만 하니아에서 이곳까지 오는 동안 교통편이 너무 복잡하고 버스길이 목숨을 걸어야 할 만큼 험난하다는 것을 체험한 뒤인 데다가 지도로 찬찬히 보니 페스토스가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어서 렌트카로 거기까지 가는 것이 간단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보니 무언가 일이 잘못되고 있다는 느낌이 왔다. 렌트카 업체에서 렌트할 수 있는 차도 딱 한 종류만 남아있다는 것인데 우리가 몰아본 적이 없는 큰 차인데다가 거기로 가는 길이 왔던 길만큼 험하고 스릴넘치는? 길이라는 것은 가히 예상이 가능했다. 우리는 잠시 혼란스러운 상황을 앞에 두고 무언가 결단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눈앞에 펼쳐진 바다는 전혀 우리가 예상했던 바다가 아니었다. 그건 상상을 뛰어넘는 장관이었다. 이 바다가 리비안 씨라는 것, 유럽과 아프리카를 사이에 둔, 유럽의 끝에 있는 바다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엄청나게 거대하고 아름답고 광막하고 가슴을 막막하게 만드는 바다일 줄은 미처 몰랐던 나는 그냥 모든 계획을 밀쳐버리고 여기에서만 3일을 보내는 편이 훨씬 좋은 선택일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프랑고카스텔로에서 이렇게 막힘없이 뻥 뚫린 바다를 마주하리라고는 생각도 해보지 않았던 터라 나는 갑자기 예기치 않았던 선물을 받은 듯 충격을 받은 것처럼 가슴이 벅차올랐다. 이 바다는 앞으로 끝없이 달려 나가면 아프리카 대륙과 연결되는 그야말로 망망대해인 것이다. 사람들의 인적이 드물고 손길이 미치지 않았던 이 바닷가는 옛날 수억만 년 전의 태초의 모습과도 별로 다르지 않으리라. 나는 놀라움과 경탄과 감사한 마음이 섞여서 스스로도 뭐가 뭔지 모르는 혼란을 느끼면서 그저 내 마음이 시키는 대로 여기서 꼼짝 않고 바다만 바라보리라 작정했다.   

        

 예약을 해 놓았던 호텔은 바로 바닷가 앞에 있었고 거기서는 남쪽으로 난 창문 하나와 발코니로 통하는 문 양쪽에서 시리도록 아름다운 바다가 한 눈에 가득 들어왔다. 그 바다 색깔을 뭐라고 형용할 수 있으랴? 파랗다 푸르다 에메랄드 색깔이다 코발트 색깔이다... 짙은 잉크빛깔이다...   그 모든 형용이 필요 없었다. 그것은 수정같이 맑았다.  아, 나는 바다의 아름다움에 진정으로 매혹되었다. 지칠 때까지 그저 바다만 바라보고 싶었다.         


 이 지역은 교통 여건이 너무도 불편해서 찾아오는 것 자체가 쉽지 않다. 크레타 섬 북쪽과는 달리 남쪽 지방은 해안선이 절벽으로 이루어진 곳이 대부분이라고 한다. 크레타는 섬이라고 하기 에는 너무 크고 또 섬에는 어울리지 않을 듯한 높은 산맥들이 남쪽 지방에 대부분 몰려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크레타를 일러 섬이며 동시에 대륙이라고 부르나 보다. 비행기를 이용해서 올수 있는 공항은 하니아와 이라클리오에만 있고 이쪽으로 오려면 그 도시들로부터 2000m가 넘는 고산준령을 넘어와야 하기 때문이다. 버스를 타고 오는 길 내내 높은 산에 가까스로 낸 좁은 길들을 아슬아슬하게 넘어오면서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모른다. 그야말로 심장이 쫄깃해지는 느낌이었다. 나는 걱정을 한다고 해서 상황이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기에 애써 다른 생각으로 관심을 돌려보려고도 하고 잠을 청해보려고도 하였으나 그러면 그럴수록 버스가 커브 길을 돌 때마다 가슴이 오그라드는 느낌이었다. 옛날엔 사람들이 도대체 어떻게 이 지역을 통과했을까? 관광책자에 보니 옛날 크레타 사람들은 이 길들을 나귀를 타고 걸어서 지났다고 하며 아직도 산기슭 여러 군데에서 나귀길이 비틀비틀 좁다랗게 나있는 것이 보였다. 아. 그렇게 1시간 40분가량을 걸려 우리는 스파키온이라는 아주 작은 바닷가 마을에 도착했다. 거기서도 15분 정도 기다리니 그때서야 12인승의 미니버스가 앞 유리창에 프랑고카스텔로 라는 전광판을 달고 나타났다. 그 버스가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마치도 길을 잃은 어린애가 도움이 되어 줄 믿음직한 어른을 만난 기분이었다고 할까?  

