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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섭 Mar 23. 2023

농담 한 마디

 비가 창을 한없이 두드립니다. 많은 비에도 유리창은 꿋꿋이 버티고 있습니다. 물방울들이 맺혀 여러 모양으로 나눠지기도, 합쳐지기도 합니다. 투명한 무대 위에 방울들이 군무를 추듯 요란하기 그지없지만,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마음은 오히려 평화롭습니다. 수많은 맺힘 중에  한 방울의 비가 거꾸로 올라갑니다. 바람의 심술인지 홀로 날아 마치 자기가 온 곳으로 돌아갈 기세입니다. 그 방울이 신기해 한참을 보고 있었습니다. 창문 너머엔 제주의 바다가 펼쳐져 있었고, 언제나 그렇듯 바다의 파란색이 빗방울에 흠씬 두들겨 맞은 듯 시퍼렇게 멍이 들고 있었습니다. 그 색은 우주의 색 같기도, 나의 어린 시절 그리움의 동색 같기도 했습니다.     


 누구나 첫사랑을 못 잊듯, 처음 경험하는 일은 쉽게 잊히지 않습니다. 초등학교 삼. 사 학년 즈음, 아버지는 동네 여러 이웃들과 가족 여행을 간다고 들뜨듯 말씀하셨습니다. 다른 곳이었다면 시큰둥할 우리를 보며 아버지는 자랑하듯 비행기를 타고 제주도로 간다고 했습니다. 저와 제 동생은 처음으로 비행기를 탄다는 기대에 인디언처럼 '이얏호'하고 환호를 질렀습니다. 당시 제가 살던 곳은 경기도 파주였으니, 여행은 우리나라 최북단에서 최남단을 종단하는 여정이었습니다. 제주로 가던 날, 다행히 비행기를 타며 코미디 같은 실수는 없었지만, 우린 같은 또래의 아이들과 장난을 치며 다른 세상을 꿈꾸었습니다. 기내 안에서 본 구름은 솜사탕 같았고, 위에서 내려 본 바다는 투명 옥빛이었습니다. 우리는 한라산이 보이자 연신 입을 다물지 못했습니다. 제 생전 그렇게 큰 산은 처음 보았고, 위에서 본 것도 처음이었습니다.      


 아버지와 그의 친구들은 철저했습니다. 제주도에서의 한시각도 허투루 쓰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듯, 관광버스에서 춤을 췄고, 내려선 배를 주린 듯이 먹어 댔습니다. 관광지에선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연신 셔터를 눌러 자신들만의 추억을 새겼습니다. 우린 그런 어른들의 행동이 원래 관광지에 오면 의례해야 하는 것으로 착각할 정도였습니다. 제주 목석원에는 이국적인 야자나무가 있었고, 북쪽에선 귀하고 귀한 귤을 마음껏 먹을 수 있었습니다. 2월의 제주는 그렇게 우리의 기억 속에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처럼 반짝였습니다.     



 겨울바다는 마치 초여름의 바다처럼 따뜻했고, 물살은 햇살에 비쳐 금빛을 뿌리고 있었습니다. 우린 신발을 벗어 제치고, 환호성을 지르며 신나게 물장구를 쳤습니다. 늦겨울의 태양은 뜨겁게 우리를 달구었고, 까맣게 타들어가는 피부가 그저 훈장처럼 즐거웠습니다. 그렇게 신나는 하루를 보내던 중 바닷가 전체에 갑자기 민방위 사이렌이 울려 퍼졌습니다. 순간 우린 얼음이 되었고, 무슨 일인지 몰라 우왕좌왕했습니다. 심지어 안내 방송에서는 "실제 상황입니다"라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우린 드디어 한반도에 전쟁이 터졌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른들은 모두 당황하였고, 내 옆에 아이는 울음을 터뜨리기까지 했습니다.     


 아버지만은 평정을 잃지 않았습니다. 침착한 표정으로 우리 모두를 진정시켰습니다. 처음의 두려운 분위기가 차츰 가라앉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전체 모두에게 큰소리로 농담하듯 한마디를 던졌습니다.     


"우리가 피난은 기가 막히게 왔다!!"

�     

 그 말에 모두가 크게 웃었습니다. 생각해 보니 진짜 상황이라면 우리나라 최북단에 살던 우리는 벌써 죽었을지도 모릅니다. 그 생각에 이르자 오히려 안도의 한숨을 쉬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우리 일행은 바닷가 한편에 모여 있었지만, 그 이후 아무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시간이 얼마 흐른 후 후속 방송이 나왔습니다. "상황이 해제되었습니다. 국민 여러분은 생업에 복귀하시기 바랍니다." 서로가 서로를 쳐다봐도 무슨 상황인지 파악할 수 없었지만, 그날 저녁 숙소에 들어와 우린 사건의 진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날 오전 한 북한 비행사가 미그기를 몰고 귀순했다는 뉴스를 방송국에선 앵무새처럼 반복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저녁을 먹으며 비로소 다행이라고 서로를 다독였습니다.     


 내가 간직한 아버지의 그림자는 이런 식이었습니다. 언제나 상황을 낙관적으로 해석하고, 유쾌한 농담을 툭툭 던져 모두를 안심시키는. 나는 그런 모습이 좋아 닮아가려 했습니다. 그는 나에게 있어서 상승기류 같은 존재였습니다. 내가 힘들고 지칠 때에도 상황을 좋게 보려 하고, 사람을 사랑스럽게 보는 이유도 모두 그 때문입니다. 비 오는 날 창문의 모든 물방울이 아래로 치달릴 때, 방울 하나를 무거운 중력에서 하늘로 구원하는 바람처럼 그는 저를 평생 우울과 슬픔을 초극하는 그 무엇으로 만들었습니다.      


 오늘 비 오는 제주에서 그 농담 한마디가 문득 떠오르는 이유는 더 이상 볼 수 없는 그가 몹시도 보고 싶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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