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 마음에 품은 투정도 기도가 되어
넷째 아이를 품으며 하나님의 선물임을 다시 고백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의 발걸음은 또 다른 선택의 자리 앞에 서게 되었다.
부산으로 내려온 지 1년이 지나고서야, 휴직계를 최대 2년밖에 낼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원래는 신부산교회에서 더 훈련을 받은 뒤 떠나고 싶었지만, 그러려면 선교훈련을 다시 받아야 했다.
기도하며 고민한 끝에 우리는 2024년에 선교지로 떠나기로 결정했다.
그다음 고민은 선교지를 어디로 정해야 할지였다.
양가 부모님께서 모두 선교사님이셨기에, 두 나라 가운데 한 곳을 선택해야겠다고 생각하며 기도했다.
선교사 자녀가 자신이 자란 나라로 돌아가 사역하는 것은 여러모로 유익하다.
문화와 언어에 적응하는 시간이 줄어들 뿐 아니라, 부모님 세대에서 닦아놓은 토대를 이어가며 더 발전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혹시 하나님께서 새로운 땅으로 보내신다면 그곳으로도 갈 수 있다는 마음을 열어두고 기도했다.
그러던 중, 100년 전 한국에 오셨던 선교사님들의 자녀들은 어떻게 했는지가 궁금해져 찾아보았다.
그 결과, 2세대에서 5세대까지 이어지며 한국을 섬겼고, 결국 한국이 외국 선교사의 도움이 필요 없는 나라가 될 때까지 헌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렇게 후보는 자연스럽게 두 나라로 좁혀졌다.
우크라이나와 캄보디아.
그때 기도 중에 “남편의 의견에 순종하라”는 마음을 주셨다. 그래서 남편에게 기도해 보고 알려달라고 부탁했고, 며칠 뒤 남편은 “캄보디아로 가자”라고 말했다.
이어서 그는 그런 선택을 한 이유를 말해주었다.
우크라이나는 전쟁 중이라 새로운 선교사가 들어가기 쉽지 않았다.
반면, 나는 10년간 한국에 머무는 동안 캄보디아어를 많이 잊어버렸지만 여전히 언어와 문화에 익숙했다.
게다가 아이들이 아직 어리고, 넷째가 태어난 지 50일 만에 출국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한국에서 받아야 할 수술과 진료 일정도 남아 있었기에, 여러모로 2대 선교사로서 사역을 이어갈 수 있는 곳은 캄보디아가 가장 적합했다.
우리는 파송교회에 뜻을 전했고,
교회도 캄보디아로 파송하기로 결정했다.
20살 어느 가을,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기간 중
수요일 저녁 ‘선교의 밤’ 집회에서
간증자로 서게 되었다.
그날 나눴던 이야기는 얼마 전에 완결한
‘나의 또 다른 이름 MK’의 내용이었다.
그 자리에 계셨던 한 목사님께서는
‘간증이야 다 비슷하지’ 하는 마음으로
듣고 계셨다고 한다.
그런데 간증 중,
하나님께서 목사님의 마음에 감동을 주셨다.
“이 아이의 후원자가 되어라.”
집회가 끝나자마자 목사님께서는 나에게 달려오셔서 연락처를 건네주셨고,
그 만남이 한국 아버지와의 인연의 시작이 되었다.
성씨가 같아 더 인상적이었는데,
목사님께서도 ‘천’ 씨였다.
며칠 뒤, 목사님께서는 캄보디아에 계신 아버지께 이메일을 보내 이렇게 전하셨다고 한다.
“한국에 있는 동안,
제가 이 아이의 한국 아버지가 되겠습니다.”
그때부터 목사님께서는 매 학기 기숙사 비용을 도와주시고,
계절이 바뀔 때마다 필요한 옷도 챙겨주셨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기억에 남는 것은,
나를 진심으로 딸로서 대해주셨다는 점이다.
당시 나는 누군가와 깊은 유대감을 맺는 것이
익숙하지 않아 감사 표현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고,
막내딸처럼 다정하게 구는 것도 어려웠다.
부탁하는 것도 잘할 줄 몰랐다.
그래서인지 목사님께서는
편하게 딸처럼 굴지 못하는 나의 모습에
안타까워하시기도 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학 4년 내내 그리고 지금까지도
목사님께서는 나를 ‘막내딸’로,
나는 그분을 ‘한국 아버지’로 마음에 품고 있다.
