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안리, 오르골, 그리고 신부산교회.
2013년,
GMS 청소년 수련회에서
보조교사로 섬기고 있던 스무 살의 여름날이었다.
버스 안에서 야구 이야기가 나왔고,
나는 야구는 잘 모르지만 고향이 부산이니까
무작정 손을 들며 말했다.
“롯데!”
그때, 한 오빠가 말했다.
“오~ 나도 부산이야!
그저 부산이라는 반가움에
나는 부산 어디냐 물었고 오빠는 대답했다.
광안리에 있는 신부산교회 알아?
우리 할머니가 거기 다니셔서,
나도 한국 오면 거기 다녀.”
그 말을 듣고 나는 순간 깜짝 놀랐다.
그 교회는 아버지께서 캄보디아 가기 전
마지막으로 부목사로 사역하셨던 곳이자,
한국에서 내가 ‘고향’이라고 말할 수 있는 교회였기 때문이다.
그 인연 하나로 우리는 금세 친해졌다.
하지만,
오빠 동생 그 이상은 아니었다.
어릴 적 생긴 트라우마로
나는 늘 남자들과 거리를 두곤 했고,
그 관계도 마찬가지였다.
2년이 흘러 2015년.
VisionMK 첫 수련회를 준비하던 여름,
우리는 거의 매일같이 함께 지냈다.
초기 멤버 여섯 명이 똘똘 뭉쳐 지냈고,
그 안에 우리 둘도 있었다.
그리고 그해 여름,
여섯 명 중 커플이었던
리더언니와 리더오빠가 결혼을 하였다.
그때부터였다.
결혼이라는 것,
하나님이 예비하신 짝에 대하여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한 것은.
그 무렵 나는 그 오빠가 나를 좋아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이성으로 느껴지진 않았다.
그런데 또 막상 오빠를 거절한다고 생각하면
마음 한구석이 저릿했다.
나는 그 감정이 이해되지 않아,
수련회 강사님의 사모님께 물었다.
“하나님이 예비하신 짝이라면,
마음이 안 설레도 결혼해야 하나요?”
사모님은 웃으며 말씀하셨다.
“하나님이 예비하신 사람이면,
결국 사랑하게 되겠지?”
그 말 한마디에,
오빠를 향한 알 수 없던 부담감이 조금씩 풀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고모에게 연락이 왔다.
“소희야, Phillip Kwon이라는 사람 알아?”
나는 “네 알아요!”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고모께서는
“아~ 우리 집이랑 뭔가 연관이 많은 것 같아서…”라고 하시고는
더 이상 말씀이 없으셨다.
그런데 그 순간,
마음 한가운데 문장 하나가 날아와 박혔다.
“보이는 것 때문에,
보이지 않는 보물을 포기할 것이냐.”
나는 그 의미가 정확히 뭔지 알 수 없었고,
이렇게 또렷하게 마치 화살이 가슴에 박히는 것처럼
문장이 마음에 새겨지는 경험을 설명할 수도 없었지만,
이 계기로 ‘이 사람을 한 번은 다시 만나봐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우리는 강남역 쌀국숫집에서
처음으로 단둘이 밥을 먹게 되었다.
조금의 기대와 약간의 불편함 사이에 앉아 있던 나는,
오빠의 어릴 적 이야기를 들었다.
태어날 때 양측성구순구개열이 있었고,
수많은 수술을 거치며 자라온 시간들.
그 때문인지 어머니는 가끔 미안하다고 하신다고 했고,
그럴 때마다 오빠는 어머니께 이렇게 말했다고 했다.
“엄마, 나는 오히려 이렇게 태어나서 감사해요.
약한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고,
무엇보다 빨리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어요.
그리고 이건 엄마의 잘못이 아니잖아요.
오히려 저를 위해 늘 최선을 다해주셔서 감사한걸요.”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그 사람의 깊이와 진심이 선명하게 다가왔다.
그리곤 내 마음에 날아와 박혔던 그 문장 속
보이지 않는 보물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느껴졌다.
그날 밤, 나는 하나님께 기도했다.
“하나님, 이 사람이 저에게 허락하신 사람이라면
확실하게 알려 주세요.
그래야 엄마에게 말할 수 있어요.
확신이 없으면, 엄마 앞에 꺼낼 용기가 없어요.”
그리고 다음 날 새벽기도 시간.
목사님께서 창세기 24장 말씀을 읽으셨다.
아브라함의 종이 이삭의 아내를 찾는 이야기였다.
먼 길을 떠난 종은 하나님께 구체적으로 기도한다.
‘내가 어떤 소녀에게 물을 달라고 말할 때,
그 소녀가 나뿐 아니라 낙타에게도 물을 주겠다고 하면
그가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자인 줄 알겠습니다.’
그리고 기도가 채 끝나기도 전에,
리브가가 나타나 정확히 그 기도에 응답하는 행동을 한다. 하나님은 종의 기도에 그렇게, 아주 구체적으로 응답하셨다.