       

 이쪽 남부 크레타에는 하얀 산(white mountain : 그리스 말로는 Lefka Ori )이라고 하는 2000m를 넘는 봉우리가 7개나 하늘을 뚫고 서 있는 산맥이 있다. 하얀 산이라는 이름은 일 년 중 대부분 동안 그 봉우리들이 하얀 눈으로 덮혀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서남 쪽 말고도 동남쪽 크레타에도 높은 산맥들이 있는데 그쪽에 있는 산들 중의 하나의 산인 Timios Stravos산이 크레타에서 제일 높은 산으로서 2456m이고 이곳 Lefka ori의 산맥 중에서는 파네스(Pahnes) 라는 산이 2454m로서 가장 높다. 그 산맥들이 대부분 남쪽 지방에 분포하고 있고 산의 높이도 1000m, 2000m를 넘는 높은 산이다 보니 크레타 섬의 남쪽 지방들이 도시로 번창하지 못하고 오지로 남을 수밖에 없는 것은 자연의 이치다. 그래서 이쪽 지방에는 사람들도 많이 살지 않고 교통도 아주 불편해서 북쪽의 도시들과는 하루 4번, 5번의 버스 편들로만 소통하고 있으니 이쪽의 자연이 사람들의 손때가 타지 않은 자연의 모습 그대로 오롯이 남은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인 것이다.   

        

 어찌어찌해서 이곳 프랑고카스텔로라는 곳에 와보니 정말로 궁벽한 시골 모습에 다시 한 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뒤에는 높은 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고 산맥의 끝자락에 자그마하게 자리 잡은 바닷가 마을은 쓸쓸하고 황량했다. 포장되지 않은 도로가 대부분이었고 드문드문 서 있는 마을의 집들과 길가에 아무렇게나 자라고 있는 바싹 마른 잡초들이 바람 부는 바닷가 마을의 주된 풍경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 마을의 이름이 유래한 프랑고카스텔라 성 또한 오래된 성답게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풍상에 지친 모습이고 바닷가 끝 쪽에 서 있어서 더욱 쓸쓸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크레타 섬의 남쪽 끝. 유럽의 끝에서 마치도 세상의 끝에 와 있는 듯한 아찔한 기분을 느꼈다고 한다면 내가 너무 예민한 걸까? 호텔 안에서야 물도 있고 전기도 있고 텔레비전에 냉장고, 에어콘 등 있을 것이 다 있고 걸어서 왼편으로 2분 정도만 걸어가면 맛있는 그리스 요리를 맛볼수 있는 식당이 있고 아무 불편할 것이 없었지만 해안가 언덕 끝에 서서 바다를 바라보며 서 있으면 어딘가 아주 먼 곳에 와 있는 듯한 느낌, 세상의 끝, 문명세계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와 있는 느낌이 아주 강하게 밀려왔다.      

     

 거대함과 광막함과 광대무변의 끝에서 느껴지는 어떤 고독함 같은 것이랄까 나는 계속 알 수 없는 기분에 휩싸이면서 이곳에서 무한한 하늘과 무한한 바다와 불어오는 세찬 바람과 마주하며 자연 앞에서 우리는 그저 아주 작은 존재임을 느끼게 되었다.  이곳에서 바람은 일상이다. 하루 종일, 밤이나 낮이나 씨잉씨잉 소리를 내며 바람이 불어댔다. 모자는 바람에 날려가기 일쑤이고 길을 걷다 보면 뿌연 흙먼지를 뒤집어쓰는 일도 다반사이다. 올리브 나뭇가지들은 잠시도 가만있지 못하고 바람결에 몸을 흔들어댄다. 바다에서도 끊임없이 바람이 일어 잔물결이 햇볕 속에 하얗게 빛나는 것을 볼 수 있고 그것은 멀리서 보면 장관을 이룬다. 수면 위에서 하얀 정령들이 끊임없이 무리를 지어 춤을 추는 것 같다.  

            

 밤이 되자 바다는 다시금 나를 가슴 설레게 했다. 이곳 바다에는 그 흔한 고깃배도 한척 보이지 않고 지나가는 여객선들도 눈에 띄지 않는다. 바다가 불빛 하나 없이 온전하게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잠기는 것을 나는 본적이 없었다. 바다 위에 빌로드 같은 까만 어둠이 내리자 하늘에 반짝이는 별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도시와는 달리 검은 하늘에는 무수한 별들이 돋아나기 시작했고 그 별들의 영롱한 빛을 내가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한 번도 본적이 없는 이상한 모양새의 별자리들이 바다의 수면 가까이에 떠있는 모습도 나로서는 처음 보는 광경이었고 그것들은 저 멀리 과거 어딘가로 나를 데리고 가는 듯 했다. 별들이 이렇게 수평선 가까이에 뜨다니 그것도 특이하게 아름다웠고 알 수 없이 나를 몽롱하게 현실감각을 잊게 했다. 오늘 밤은 잠을 잘 수 없으리라고 예감하면서 나는 절해고도에 와 있는 듯한 고독함 속에서 별이 빛나는 밤하늘을 오래도록 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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