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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live Feb 17. 2022

하니아

문명의 발상지 옆에 피어난 작은 항구.

 이라클리오에서 하니아로 가는 길은 온통 협죽도로 뒤덮혀 있다. 양쪽 길 가득히 흰색, 연분홍색, 진분홍색, 빨간색의 협죽도가 피어있는 광경은 축제로의 초대 같은 인상을 준다. 꽃들이 환하게, 아름답게, 아낌없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모습으로 인해 그 꽃들을 보고 있는 나도 모든 복잡한 생각은 머릿속에서 사라진 채 즐겁고 행복해지는 것 같았다. 세상에, 꽃이 없는 세상은 도대체 어떤 모습일까? 이라클리오와 하니아가 꽤 떨어져있기 때문에(120km) 택시값을 아끼겠다고 하니아로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버스정류장까지 가는 동안 큰 짐 가방을 끌고 더위 속에 걸어가느라 조금 지쳤던 나는 꽃들을 보며 다시 원기를 회복했다. 협죽도는 우리나라에서도 전라도 지방이나 제주도에서 많이 볼 수 있는 꽃이다. 관상용으로 가로수로 많이 심어져 있는 그 꽃들을 보며 참 아름답다고 감탄한 적이 있다. 꽃들의 색깔이 선명하고 아름답고 꽃송이가 탐스러운 데다가 초록빛 잎사귀하고 아주 잘 어울려서 나도 언젠가 정원을 갖게 되면 꼭 심어보리라고 생각했던 꽃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그 나무를 주거지 가까이에 심는 것을 아주 금기시한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 꽃과 잎사귀, 나무줄기에 모두 독성이 강한 물질이 함유되어 있다는 것이 이유였지만 이곳 그리스에서는 그런 것쯤이야 뭐가 대수라고? 하는 듯이 그리스 사람들에게 매우 사랑받는 꽃인 것 같고 건조하고 비가 적은 이 지방 기후에도 아주 잘 맞아서 어딜 가나 여름의 그리스에서는 단연코 눈에 띄는 꽃이다.    

   

 이곳 하니아에서는 언제 지어졌는지 알 수 없는 오래된 건물들과 반짝반짝하게 새로 리노베이션된 건물들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붙어 서 있다. 너무나 심하게 무너져 내려 골조가 앙상하게 드러나고 회칠이 벗겨져서 속에 있는 벽돌들이 밖에 드러나 있고 뒤틀린 문틀과 창문틀이 아슬아슬하게 느껴지는 집들도 시내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우리나라 같으면 그런 건물들을 보기 싫다며 당장 철거하고 눈앞에서 치워버리느라 열심이겠지만 이곳에서는 그런 집들을 그냥 놔두고 있다. 우리가 보기엔 얼핏 이해하기 어려운 이러한 태도에는 그들만의 내밀한 철학이 숨겨져 있지 않을까 짐작해 본다. 그 집들은  보기 싫고 추레하고 남루하다는 느낌 보다는 갈피갈피 숨어있던 수백 년 전의 사람들의 혼이 느껴지는 것 같아서 나는 더 정겹고 좋았다. 그런 집들을 재빨리 우리 시야에서 없애 버리고 그 자리에 새로운 집들을 마구 짓는 것 보다는 어느 정도 용인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그 집들을 그대로 남겨두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나의 생각은 어디까지나 내 개인적인 것이다. 과거의 흔적을 완전히 없애버리지는 않을 정도로만 살만한 공간으로 수리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하니아 거리 곳곳에 얌전히 숨어 있는 그런 낡은 집들은 그것 자체로서 하니아의 역사가 되고 오랜 세월의 흔적이 느껴질수록 특별한 의미로 다가오지 않을까 나는 나름대로 내 생각에 정당성을 부여하고자 애쓴다. 나에게는 세계 어느 곳에서든 과거의 자취와 흔적이 사라져 버리는 것이 못 견디게 안타깝기 때문이다. 허물어진 돌담, 부서져 내린 벽들, 깨진 창문들 속에 우리가 알지 못하는 숱한 이야기들이 숨겨져 있을지도 모르고 그것들을 삽시간에 없애 버릴 경우 우리는 과거가 없는 현재만의 공간에 덩그러니 남겨져서 길 잃은 고아들처럼 마음속의 안식처 없이 방황하지 않을까 하는 왠지 모를 조바심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그건 추한 것이 아니고 정이 가는 풍경이다. 과거의 낡은 것을 어떻게라도 부여잡고 있어야만 현재도 또한 의미가 있어지고 미래도 기대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그리스에서는 낡고 무너져내린 집들도 그 자체로서 예술품처럼 느껴진다고 말한다면 내가 뭔가 이상한 사람일까? 집 없는 길고양이가 자기 집인 듯 그 안에서 어슬렁거리다가 행인들이 그 앞을 지나갈 때면 튀어나와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주인 행세하듯 폼을 잡는 것도 재미있었다.


 하니아의 올드 하버에서는 하니아의 정수를 오롯이 맛볼 수 있다. 지나치지 않을 만큼 딱 적당한 정도 크기의 굽은 만을 따라서 숱한 식당들이 문을 열고 있고 낮이나 밤이나 색다른 풍경으로 관광객들에게 손짓을 한다. 그런 식당 중 아무 곳이나 들어가서 그리스 전통 음식을 시켜 먹으면 눈앞에 펼쳐진 푸른 바다와 파란 하늘, 불어오는 바람과 함께 최고의 맛을 즐길 수 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그릭 샐러드, 기로스, 혹은 램찹, 포크 커틀릿, 또는 해산물 전문 음식점의 새우구이, 오징어 튀김, 구운 낙지등도 그리스 어디에서나 맛볼 수 있는 음식이지만 크레타 섬 사람들의 자부심이 담긴 크레탄 샐러드, 푹 삶은 양고기, 구운 양념 돼지갈비 등등의 음식들은 멀리서 온 관광객들을 훌륭한 맛으로 만족시키기에 충분하다.    

