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생긴 자두 세 알, 푸른 보석 목걸이
첫째가 막 돌을 앞두고 있을 무렵,
나는 둘째를 임신했다.
첫째가 입술이 갈라져 태어났었기 때문에 병원에서 정밀초음파를 보는 날이 되자 긴장과 불안에 심장이 빨리 뛰었다. 그러나 그 불안이 무색하게, 그리고 감사하게도 둘째의 입술은 아무 이상 없이 매끈했다.
막상 확인하고 나니 괜찮다고 함에도 믿을 수 없었다.
첫째 때처럼 혹시나 태어날 때 또 그럴 수도 있을 거라 생각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이가 태어나는 날까지 불안을 내려놓지 못했다.
임신 중기쯤,
우연히 자연주의 출산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보게 됐다.
엄마와 아기가 건강하기만 하다면,
의료적 개입 없이도 충분히 의미 있고 안전한 출산이 가능하다는 이야기였다.
나는 망설임 없이 자연주의 출산을 선택했다.
‘축제 같은 출산’이라는 표현에 마음이 붙들렸고, 안양에 있는 조산원을 찾아 출산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의사가 주도하는 출산이 아닌, 엄마와 아기, 그리고 가족이 중심이 되는 출산.
나는 그 새로운 방식에 깊이 매료됐다. 여러 권의 책을 읽고, 출산 영상도 찾아보며,
마치 새로운 문화를 배우는 것처럼 그 시간을 설렘으로 채워갔다.
아마도, 첫 아이 때 경험하지 못했던 ‘축제의 순간’을 이번엔 꼭 마주하고 싶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출산 예정일이 다가오고, 남편이 조산사의 도움을 받아 직접 아이를 받았다.
나는 그날, 정말로 내가 꿈꾸던 ‘축제 같은 출산’을 맞이했다고 믿었다.
그런데, 그 축제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신생아에게 시행한 선천성 대사 이상 검사에서
‘재검 권유’라는 말을 들었다.
그렇게 둘째는, 선천성 갑상샘 기능 저하증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갑상선 호르몬은 육체와 뇌의 성장을 결정짓는 중요한 호르몬이다.
그런데 우리 아이는 그 호르몬이 나오게끔 자극하는 호르몬 자체가 분비되지 않는,
선천적인 질환을 안고 태어난 것이었다.
생후 2주, 3주, 5주… 피검사 일정이 반복됐다.
혈관이 잘 보이지 않는 작고 여린 팔과 다리는 바늘로 수차례 찔려야 했고,
피가 잘 나오지 않아 주사를 꽂은 채로 피를 뽑기 위해 아이 팔을 짜내는 일도 많았다.
숨이 넘어갈 듯 우는 아이를,
나는 온몸으로 껴안고 꼭 붙잡은 채 그 고통의 시간들을 버텨내야만 했다.
아이의 치료 방법은 단순했다. 생후 5주부터 매일 호르몬제를 복용하는 것.
그리고, 3개월마다 한 통 분량의 피를 뽑아 검사를 반복하는 것.
그렇게 나의 대학병원 일정은 둘째의 출산과 함께 또 추가되었다.
나는 원래 아이를 네 명 낳고 싶었다.
그런데 연이어 두 아이가 아프고 나니,
‘나는 과연 건강한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사람일까?’ 하는 의문이 마음 깊숙이 피어올랐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붙잡고 있을 여유조차 나에겐 허락되지 않았다.
나는 그저 매일 약을 먹이고, 정기적으로 대학병원을 방문하며 하루하루를 살아냈다.
둘째가 7개월이 되었을 무렵, 코로나 팬데믹이 터졌다.
남편은 신학대학원에 합격했고,
기숙사 생활을 위해 평일 내내 집을 비우게 되었다.
그런데, 모유수유 중이었던 나는 아직 생리를 하지 않고 있었는데 어느 날 이상한 예감에 임신테스트기를 해보았다.
두 줄.
충격이었다.
아직 첫 생리도 없었는데 임신이라니.
하지만 생명의 주권은 하나님께 있는 것이니
감사하기로, 기뻐하기로 했다.
셋째 임신 확인 후,
정신없이 코로나로 아이들과 집콕하며 시간이 흐르던 어느 날 꿈을 꾸었다.
친정어머니께서 자두 궤짝을 가져와서
나에게 자두를 주시려고 자두를 고르고 계셨다.
그러더니 제일 못생기고 작고 울퉁불퉁한 자두 세 알을 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소희야 이거 정말 귀한 자두다.
절대 잃어버리면 안 돼!
그래서 나는 그 자두를 잃어버리지 않으려 두 손으로 꼭 쥐고 있었는데
갑자기 어느 순간 그 자두 세알이 푸른 보석 목걸이가 되어 내 목에 걸리고 잠에서 깨어났다.
그때는 몰랐다.
이게 무슨 의미를 가진 꿈이었는지.
그렇게 또 시간은 흘렀고,
기다리던 정밀 초음파 날이 되었다.
