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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live Feb 18. 2022

이라클리오

문명의 발상지를 찾아가는 길

 이라클리오에서 묵은 호텔은 오래된 성당 옆에 자리하고 있었다. 아기오스 미나스 성당이 그 이름이다. 그 성당은 이라클리오 시내에서 티투스 성당 다음으로 오래되고 크며 지역사회에서 커다란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것 같았다. 성당 정문 양 옆에는 수 십대에 걸쳐 그 성당을 이끌어왔을, 매우 어렵고 중요한 일들을 해왔을 신부님들의 흉상이 세워져 있었다. 성당내부는 여느 그리스 정교회 교회들이 흔히 그렇듯 각종 프레스코화와 이콘들, 정교하게 조각된 촛대들과 샹들리에등으로 장식되어 있었는데 다른 성당들에 비해서 꽤 화려한 편이었고 호화스럽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특히나 신도들이 성당에 들어서자마자 자신들의 기도와 소망을 담아 피워올리게 되는 촛대 제단은 매우 오랜 시간 거기서 사람들의 희로애락을 지켜본 듯 무수한 세월의 흔적이 쌓여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아주 잠깐 성당에 들어가 기도를 드리고 초에 불을 붙여서 촛대 위에 꽂고 성당 안을 둘러보고 있었는데 그 사이에도 그곳 사람들이 끊임없이 들어와서 기도하고 촛불을 켜는 모습이 이어지고 있었다.           


 성당 옆에는 사각형으로 된 큰 광장이 있었다. 나는 그 광장 오른편의 호텔의 2층에 머무르고 있었기 때문에 광장의 모습을 매우 가까이에서 내려다 볼 수 있었다. 그 광장 구석 한편에는 어마어마하게 큰 나무가 세 그루 있었다.  도대체 나무의 나이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나게 큰 그 나무들은 아름드리 커다란 밑둥을 자랑하고 있었고 사방으로 가지를 뻗쳐 무성한 잎사귀를 드리우고 있었는데 자연스레 그 나무 아래에는 커다란 그늘이 드리워져서 지붕이 필요 없을 정도로 사람들의 휴식처가 되고 있었다. 저렇게 큰 나무를 내가 예전에 본적이나 있을까싶게 그 나무들은 나무라고 하기 에는 너무나 커서 마치도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낸 커다란 그늘막 같았다. 근처의 카페들은 그 그늘을 이용해서 그 아래에 테이블과 의자들을 내어놓아 네 개의 카페들이 영업을 하고 있었다. 점심때부터 저녁 늦게까지 사람들이 카페에 앉아서 담소를 나누며 음식과 음료를 먹고 마시며 시간을 보내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관광객인지 동네 사람들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젊은 부모들이 데리고 온 아이들과 동네 아이들이 광장을 가로지르며 뛰어 놀고 마음껏 소리 지르며 노는 풍경은 저절로 미소를 머금게 만들었다. 그 소리는 거의 밤 11시가 가까워 올 때까지 멈출 줄을 몰랐지만 내게는 그 소리가 시끄럽다거나 거슬린다거나 하지 않았고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으로 너무 자연스럽게 느껴져 내가 나이를 먹긴 먹었나 보다 하고 약간은 놀라웠다.      


 그 다음날 아침에 일찍 눈을 뜬 나는 커튼을 젖히고 창문을 열어 발코니에 나가서 광장을 내려다보았는데 광장은 어젯밤의 소란스럽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적막감에 휩싸여 있었고 교회 건물들에 둘러싸인 채 희뿌연 여명 속에서 가로등의 부연 빛이 간밤에 내린 비에 젖어 번들거리는 광장을 조용히 비추고 있을 뿐이었다. 아침에 본 광장의 모습은 비로소 자신의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고 그것은 중세시대와 현대가 한 지점에서 만난 듯 묘한 모습이어서 아직 잠에서 덜 깬 내게 시대를 가늠하기 어려운 느낌을 주었다.    

