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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섭 Mar 29. 2023

조카의 장난전화

 나에겐 여러 가지 이름이 있다. 모두가 이제 여섯 살 접어든 조카가 부르는 호칭이다. 그녀가 막 말을 시작할 때는 '아아'였다가, 조금 지나선 '아부'라고 불렀다. 4살쯤 되었을 때 비로소 '이모부'라고 불렀다. 엄밀히 따지면 나는 그녀에게 '작은 이모부'였다. 그러나 동서형님보다 약간은 살이 쪘다는 이유만으로 한동안 '큰 이모부'라고 불렀고, 이제야 나의 정식명칭인 '작은 이모부'가 되었다. 그녀 역시 이름이 한번 바뀌었다. 그녀의 부모가 처음엔 '은'이라는 이름으로 지었다가, 무슨 이유에서 인지 좋은 한자라며 '영'이라고 바꿨다. '은'이란 이름이 예뻐 입에 붙였다가 '영'이라고 바꿔 말하려고 하니 아쉬웠다. 처음엔 호칭할 때마다 다른 아이를 부르는 것만 같아 어색했지만, 이젠 제법 입에 붙어 '영'이라고 곧잘 외친다. 영이는 사랑스러운 조카다. 특히 여자아이가 왜 남자아이들보다 사랑스러운지를 몸소 행동으로, 말로 보여준다. 오랜만에 만나도 전혀 데면데면하지 않다. 바로 달려와 "이~모~부~"하며 달려와 안긴다. 나 스스로 서먹서먹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부끄러워지기도 한다.


 겨울방학이라 제주에 놀러 온 조카는 부쩍 말이 많아졌다. 집에서는 물론이고, 어느 장소에든 가리지 않고 끊임없이 질문을 한다. 거실에 앉아 조카는 나와 이모를 자신이 얼마나 사랑하는 지를 얼굴을 비비며 이야기하고 있었다. 우린 장난스러운 마음에 네가 좋아하는 둘째 이모는 안 좋냐고 물었다. 그러자 조카는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안 좋다고 말했다. 우리는 순간 박장대소 했다 지금은 없지만, 둘째 처형이 있기만 하면 연신 “둘째 이모 최고”를 노래 부르고 다녔기 때문이다. 그때 알았다. 아무리 어린 조카지만, 현재에 최선을 다해 사랑하는 아이란 걸. 비록 내일이 되면 서울에서 내려오는 둘째 처형을 좋아하겠지만, 지금은 우리가 좋다고 말하는 순진한 아이란 걸. 니체는 어린아이가 되라고 말하였듯 나는 어린 조카를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이 주간 제주에서 머무른 조카와 처제네를 공항에 데려다주던 날, 장난스럽게 "이모부랑 며칠 더 있을까?" 했더니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네"라고 녀석은 소리쳤다. 순간 처제네와 나는 당황을 했다. 서울에 돌아가면 개학도 해서 친구를 새로 만나야 하니 힘들다고 투덜대는 녀석이었고, 나는 그게 못내 안타까움으로 다가왔다. 공항에 내려 이별을 아쉬워하는 표정을 짓더니, 내 품에 안겨 인사를 포옹으로 대신했다. 


 예전엔 이모인 나의 아내에게만 전화하더니, 다음날부터는 갑자기 나한테도 영상통화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곤 학교에서 새 친구들을 만났는데 너무 재미있었다고 자랑하듯 떠들었다. 나의 기우는 역시 기우였다는 것을 증명하며 머쓱함에 미소를 짓게 만들었다.     


어느 날 밤인가, 책을 보며 여유로움을 즐길 때쯤 조카 녀석에게 또 한통의 전화가 왔다.     

“이모부~~”

“그래 영아 잘 지냈어?”

“이모부 안 들려요!"�

“안 들려? 영아?�

“네�

“근데 어떻게 대답을 해?�

“......"�     

전화를 다급하게 끊었다. 나에게 장난을 치고 싶었지만,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는 급하게 끊은 모양이었다. 영은 그 이후로도 수시로 전화를 한다. 어쩌다 바빠 조카의 전화를 받지 않으면, 바로 이모에게 전화를 한다.

“이모! 이모부가 전화 안 받아."�

“이모부 지금 뭐 하느라 바쁘신가 보지"�

“알았어"하고 끊어 버린다.     


 누군가는 이런 장난전화가 귀찮다고 하겠지만, 나와 아내는 조카의 전화가 언제나 반갑다. 그 시간만큼은 나와 아내를 그리워했다는 이야기이고, 그곳에는 조건이 없다. 어른인 우리는 누구에게 전화나 안부를 물으려 해도 망설이고 이유를 찾지만, 진정한 관계에는 마음만 있으면 된다는 것을 나의 아름다운 조카는 슬며시 알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아이의 순진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만큼 아름다운 것이 있을까. 그리고 그 세상에는 사랑만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일까. 나는 저녁만 되면 조카 영의 전화가 기다려진다. 사랑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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