차가운 기계가 내 배 위를 스치고 아이의 얼굴이 비치는 순간,
심장이 어딘가 깊은 곳으로 쿵 하고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입술이 코 밑까지 갈라져 있었다.
첫째 때 보다도 더 심한 상태임이 흑백의 초음파에 확연하게 드러났다.
그 순간 마음이 참 어려웠다.
그러나 금방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그리고 첫째 때 감사가 나를 살렸던 것을 기억하며,
감사의 제목을 찾으려 했다.
이미 한 번 겪어봤으니, 이번엔 준비할 시간이 있기에 더 잘 해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신중하게 명의를 찾았고, 수술 후 경과가 가장 안정적인 교수님께 진료를 예약했다.
모든 일이 매끄럽게 진행되었다. 출산도 그 대학병원에서 하기로 결정했다.
첫째는 여성병원,
둘째는 조산원,
셋째는 대학병원.
새로운 환경에서의 출산이라는 사실이 왠지 짜릿하다고 느껴졌던 것도 같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어쩌면 그 짜릿함은
당시 너무 낙심이 커서, 무엇 하나라도 ‘감사할 제목’을 찾으려 노력했던 걸 지도 모르겠다.
살기 위해서.
대학병원이 집에서 멀었고,
나는 급속 분만 체질이었기에 미리 유도 분만 날짜를 잡아놓았다.
출산 당일 새벽.
찬양을 들으며 병원으로 향하는 길,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이 가슴 가득 밀려왔다.
마치 이 아이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온몸을 덮는 듯한 느낌이었다.
속에서부터 울컥 올라오는 감사와 기쁨.
나는 그렇게 셋째를 맞이하러 갔다.
역시나 유도분만제를 넣은 지
2시간 뒤 출산이 시작되었고,
아이가 태어나는 순간,
20명 가까운 의료진이 분주히 내 주변에 서 있었다.
대학병원은 배우는 곳이었기에 실습 중이던 선생님들이 다 몰려와있던 상황이었던 같다.
그렇게 정신없는 가운데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왔고,
아이와 나는 각자의 공간으로 흩어졌다.
6인실을 신청했지만, 자리가 없어 1인실에 배정받았다.
심지어 산과 병동도 아니어서 아이와 함께 지낼 수도 없었다. 그 사실에 마음이 살짝 무너질 뻔했지만, 넓은 통창 너머로 펼쳐진 서울의 야경이 나를 위로했다.
“하나님이 좋은 방 주셨으니, 조리원 가기 전까지 푹 쉬다 가자.”
나는 마음을 다잡고 눈을 감았다.
조리원에서는 특수 젖병 사용하는 법부터 배워야 했다.
입천장의 연구개 부분이 갈라져 있어, 아이는 젖을 빨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잘 버티던 내 마음이 그 순간 무너졌다.
누군가는 이게 뭐 별일인가 싶을지도 모르겠지만,
엄마에게 있어서 모유수유를 할 수 없다는 것은 꽤나 큰 불안과 걱정을 가져다준다는 것을 공감하는 엄마들도 분명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다시 감사할 제목을 찾았다.
그래야 이 시간을 버텨낼 수 있을 것 같아서.
특수젖병이 있어서 아이에게
수유가 가능한 것이 감사하다.
그래도 경구개는 붙어있으니
다행이고 감사하다.
코 안쪽까지는 갈라지지 않아서
다행이고 감사하다.
하지만 당시 내가 찾았던 그 감사제목들은
상대적인 감사였지 절대적인 감사가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은
나에게 위로하려 한 말이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우리는 아이가 가지기 어려워 힘든데 너는 아이가 많아서 부럽다는 말을 듣기도 했다.
아이가 죽을병에 걸린 것이 아니니까 감사하네~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진정한 감사가 아닌 상대적 감사는 결국
화살이 되어 나를 찌르기 시작했다.
사실은 감사하지 않았다.
상대적 감사는 이런 상황에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는다는 교만함에 휩싸이게 했다.
그러나 그때는 그런 감사가 반쪽짜리 감사라는 사실을 몰랐다.
그러한 상대적 감사는 나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없다는 것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그리고 오히려 나를 교만의 자리로 가게 한다는 사실도 알지 못했다.
첫째 때 감사를 억지로라도 하기 시작했더니 조금 회복되었던 것은 사실, 나의 노력인 감사가 나를 회복의 방향으로 가게 한 것이 아니라 말씀을 듣고 하나님께 순종하여 감사를 뱉어보려 한 그때의 그 순종의 마음이 나를 회복의 길에 서게 한 것이 아닐까?
하지만 그때는 그걸 몰랐다.
내가 나의 노력으로 한 감사가 나를 회복에 자리에 있게 했다고 착각했다.
그래도 그때는, 그나마 그렇게라도 상대적 감사가 주는 반쪽짜리 위로로 버티며 90여 일을 지냈고, 기다리던 셋째의 수술 날이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