  

 이라클리오는 말이 필요 없는 도시이다. 크레타에서 가장 큰 도시이며 주도(州都)이고 여름이면 수많은 관광객들이 몰려와서 이곳의 주인이 이 도시의 주민들인지 관광객들인지 헷갈리게 만든다. 무엇보다도 이 섬의 오랜 역사와 문명적 배경을 생각해 볼 때 그리스의 문화와 역사에 관심이 있다면 크레타섬의 이라클리오는 꼭 한번쯤은 들러야만 하는 곳이다. 특별히 내가 이곳에 오고 싶었던 이유는 고고학박물관의 유물들과 크노소스 궁전을 꼭 보고야 말겠다는 이유 말고도 이곳이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고향이라는 사실이었다. 나는 수년 전(2013년)에 아테네의 고고학박물관에서 그리스 문명의 유물들을 보고 혼이 나가 버려서 그 후 시간과 돈이 허락할 때마다 다른 곳들은 다 제쳐두고 계속 그리스로만 여행을 다녔다. 처음에 크레타에 왔을 때는 여정 상의 이유로 이라클리오만을 목표로 2박만 하고 돌아갔기 때문에 크레타에 대해서 미진한 점이 많았다. 그래서 요번에는 이라클리오 하니아, 렘노스, 프랑고카스텔로, 페스토스 등을 조금 더 공부하기 위해 다시 크레타를 찾아온 것이다. 사실 내가 왜 그리 그리스에 집착하는지 나조차도 잘 모르겠다. 내가 이 나이에 새삼스럽게 고고학이나 미술사를 공부해서 박사학위를 딸 것도 아닌 것을. 하여튼 나는 고대의 그리스에 매료되고 말았다.      

 이라클리오에 오는 방법은 배편과 항공편이 있다. 나는 처음에 이곳에 올 때는 아테네의 피레우스 항구에서 출발해서 하룻밤을 배안에서 자는 크루즈선을 이용했고 이번에는 비행기로 왔다. 전에 왔을 때보다도 이라클리오는 관광객들로 인한 혼잡함이 더해진 듯 했다. 공항에서 택시를 타고 호텔로 이동하는 내내 시내가 꽉꽉 막히자 택시 운전자는 툴툴툴 불평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도무지 운전을 못하겠다는 거였다. 내가 보기에도 날은 더운 데다 공항 시설도 수용량을 초과한 듯 비좁아 터질 정도였고 거리는 사람들과 차들로 복잡하고 뙤약볕 아래 먼지만 풀풀 날리는 형국이었으니 짜증이 솟구칠 만 했다. 우리는 “그렇군요 사람도 차도 너무 많네요... ” 등등 맞장구를 쳐주며 여름날 그리스 도시의 짜증스러움에 대하여 적대적인 한 패가 되었다.  

   

 이라클리오에서 관광객들이 몰리는 곳은 사실 아주 작은 구역이다. 호텔들과 개인집들이 몰려있는 항구 안쪽의 작은 동네에서 걸어서 한 1km 정도는 관광객들을 유혹하는 상점들과 기념품을 파는 가게들, 레스토랑들로 채워져 있고 어느 정도 완만한 경사면을 따라 올라가면 그 길이 끝난다. 그리고는 길이 다시 기울어져서 아래로 채 1km가 안되는 길을 따라 걷다보면 항구가 보이고 그 쪽에는 주로 레스토랑들이 몰려있다. 조금 더 내려가서 항구 쪽으로 다가가면 그 유명한 베네치안 요새가 보인다. 이 요새는 겉으로 봐도 아름다운 모습이지만 안에 들어가 보면 더욱 놀라게 된다. 물샐 틈 없이 치밀하게 설계된 요새의 견고함과 편리성, 그 못지않게 아름다운 내부 구조가 이 곳이 요새인지 궁전인지 아리송하게 만든다. 그리고 요새의 벽들이 얼마나 두꺼웠던지 벽의 두께가 1m이상 되어 보였다. 지하에 내려가면 창고가 나오는데 거기엔 아직도 수백 개의 고대와 중세시대의 항아리들이 차곡차곡 쌓여있어서 그 당시의 이 지역의 중개무역의 중요성을 알 수 있었다. 그 항아리들이 특별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보통 1m가 넘는 길이에 홀쭉하고 아래쪽으로 갈수록 더 뾰족해지는 모양이었는데 항아리의 주둥이 쪽에는 손잡이가 두 개씩 달려있어서 끈으로 연결해서 운반하기 좋게 하기 위함인 것 같았다. 이번이 두 번째 방문이었기에 나는 이라클리오 중심에 있는 중요 관광지들을 편안한 마음으로 여유있게 돌아다니며 카페에 앉아서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가게에 들어가 기념품들을 고르느라 시간을 뺏기기도 하며 도착 첫 날을 느긋하게 보냈다. 그 다음 날엔 이라클리오 고고학 박물관에 가서 다리가 아프도록 돌아다녀야 하므로 일찌감치 호텔로 들어가 쉬어야 했다.      


