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럴 수 있다’라는 박애(博愛) 정신으로 인간사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그것이 마음의 문제라면 더 그렇다. 인간은 욕망을 먹고사는 동물이고, 자신이 항상 옳아야 한다는 이기주의를 버리지 못하는 존재이기 때문일 것이다. 나에게도 갈등의 순간은 늘 빚처럼 따라다닌다.
아침, 급한 약속에 서둘러 집을 나섰다. 아직 시간은 넉넉했지만, 뭔가 불안한 예감 탓인지 쫓기는 기분으로 차를 부지런히 몰았다. 아니나 다를까 갑자기 내 차 앞으로 거대한 화물 탑 차 한대가 끼어들었다. 차 뒷면에는 어느 유명 편의점의 마크가 나를 노려보듯 자리하고 있었다. 일방통행의 외길에서 갑자기 앞 차가 정지했다. 새벽이라 차들이 많지는 않았지만, 길을 통과해야 하는 나로서는 난감하고 어리둥절한 상황이었다. 잔뜩 인상을 쓴 화물 운전자가 마치 나무늘보처럼 천천히 내렸다. 차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인가 살피던 나는 곧 상황을 알게 되었다. 바로 옆편의점에 물건을 내려놓아야 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지나가야 한다는 제스처를 취했더니, 미안하다는 인사도 없이 손짓으로 물건을 내려야 하니 기다리라고 했다. 어이가 없었다. 갑자기 화가 났지만, 그 기사도 힘든 짐을 내리려면 어쩔 수 없겠다는 마음씨 좋은 생각에 그가 물건 내리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순간 오만가지의 번뇌가 내 머릿속을 헤집어 놓았다. 오 분쯤 지나자 기사는 짐을 다 내렸는지, 화물칸을 잠그고 또 인사도 없이 차에 올라 앞으로 차를 몰아 나갔다. 그 안하무인의 태도에 화가 났다. 무슨 사람이 예의도 없이 길을 막고, 거기에 사과 한마디도 없이 떠나는지 내 상식으론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자신의 고생과 시간만 아깝고 남의 시간적 허비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는 태도가 새벽의 내 마음을 어지럽혔다.
한참 시간이 흐른 뒤에도 그 새벽의 일이 자꾸 체증처럼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무언지 모르게 마음속의 화는 점점 커져갔다. 그때부터 걷잡을 수 없는 공상의 나락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먼저 든 생각은 함무라비 법전의 탈리오 법칙인 “이에는 이, 눈에는 눈” 방식이었다. 그가 차를 예의 없이 세울 때부터 창문을 크게 열고 “차 빼세요! 저도 급하니 빨리 가야 합니다”라고 소리를 쳤어야 했다. 상대방의 예의 없는 짓에 바로 응징하는 방식이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이내 마음을 돌렸다. 상대가 맞대들기라도 하면 요즘 같은 흉한 세상에 큰 싸움으로 번질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 내 자아는 스스로 타이르고 있었다. 바로 기독교의 박애정신을 가지라고 말했다. “그분이 그럴 수도 있지”라는 생각으로 그의 입장을 이해하고, 나 스스로 화를 다스리라고 조용히 달랬다. 문제는 그때부터 발생했다. 아무리 나를 설득하여도 마음속 어디선가 계속해서 “억울하고 분해. 왜 내 시간은 존중받지 못하는 거야. 설령 그렇다 쳐. 최소한 미안하다고 인사는 꾸벅하고 가야 하는 거 아닌가? 그게 인간이 가진 최소한의 예의가 아닌가?”라는 마음의 외침이 계속해서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그때였다. 불현듯 내 머릿속에 하나의 단어가 스쳤다.
“방하착 (放下着) – 내려놓아라!”
한국 근 현대 불교를 개창한 경허 스님이라는 분이 있었다. 하루는 사미와 함께 냇가를 건너려는 데 어여쁜 여인이 돈을 줄 테니 냇가를 업어서 건네 달라고 거만하게 부탁했다. 경허 스님은 “좋다”라고 말하곤, 여인을 업어 건네주었다. 그리고는 갑자기 여인 엉덩이를 찰싹 때린다. 이내 스님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유유히 걸어 사찰에 도착을 했다. 이를 유심히 본 사미는 경허 스님에게 물었다. “어째서 여인의 엉덩이를 때리셨습니까?” 그러자 경허 스님은 “나는 그 여인을 개울가에 내려놓았다. 어찌하여 너는 아직까지 그 여인을 등에 업고 있단 말이냐” 그리고 한마디를 덧붙인다. “만약 노인여자를 업고 개울을 건넜으면 사미 네가 그리도 궁금했겠느냐”. 이것이 바로 불교에서 생각을 내려놓으라고 가르치는 “방하착”의 한 일화다.
인간 근심은 모두 자신이 가진 마음으로부터 생기는 것이니, 바로 그 생각을 내려놓으라는 불교의 가르침은 나에게도 큰 울림이었다. 실제 생활에서 어떻게 사용할지 몰랐던 나는 비로소 그 사용법을 알게 된 것 같았다. 새벽에 누군가가 나에게 불친절했던, 그 마음을 놓는 일이 그를 위해서도, 나를 위해서도 좋은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자, 내 마음속 태풍은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 잔잔한 마음으로 아파트 단지에서 천천히 차를 몰다 몇 명의 어린 친구를 발견했다. 나는 또 다른 선한 마음으로 차를 세우고 아이들에게 먼저 지나가라고 손짓을 했다. 눈치를 보던 아이들이 서둘러 길을 건너며 앞장선 한 아이가 나에게 고개를 꾸벅 인사를 하고 갔다. 그 공손함에 부처님 같은 미소가 절로 지어지는 나를 발견하곤 멀어져 가는 아이들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