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공간으로 비워놔도 돼

하얀 공간

by 비단향꽃무

비단향꽃무

주말에 집을 나서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뿌연 잿빛 하늘,

여기저기 황금물결인 금계국 세상 천내천을 걸어서 사문진 주막촌

데크를 향해 산책을 나섰다. 그런데 우산을 깜박하고 말았다.

비가 올 수 있는 확률과 안 올 수 있는 확률은 반반...

이런저런 생각들을 제치고 나는 '걱정 안 함'을 선택하기로 한다.

SE-1fc8e077-503b-4f8c-a970-958cdbdde668.jpg?type=w966 계곡에 쏟아지는 빗물의 포말처럼 하얀 공간으로...

비가 줄줄줄 쏟아지기 시작한다. 어쩔 수 없이 하늘에서 내려주는 대로

비를 맞기로 마음을 고쳐 먹었다.

그러고 나니 물 밀듯 밀려오는 해방감...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다. '비야 비야 내려라, 내 마음까지 씻어 내려라'

머리카락은 두피에 딱 달라붙어 마치 비 맞은 생쥐 꼴이 되었다.

걸쳐 입은 옷은 몸에 달라붙어 버리고 질퍽한 신발 안에 갇힌 발바닥 아래선

한 발자국씩 내딛을 때마다 찌걱찌걱 소리가 났다.

우산을 쓰고 내 옆을 지나는 사람들의 시선이 약간 불편하게 다가온다.

이런 내 모습이 비 맞는 처량한 여자로 보일까,

아니면 그저 비를 즐기는 사람으로 보일까.

아무래도 괜찮다. 지금 그들과 나의 차이점은 지금 내리고 있는 비를

우산으로 막느냐 몸으로 막느냐의 차이,

나를 거쳐 땅으로 내리꽂고 있는 빗살을 온몸으로 맞고 있었다.


지금 내리는 비를 그냥 맞기로 마음먹듯

그래서 우산을 쓰지 않아도 되듯

일상에서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물건들을 사기 위해

굳이 돈을 쓰지 않아도 될 때도 있다.

때론 어떤 시간엔 없으면 안 될 것 같던 무언가의 부재가

또 다른 어떤 시간엔 물건대신 자유로운 해방감을 가져다주기도 한다.

매일 무언가를 채워가느라 여념이 없어 '없음의 여백'을 누리기 어려운

우리에게 말하고 싶다.

이젠 그것이 없어도 된다고,

그냥 하얀 공간으로 비워놔도 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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