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의 힘
서른 전에 아이 넷을 낳아 키우는 것은
오래된 내 꿈이었다.
스물둘에 나는 결혼을 했고,
스물셋, 드디어 그 첫걸음을 딛는 순간이 찾아왔다.
결혼하면 바로 생길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아서 잠시 걱정했지만,
감사하게도 2달 뒤 첫째가 찾아와 주었다.
입덧은 힘들었고, 여름의 더위는 버거웠다.
집에도, 차에도 에어컨은 없었다.
그래도 좋았다.
내 안에서 생명이 자라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했으니까.
반면에 남편에게는 불안이 있었다.
혹시나 구순구개열이 유전되진 않을까 하는 걱정.
그래서 정밀 초음파를 보러 갈 때 긴장했고,
다행히 초음파에서는
아무 이상이 없다는 결과가 나왔다.
입체 초음파에서 입술 쪽이 약간 이상한 듯했지만
의사 선생님께서는
탯줄때문이라며 걱정 말라고 하셨다.
남편은 안도하며 아빠를 닮은 듯 보이는 초음파 사진을 들고 본인을 닮았는데 입술이 괜찮으면 어떻게 생겼을지 너무 궁금하다는 말을 했다.
그 한마디에 남편의 아팠던 시간들이 담긴듯해
마음이 한편이 저릿했지만,
한편으로는 아이가 괜찮아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진통이 찾아왔고,
곧 아기를 만난다는 생각에 설렘과 동시에
난생처음 느껴보는 고통을 견뎌야 했다.
네 시간 정도의 진통을 참아낸 후 무통주사를 맞았고,
한 시간 반 정도 자고 일어나니
진행이 빨라 출산을 하겠다고 하셨다.
아직 무통의 효과가 사라지지 않은 터라
나름 ‘우아한 출산’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아이가 올라오는 그 순간,
입술의 작은 갈라짐이 보였다.
초음파에는 나오지 않았었는데,
아이의 입술은 벌어져 있었다.
나는 눈앞이 하얘져
아이의 이름을 제대로 불러주지 못한 채
신생아실로 보내게 되었다.
그러나 당황할 겨를도 없었다.
‘남편이 무너지면 어쩌지?’
‘밖에 있는 엄마가 속상해하면 어쩌지?’
‘시부모님은 어쩌나?’
이런 생각들이 내 머릿속을 휘몰아쳤다.
그런데 그 순간,
‘나만 괜찮으면 다 괜찮아질 거야.‘라는
마음의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는 아이의 엄마니까
내가 하나님을 신뢰하며 흔들리지 않으면
모두 괜찮아질 거라는 걸 직감적으로 알았다.
그래서 난 울지 않았다.
아니, 울 수 없었다.
괜찮다고 했다.
하나님을 신뢰한다 고백했다.
그런데 입으로는 고백했지만,
나 조차도 모르는 사이에
내 마음은 부서지고 있었다.
조리원에서 아이의 입을 열어봤다.
입술뿐 아니라 잇몸까지 갈라져 있었다.
그 순간 나는, 또 한 번 무너졌다.
당시 남편은 서울에서 사역 중이었고,
나는 나 홀로 부산의 어느 조리원이었다.
아이의 상태가 알고 보니 더 심각한 상태였다는 사실이
나를 집어삼켰고,
곧장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
내 모든 걱정과 불안을 쏟아냈다.
그러다 문득,
어쩌면 나의 불안조차도
남편에겐 상처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에
말을 멈추었다.
그렇게 나는 얼른 정신을 차리고
아이의 상태가 어떤 정도인지 검색을 통해 알아보며
수술할 병원을 열심히 찾았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나는
아무에게도 내 마음속 이야기를 나눌 수 없었다.
4개월이 되던 무렵, 아이는 수술을 받게 되었다.
아직 혼자 앉지도 못하는 아이를 품에 안고 수술장에 들어섰다.
마취약이 돌면서 아이의 몸이 내 품에서 축 늘어졌고
마치 아이의 숨이 멎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나는 축 쳐진 아이를 수술대 위에 내려놓고 나왔다.
걸음을 떼는 발끝이 무거워,
온몸이 바닥으로 꺼지는 것 같았다.
성형외과 병동.
6인실, 어른들과 함께 쓰는 공간.
수술이 마친 후 아파서 계속 우는 아기.
아기의 울음은 누구에게나 견디기 힘든 소리였다.