그렇게 한국에서의 따뜻한 10년을 보내고
캄보디아로 다시 떠나기 전,
문득 오래전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중학생 나이로 대안학교에 다니던 시절,
학교의 커리큘럼은 6주간 기숙사 생활 후
1주일은 각자의 집에서 쉬고 돌아오는 방식이었다.
그때 나는 한국에 부모님이 안 계셔서,
친구들 집을 전전하며 머물곤 했다.
어느 방학이 지나고,
한 친구가 기숙사로 돌아오며 말했다.
“나 이번에 아빠가 새 가방 사줬어!”
그동안 웬만해선 타인을 부러워한 적이 없었던 내가
그날 처음으로 ‘부럽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조용히,
처음으로 하나님께 투정 부리는 말을 마음에 담았다.
“하나님… 나도 아빠가 한국에 계셔서
가방이나 옷을 사줄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럴 수 없는 거 알지만요...”
이런 말을 해봤자 나만 더 속상해지기 때문에
그동안은 좋은 것만 보고 좋은 일만 생각했는데
그날은 무슨 일인지 그런 기도를 드리고 싶은 날이었다.
나도 한국에 아버지가 있으면 좋겠다는 기도.
한국에서의 시간을 돌아보던 중,
사춘기 시절 투정하듯 기도했던 이 모습이 떠올랐던 것이다.
그동안 정말 하나님께서 나에게
한국 아버지를 허락하셨던 것이다!
이 사실을 깨닫자마자 감격의 눈물이 쏟아졌다.
돌이켜보면,
그 시절의 나는 참 두려웠고 외로웠다.
그런데 그 외롭고 막막했던 내 곁에
늘 하나님께서 계셨고
나의 작은 투정까지도 들으셨으며
정말 혼자가 된 20살의 어느 날,
진짜‘한국 아버지’를 보내주셨다.
나는 한국 아버지 덕분에
20대 내내 부족함이 없이 따뜻했다.
가장 방황하며 연약했던 그 시간,
하나님께서는 한국 아버지를 통해
하나님 아버지께서 내 곁에 늘 함께하심을
더 깊이 알게 하셨다.
하나님의 사랑이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누군가의 따뜻한 말, 매 학기 입금된 기숙사비,
성년의 날 때 주신 금반지, 교생 실습을 위해 맞춰주신 정장, 그리고 내가 말로 표현하지 못한 서툰 마음까지도 품어주는 한 사람의 헌신을 통해 구체적으로 다가왔다.
그렇게 나는 더 깊이 알게 되었다.
하나님의 돌보심은 생각보다 훨씬 섬세하고,
내가 홀로 침대에 누워 조용히 흘린 눈물조차
그분은 놓치지 않으신다는 것을.
또한 세상 그 누구보다 위대하고, 따뜻하고, 완전한
하나님 아버지께서 내가 어디를 가든 언제나 나와 함께하고 계신다는 것을.
그렇게 내 20대는 부족함도 많고 연약함도 많았지만, 동시에 가장 따뜻했던 시간이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해 내 삶을 어떻게 돌보시는지,
또 그분의 사랑이 얼마나 구체적이고 세심한지를 배운 시절이었다.
그리고 또한 그 시간은 야생마를 길들이는 것과 같은 훈련의 과정이었다.
외로움 속에서도 주님을 붙드는 법,
연약함 속에서도 사랑을 배우는 법,
내가 부서지고 죄인 된 나를 십자가에 못 박은 후 예수로 사는 법까지.
수많은 훈련이 나를 다듬어주었다.
이제 나는 새로운 계절 앞에 서 있다.
더 이상 보호받는 딸로만 머무르지 않고,
누군가에게 그 따뜻함을 흘려보내야 할 자리로 나아가고 있다. 지난 시간에 받은 훈련과 은혜가 내 안에 흘러넘치기에, 이제는 그것을 나누며 살아가고 싶다.
앞으로 어떤 새로운 훈련이 기다리든, 나는 안다.
그 모든 순간 역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선물이라는 것을. 그러므로 나는 그 선물 앞에 두려움보다 감사로, 방황보다 순종으로 걸어가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