 이라클리오 고고학 박물관에 있는 유물들은 크노소스 궁전에서 출토된 미노아 문명의 유물들이 대부분이다. 2013년에 그리스의 아테네를 처음 방문했을 때 그곳의 고고학 박물관에서 미케네 문명을 보고 내 가슴은 온통 놀라움과 경악과 찬탄으로 두근대며 마음을 진정시킬 수 없었다. 그때부터 나는 무엇에라도 씌인 듯 그리스에 탐닉했다. 그런데 이 박물관의 유물들은 상상 그 이상이었다. 미케네 문명 보다도 500년 전 의 유물들인데도 그 정교함과 섬세함, 예술적 가치는 오히려 그것을 능가하는 수준이었다. 예전에 왔을 때는 1층에 있는 유물들만 보는 데에도 시간이 다 가버렸기 때문에 2층에 있는 유물들은 못 보았었다. 이번에는 커다란 조상들과 도자기와 항아리들, 토기로 만들어진 각종 생활용품들이 전시되어 있는 1층은 쓱 둘러보고 2층에 올라가서 유물들을 세세히 살펴보았다. 2층에 있는 유물들은 크노소스 궁전에서 떼어온 그 유명한 프레스코화들과 테라코타 미니어처들과 금으로 된 장신구와 인장들과 주화들, 작은 도자기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것들이 장장 4000년~3000년 전의 유물들이라니!!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정교하고 완벽한 그 유물들을 보면 현대의 걸작들이라는 것들도 그저 그런 수준밖에 안 되는 것들에 불과하다고 현대의 작품들을 오히려 폄훼하게 된다. 그만큼 그 유물들의 완벽함과 예술성 앞에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것들의 순수하고 깊은 아름다움들을 내가 어떤 언어로 표현해 낼 수 있을까? 그건 그냥 불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현기증이 날 정도로 아름다운 그것들에 넋이 나가버렸다고 해야 옳다. 현대의 금 세공사들이 온갖 기계와 도구들로 그것들을 재현시켜 낸다고 해도 원래의 미노아 문명 유물들에는 절대로 미치지 못할 것이라고 나는 감히 단언한다.           

 이라클리오 박물관에서 나온 나는 그 근처 기념품 가게에서 박물관에서 보았던 유물들의 모조품이라도 사려고 혈안?이 되었다. 드디어 좀 비싸긴 했지만 토기로 구워진 백합왕자와 창을 들고 서있는 레오니다스 청동상과 제물이든 항아리를 손에 받쳐 든 청년상을 들고 의기양양하게 가게를 나왔다. 합해서 100유로나 했으니 나로서는 기념품 용도로는 꽤 거금을 쓴 셈이다. 예전에 여기 왔을 때 망설이다 사들고 가지 못한 것들을 후회 없이 다 산 것이다. 지금도 그것들은 내 유리장식장 안에서 자태를 뽐내고 있고 나는 그것들을 볼 때마다 살짝 기분이 좋아지곤 한다.          

  

