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들 잘 내요?
여름에 대한 짧은 단상
다들 잘 내요?
저는 잘 지내고 있어요.
잘 지내야 하는게 맞지만 그게 제일 어렵잖아요 1인분의 몫을 해내야 하고, 스스로 잘 돌봐야하고
보이지 않는 것들을 감내하고 살아야 하니까 그러니까 잘 지내는것만큼 힘든일이 없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요즘 잘 지내고 있는것같아요. 물론 매일매일을 완벽하게 수행하고 있지는 않지만
요 며칠은 그랬어요,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 말해도 될까요
장을 보고 돌아오는길 문득 ‘아 내가 1인분은 해내고 있구나’하는 생각 들었어요.
덥고 습한 날씨에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한채 장봐온것들을 냉장고에 채워넣고 한숨을 돌리며
얼추 잘 살고 있구나
*
옥수수 따는 철이 지나고 이제 고추를 따러가요
나는 아직 수확할게 없지만 여름이 지나면 뭐라도 맺혀있겠죠
아니면 뭐 어쩔 수 없는거죠 지금까지 흉작이었는데
나는 늘 생각해요 내 쓸모에 대해 밥 빌어먹고 살 수 있는지 맨날 궁리해요.
생각한다고 나아지는건 하나도 없지만 그래도 뭐 어쩌겠어요
사유하는 존재로 태어난것을
*
여름은 끈적이고 달라붙어서 싫어요
그래서 자꾸 도피처를 찾아 헤매는데
이번에는 그게 사람이 아니길 바랄 뿐이에요
사람은 늘 도망가요 여름이 끝날때쯤엔 선선한 바람을 타고 증발해요 그래서 이제 나는
끈적이는것도 참는 법을 배우려고 해요
잘 지내요
*
아직도 저는 이방인 같아요
카페에서 콘센트 있는 자리를 찾아다니고
몇시간마다 편한자리를 찾아 두리번 거리는
*
대단한걸 하려니까 힘이 빠집니다
여름이란 계절이 그렇거 같아요 올여름은 기가막히게 놀아야지 올 여름에는 비키니를 입어야지 대단한 결심을 하고
금방 김빠져 버리죠 얼마나 대단한 계절을 보내야 다행인건지 추억에 남는건지 아직 잘 모르겠어요 아무래도 제가 가진 여름중에 내놓을만한 여름은 스페인에서 보낸 여름밖에 없는것같아요
그때의 여름은 가장 건조하고, 짜릿했으며 돈을 바른 여름이었으니 얼마나 인상깊겠어요.
그 해여름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많이 울었는데 인생의 고점을 만나버린것같아 엉엉 울었어요.
23살 밖에 안 먹고 그렇게 생각하는 꼬라지가 우스운데
저는 저를 잘 알거든요 대충은 맞아떨어졌어요 아직까지는.
그래여름보다 더 아찔한 여름은 없었으니까요
잘지내요?
잘 지내고 싶어요. 피부는 껍질이 까질 정도로 바싹 구워져서 하루 종일 걸어도 마냥 행복한, 숙제 없는 여름방학
그게 그리워요 잘 지낼 수 있을까요?
모쪼록 대단하지 않게 평안하게 잘 지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