아이의 울음에 방에 있을 수 없던 나는
쉼 없이 우는 아기를 안고 나와
불 꺼진 복도,
휴게실 옆 창가,
응급실 앞,
사람이 없는 자리를 찾아
7일을 걸었다.
내 허리와 다리는 이미 망가져 있었고,
걷는 내내 고통스러워 눈물이 마르지 않았다.
남편은 사역 일정을 병행해야 했고
시어머니께서 감사하게도
지구 반대편에서 도와주시겠다고 오셨다.
그러나 평소에도 몸이 좋지 않으셨는데
시차 적응까지 안 된 상태셨다.
그 상황에 아이를 맡기기엔 너무 죄송하기도 했고,
아이도 수술 후라 예민해서 엄마아빠만 찾았기에
내가 안고 걷고 또 걸었다.
남편이 사역을 마치고 돌아온 날 새벽,
나는 정말 힘들어서 남편을 깨우려 했는데
시어머니께서 “자게 두라”고 말리시며
어머니께서 봐주시겠다고 하셨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 나는
어머니께 아이를 안겨드릴 수 없었다.
계속 우는 아이를 엄마 아빠가 아닌 사람이 달래기는
쉽지 않을걸 알았기 때문에...
그렇게 나는 또다시 아이를 안고
병실 밖으로 나와
참을 수 없이 터져 나오는 눈물을 삼키며
걷고, 또 걸었다.
병실 밖을 돌아다니다 잠시 벤치에 앉아
10분씩 겨우 눈을 붙이는 게 다였다.
7일 동안 총 수면시간은 4시간 남짓.
하지만 감사하게도
전공의의 실수로 원래 10일 입원인데
7일 만에 퇴원이 결정되었고,
그날 집으로 돌아와 아이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누워서 잠들었다.
수술이 끝났다고 끝난 것도 아니었다.
그 후 1년간은 수술 부위를 매일 관리해야 했다.
그 모든 시간을 지나며 나는 서서히 무너졌다.
산후우울증이 찾아왔지만
그게 우울증 인지도 몰랐다.
매일 아침
‘그냥 모든 게 사라지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이는 예뻤지만, 마음처럼 예뻐해 줄 수 없었다.
살기 위해 TV를 켰다.
아이와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
무기력하게 화면만 바라봤다.
먹이고 입히는 것도
그저 최소한으로.
정성은커녕, 의무로만 채워졌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설교 한 편이 흘러나왔다.
‘지금 상황에서도,
감사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나는 억지로 말했다.
입으로라도 꺼내보자고.
“감사합니다… 감사해요…”
그런데
정말 설명할 수 없지만
그 순간,
내 안에 메말랐던 무언가에
‘생수’가 부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심장이 다시 뛴다는 느낌.
살아난다는 느낌.
그러자 내 마음 깊은 곳에 숨겨두었던
아픔이 들리기 시작했다.
나 사실 너무 속상하고 힘들었어.
내가 꿈에 그리던 출산의 순간이
환영받고 축하받는 순간이 아닌
모두가 슬퍼한 순간이었다는 것도
태어나자마자
아이의 이름을 불러주지 못했던 것도
아이를 예뻐해줘야 할 시간에
정신없이 검색하기 바빴던
그 모든 시간에도
4개월 아기 핏줄이 안 잡혀
주삿바늘을 넣고 휘저으며
작은 팔에 몇 번이나 찌르던 그 순간도
마취약에 축 쳐진 아이를
두고 걸어 나오던 그 순간도
수술 후 우는 아이를 달래며
걷고 또 걷던 병원 복도에서도...
그리고 그 누구에게도
힘들다며 투정 부리거나
기댈 수 없는 상황이기에
매일 남몰래 홀로 울며
견디던 그 밤들이 참 외로웠어.
상황과 상관없이
그저 순종하는 마음으로
감사를 뱉어본 것뿐인데
비로소 이 아픔을 마주할 용기와
그때의 나를 위로할 힘이 생겼던 것이다.
그날 너 정말 많이 속상했구나.
그걸 말도 못 하고 혼자 견뎌내느라,
얼마나 힘들었어.
그래도 잘 버티며 여기까지 해냈네.
고생 많았다.
그제야 나는
깊은 어둠 속에서 홀로 아파하고 있던 그때의 나를
안아줄 수 있었다.
어쩌면 누구보다 가장 속상했던,
그날의 엄마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