  

  하니아에서는 어느 식당을 들어가서 어떤 음식을 시켜 먹어도 다 맛있었다. 대체로 그리스 음식이 우리 입맛에 맞는 편인데다가 하니아에서만큼은 해산물 위주로 먹겠다고 작심한 터라 싱싱한 해산물을 주재료로 한 음식들을 먹었는데 그 선택은 역시 탁월한 것이었다. 한번은 저녁 때 하니아 항구에서 제일 손님들이 많고 좀 화려해 보이는 식당에 들어가서 생선요리를 시켰다. 비교적 비싼 메뉴였기 때문에 어떤 맛일지 매우 궁금했는데 이 요리만큼은 웨이터가 와서 큰 접시에 있는 생선의 가시를 직접 발라서 내어 주는 것이었다. 담백하면서 비린내도 전혀 나지 않고 맛이 기가 막혔다. 그리고 가시와 뼈를 바르는 솜씨도 매우 정교하고 세련되고 절도가 있어서 그것 자체를 구경하는 재미도 있었다. 레스토랑 안의 유쾌하고 즐겁고 들뜬 듯한 분위기와 어울려 잊지 못할 맛을 선사해준 그날 저녁 식사를 잊을 수 없다.          


 하니아의 항구는 바다를 둘러싸듯 쌓은 성벽과 등대, 석축들로 멋있는 풍경을 선사한다. 크레타 섬이 수천 년 동안 외세의 침략을 많이 받은 탓에 크레타 섬의 항구도시들에는 어디에나 어김없이 요새들이 축조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이라클리오의 베네치안 요새가 가장 유명하고 레팀노의 시타델도 유명하지만 하니아의 이 성벽도 그 두께나 견고함이 여타의 요새들에 뒤지지 않고 아름다움에 있어서도 전혀 손색이 없다. 항구에서 바라볼 때 일자로 길게 이어져 있고 그 끝에는 예쁜 등대가 서있기 때문에 미적인 면에서만 볼 때는 어쩌면 가장 아름다울 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요새들의 공통점이라면 다 베네치안 통치 시대에 지어졌다는 것이다. 낙소스 섬이나 로도스 섬, 코스 섬에도 그러한 베네치안 요새들이 존재하지만 크레타 섬만 한정해서 말한다면 다른 섬들과는 달리 이 크레타섬의 요새들이 유별스럽도록 견고하고 크게 축조되었다는 점이다. 이라클리오에 있는 역사박물관에 전시된 유물을 보면서 느낀 것이지만 외세들에 의한 크레타 섬의  수난사도 가히 세계에서 손꼽힐 정도로 복잡다단하고 오랜 시간 이어져 온 것이라서 식민지 역사를 갖고 있는 한국인의 한 사람으로서 동병상련의 아픔이 느껴져 왔다. 서기 1세기에 동로마제국에 복속된 이래로 그리스는 오랜 동안의 비잔틴 시대, 아랍통치 시대, 제2의 비잔틴 시대를 거쳐 1204년부터 1690년까지 베네치안 공국의 지배를 받게 된다. 그 이후엔 다시 오토만 제국의 지배를 450년간 받다가 1913년에 와서야 비로소 그리스와 통합하여 그리스라는 나라의 일부가 되기에 이르렀으니 실로 오랜 세월 동안의 식빈지배를 받은 나라로서 그 오랜 기간 동안 민족적 정체성을 상실하지 않고 이어져 내려온 것이 오히려 신기할 정도였다. 도대체 가능할 것 같지 않은 일이 그리스에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리스 사람들의 민족적 정체성과 자부심은 존경받아 마땅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우리는 항구 바로 앞에 있는, 항구의 전체 모습을 조망할 수 있는 호텔에서 묵었는데 매일 저녁때가 되면 하니아의 항구와 등대위로 노랗고 붉고 보랏빛 자줏빛 노을이 퍼져나가고 그때쯤이면 하니아에 사는 사람들이 전부 오페라극장에 가는 사람들처럼 성장을 하고 항구로 모여들어서 항구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배회하고 또 더러는 그곳에 있는 식당에 들어가서 저녁을 먹거나 길가에 있는 벤치 위에 앉아서 대화를 즐기거나 하는 모습을 보고 적잖게 놀랐다. 쌍쌍을 이룬 젊은 사람들, 늙은 사람들, 가족이나 친구들과 서 넛이서 혹은 대 여섯의 사람들이 거리를 가득 메우면서 걸어다니는 모습은 이곳 하니아만의 진풍경이라고 아니할 수 없었다. 그들의 얼굴은 저물어가는 하루를 이곳에서 이렇게 사랑하는 사람들과 보낼 수 있다는 그것 자체만으로 행복에 젖어든 것처럼 보였다. 낮에는 아무리 덥고 힘들고 지쳤을지라도 그리스의 저녁은 낮 동안의 그런 수고를 모두 보상해주듯 더없이 시원하게 변했고 시원스레 불어오는 바람이 쾌적함을 더해 주었다. 그래서 그리스 사람들은 저녁이 되어서야 비로소 생기를 띄고 살아있음을 즐기는 것 같았다. 그것이 그리스 사람들, 특히 하니아 사람들의 생활방식인 듯했으며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 그들의 낙천적이고 매사 너그럽고 우호적인 태도가 매우 부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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