 기념품까지 사고 아이쇼핑도 하며 시장골목을 돌아다니면서 그날의 할 일을 마치고 나자 미친 듯한 배고픔이 몰려왔다. 우리는 호텔 근처까지 가서 좀 느긋한 마음으로 저녁을 먹는 것이 좋겠다 생각하고 호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우리가 간 곳은 호텔과 멀지않은 곳에 있는 그리스 식당이었다. 나는 간단히 먹을 수 있는 기로스를 시키고 남편은 Pepper Steak를 시켰다. 양도 푸짐했고 맛도 좋아 흡족한 저녁식사였다. 우리가 웬만큼 저녁식사를 마치자 아까는 보이지 않았던 식당주인이 와서 디저트와 라키(그리스식 소주) 두 잔을 서비스로 주며 어디에서 왔느냐고 물었다 우리가 코리아라고 대답하자 그럴 줄 알았다고 하며 우리 앞에 의자를 끌어당겨 앉더니 그때부터 그리스가 어떻고 경제가 어떻고 크레타 사정이 어떻고 하며 끝도 없는 수다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리스가 모라토리엄의 위기를 넘긴 후 노인층들의 형편이 많이 어려워졌으며 연금은 반으로 줄어든 반면 물가는 자꾸 올라 그리스 사람들 모두가 고통을 당하고 있다는 이야기, 그래도 아테네에 비하면 섬 지역들은 경제가 웬만큼 돌아가는 편이어서 실업률이 도시보다 훨씬 낮다는 이야기, 젊은 사람들은 그리스에 희망을 걸지 못하고 외국으로 나갈 기회만 엿본다는 이야기등..  어찌 보면 푸념에 가까운 이야기들이었는데 그만큼 그리스 경제 사정이 좋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키가 크고 40대 중반~50대 초반 쯤 되어 보이는 그는 매우 유쾌한 사람인 듯 했으며 그러는 사이 우리가 라키 두 잔을 다 마시자 또 두 잔을 내어오고 자기도 연거푸 라키를 마셔댔다. 처음에는 그가 우리에게 베푸는 호의라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자기가 술을 마시고 싶은데 누군가 앞에서 자기 말을 들어줄 사람이 필요해서 그렇게 우리를 붙잡고 앉아 이야기를 하며 술을 마셔대는 것이 아닌가 싶은 의아심마저 들었다. 홀짝홀짝하며 그가 마신 술은 한 열 잔은 되는 것 같았고 저렇게 술을 좋아하다 나중에 그가 알콜 중독자가 되는 것 아닌가 하는 걱정도 슬며시 피어오르게 만들었던 재미있는 사람이었다. 어쨌거나 여행 중에 그렇게 호의와 관심을 베풀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고마운 일이다. 그러는 사이 밤은 깊어졌고 내일 또 여행 스케줄을 이어가려면 이제는 일어나야겠다고 말하며 우리는 그와 작별하고 호텔로 돌아갔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무덤은 시내 외곽 쪽에 세워진 성곽 위에 자리하고 있다. 그리스 사람들은 동양에서 온 사람들이 이라클리오에 와서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무덤에 꼭 찾아가는 것을 보고 이상하게 여긴다고 한다. 카잔차키스가 너희 나라에서 그렇게 인기가 높은 작가냐? 뭐가 그렇게 마음에 드나? 그가 쓴 책 중에서 무슨 책을 읽었나 등등 신기해서 이것저것 물어본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나도 그 중의 한 사람인 것 같다. 나도 여기에 와서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무덤을 보고 가지 않으면 두고두고 후회할 것만 같아서 더위를 무릅쓰고 먼 길을 걸어 무덤까지 성곽길을 올랐다. 밝은 태양빛 아래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나무 십자가를 앞에 세워두고 누워 있었다. 묘비명은 너무 유명해서 웬만한 사람은 다 알 것이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가 그것인데 처음 이것을 책에서 읽었을 때 나는 무릎을 탁 치며 어쩜 이렇게 멋있을수가!! 하며 약간 흥분까지 했었던 것을 기억한다. 맞다. 이 묘비명은 간결하면서도 핵심을 찌르고 있어서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김 빼는 이야기를 하자면 이 묘비명은 우리가 죽은 다음 어쩔 수 없이 도달하게 되는 그런 상태를 말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죽으면 아무것도 바랄 수 없고 두려워 할 필요도 없고 그야말로 자유의 상태가 된다. 우리가 다 알고 있지만 말하지 않았던 이야기를 이렇게 명료하게 문장으로 남기니 갑자기 멋있게 생각되는 지도 모른다. 묘비명에 이렇게 쓰니 정말로 멋있는 명제가 되어 우리 가슴을 저 깊은 곳까지 두드려대는 것 같다. 역시 문학가가 표현하는 것에는 멋이 있고 핵심이 있다. respect!! 그런데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런 종류의 장난이 아니다. 내가 감동을 받았던 책은 <영혼의 자서전>이었다. 그 책에서 카잔차키스는 일회성의 삶을 살아가는 인간이지만 진실로 성실하게 자기 영혼을 돌아보고 성찰하고 노력하며 자신뿐만 아니라 가족과 조국의 문제를 탐구해 나간다. 나는 거기서 보였던 그의 영적이고 구도자적 자세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나와 같은 평범한 인간이 그를 따라갈 수는 없어도 그가 일생동안 견지했던 그 자세만큼은 항상 마음에 새겨두고 배우며 쫓아가려 노력할 수는 있겠다는 생각이 내가 그를 그토록 사랑하게 된 이유이다.                                                                                     (2019.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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