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우를 처음 본날 나는 아직도 눈에 선하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날이었다. 온 세상이 회색빛으로 물든 하늘 아래, 나는 평소처럼, 내가 자주 가는 낡은 책방으로 들어갔다. 익숙한 문, 삐걱이는 문소리, 가벼운 종이 냄새. 비가 와서 그런지, 종이 냄새가 더 진하게 퍼졌다. 젖은 공기 속, 오랜된 활자의 향이. 모든 건, 언제나 그렇듯 같았다. 그녀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리고 우산을 책방 안 우산꽂이에 조심스레 꽂은 뒤, 고개를 들어 익숙한 자리로 걸음을 옮겼고, 나는 거기서 그녀를 만났다. 책상 옆, 구석 의자에 움크리고 앉아 있는 그녀. 한눈에 봐도, 너무 말라 있었다. 티셔츠 밖으로 틔어나오는 뼈 마디들이 너무 선명해서, 무심히 바라보다가도 눈을 피하게 될 정도였다. 그녀는, 앙상했다. 그리고 그녀는 숨을 고르며, 흐릿한 시선으로 어딘가 먼 곳을 붙잡고 있었다. 눈을 느리게 감았다가 떳을때도, 그 허공의 점 하나는 놓치지 못한 듯 계속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는, 그런 그녀의 분위기에 압도되었다. 그리고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결에 이끌려 나도 모르게 그녀 옆으로 다가갔다. 그녀는 내가 다가온 걸 알았는지, 몰랐는지, 알 수 없지만, 고개를 살짝 떨구더니, 잠시 숨을 고르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여기 있어야 숨이 쉬워져요 어디에도 이런 곳은 없어요 저는.. 여기에 있어야만 해요." 그리고 순간 나는 그녀의 말에 알 수 없는 흥분을 느꼈다. 분명한 건 하나였다. 나는 그녀 곁에 있어야 했다. 뭘 말하든, 어떤 식으로든, 그런데 그게 이상할 만틈 어려웠다.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머릿속이 백지 처럼 텅 비어버렸다.
"여기에 있으면 숨이 좀 쉬어져요." 그 말이, 이상하게도 뇌리에 계속 꽃여서 놓아주지 않았다. 숨이 쉬어졌던 그날이 생각 나서였을까? 그 여름, 인천 부평시장 골목 어귀에서.
그날, 작은엄마가 데려간 곳은 베스킨라빈스였다. 나는 그곳을 티비 광고로만 봤고, 늘 먹어보고 싶어 갈망했던 곳이었다. 그런 곳에 작은엄마는 나를 아무렇지 않게 데리고 갔다. 그때의 설렘은 이루 말 할 수 없었고, 가게 문을 열었을 뿐인데도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 들었었다. 형형색색의 아이스크림들이 유리 너머에 누워 있었고, 작은 엄마는 그 중 하나를 가리켰다.
"담연아, 체리쥬빌레 이거 먹어봤어? 나는 이 맛이 왜 그렇게 좋은지 모르겠는데, 꼭 먹게 되더라."
나는 당연히 모른다 듯 고개를 저었고, 작은엄마는 웃으며 컵에 담아 건네주었다.
한 숟갈.
달콤한 체리향과 진한 크림 맛이 입안에 퍼졌다.
그건 단순히 아이스크림이 아니라 누군과와 나란히 걷던 여름의 맛이였다.
그리고 작은 엄마와 나란히 길을 걸었다.
작은엄마는 앞을 향해 보며 나에게 말 했다.
"이상하게 너는 조카 같지가 않고, 너랑 있으면 친구랑 있는 기분이야."
작은엄마는 그렇게 말하며, 입가에 묻은 아이스크림을 솥끝으로 쓸어냈다.
그 말이 나의 가슴 속에 오래 남았다.
누군가와 친구처럼, 가볍게. 설명 없이도 옆에 있을 수 있다는 건, 그 자체로 숨 쉴 수 있는 일이었다.
부평시장의 소음과 무더위, 시장 골목을 떠도는 비닐 봉지, 그리고 손에 들린 체리쥬빌레의 차가운
감촉까지. 모두 선명하게 남았다.
작은 엄마는 아이를 가 질 수 없는 몸을 가졌다. 작은엄마의 남편은 정규적인 직장이 없고, 늘 유동적으로 돈을 벌었으며, 술로 하루를 버티는 그런 남편이었다. 지금 생각을 해보면, 그런 환경 속 에서도 작은엄마는 웃음을 잃지 않으려 했다.
그날 나와 함께 아이스크림을 먹었던 날 유난히 많이 웃었던거 같다. 세일하던 옷가게 앞에서도, 잡화점 앞에서도, 나의 손을 꼭 쥐며 늘 이렇게 말했다.
"담연아 힘든 순간이 계속 있을때, 그냥 웃어. 웃으면 잠시지만 착각하게 되거든. 힘든 순간이 언제 있었지? 하고 말이야.특히 담연이 너랑 있으면 그 힘든 순간이 잠시 가려져."
그 말이 나에게는 오래 남았다.
그날, 골목을 돌며 들렸던 시장 상인의 외침, 어디선가 튼 대중가요, 뜨겁고 끈적한 여름의 냄새까지.
그때 숨을 쉴 수 있었던 것 같다.
다들 나에게 무언가 되라고 말했지만, 작은엄마는 그냥 함께 걷는 사람이었다.
말없이 옆에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작은엄마는 끝내 자살을 했고, 나는 그 상실에 쉽게 빠져나올 수 없었다. 출구 없는 터널을 계속 걷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러다 우연히 그녀를 그 빛을, 그 책방에서 마주쳤다.
그녀의 한마디에, 억지로 지우려 했던 작은엄마와의 추억이 떠올랐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신선한 충격과 이상한 평온함.
그녀를 보며, 나는 다시 숨을 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