종은 그 일을 리브가의 가족에게 설명했고,
그때 그녀의 오빠와 아버지가 이렇게 대답했다.
“이 일이 여호와께로 말미암았으니, 우리는 가부를 말할 수 없노라.” (창 24:50)
그 구절을 듣는 순간,
말씀이 단순한 성경 이야기가 아니라
내게 하시는 하나님의 응답처럼 느껴졌다.
“그래, 이 일이 정말 하나님께로 말미암은 것이라면,
엄마도 반드시 그 앞에서 ‘가부’를 말하지 않을 거야.”
그날 새벽, 마음 깊은 곳에서 알 수 있었다.
이 만남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이라면,
엄마의 마음도 함께 열어주시리라는 확신.
그 믿음 하나로,
두려움이 사라졌다.
‘그래, 이제 말할 수 있겠다’는
이상할 만큼 단단한 평안이 찾아왔다.
며칠 후, 오빠가 작은 선물을 건넸다.
영어 과외 중이었는데,
숙제 잘 해왔다며 슬그머니 내민 선물이었다.
포장을 열던 나는, 손을 멈췄다.
작은 피아노 모양의 오르골.
그 순간, 한 장면이 떠올랐다.
예전 어느 날, 아버지가 말했다.
“하나님의 응답은 어떤 사람에게는 아주 구체적으로 오기도 하더라.
너도 그렇게 기도해 보면 어떠냐.”
나는 조심스럽게 하나님께 기도했다.
“하나님, 모두 다 그렇게 응답하시진 않겠지만,
혹시나 저에게 그 방법으로 응답하신다면,
그 사람이 오르골을 선물하게 해 주세요.”
오르골은 누가 쉽게 고르기 어려운 물건이었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물건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지금, 내 손안에 바로 그 오르골이 있었다.
집에 돌아오는 길,
그 길로 나는 두려움 반, 확신 반의 마음으로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 나 결혼할 사람 찾았어요.”
잠시 침묵이 흐르고,
엄마가 조용히 말씀하셨다.
“너도 그 사람이 좋아?
네가 좋다면, 나도 좋아.”
엄마는 몇 년 전부터 sns에 올라오는
그 사람의 사진을 볼 때마다
이상한 마음이 들어 기도하고 있었다고 했다.
그러다 2015년 초,
“소희가 저 사람이 하나님이 주신 짝이라는 확신을 받았다고 말한다면 나도 사랑하며 받아들일 수 있겠다”는 마음이 들었다고 하셨다.
2016년 2월 10일, 광안리.
쌀쌀했지만 춥지 않았다.
두근거려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바닷가 벤치에 나란히 앉았고,
오빠는 1년 반 동안 나를 향해 써 온 일기 한 권을 조심스럽게 건넸다.
나는 편하게 지내던 사이에 이러고 있는 게 너무나 오글거려서, 집으로 돌아갈 때까지 “내가 왜 좋은데요?”를 반복했고, 집에 도착해서야 전화를 걸어 짧게 말했다.
“나도 좋아요.”
그해 4월, 오빠는 정식으로 프러포즈를 했고
2016년 12월 17일
우리는, 우리가 친하게 된 계기이자
우리의 고향 교회인 신부산교회에서 결혼했다.
어릴 적, 그 웅장한 예배당에 앉아
‘나도 여기서 결혼하고 싶다’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렇게,
어릴 적 혼자 마음속으로 소망했던 그 일이
정말 이루어졌다.
결혼식이 끝나고, 우리의 첫날밤.
오빠는 대야에 물을 받고는 조용히 말했다.
“앉아볼래?”
나는 망설이며 의자에 앉았고,
그는 내 발을 조심스럽게 씻기기 시작했다.
물에 젖은 손으로 내 발을 감싸며, 오빠는 말했다.
“예수님이 교회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를 사랑하고 섬기는 남편이 되고 싶어.”
그 순간, 나는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나도 교회가 예수님께 순종하듯,
믿고 순종하는 아내가 되어야겠다.”
그날,
우리는 그렇게
가족이 되었다.
그리고 몇 개월 후, 2017년 3월.
우리는 국내 MK선교사로
신부산교회에서 파송받게 되었다.
두 사람의 첫 시작이자 고향,
그리고 두 사람을 하나 되게 한 곳.
그곳이 우리의 파송교회가 되었다.
누가 대본을 쓰지 않고서야
이렇게 하나하나 연결될 수 있었을까.
되돌아보면,
모든 순간이 소름 돋는다.
버스 안에서 우연히 시작된 대화,
기도의 응답과 확신,
그리고 결국, 한 교회에서 시작된 인연이
또 다른 누군가의 회복과 부르심으로 이어진 지금.
그 모든 순간이 꼭 맞아떨어지는 퍼즐 같았다.
그리고 그 퍼즐을 맞추고 계셨던 분은,
우리를 가장 잘 아시고, 가장 사랑하시는 그분이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