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기.
벽지 색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연우에게 말했다.
벽지를 다른 색으로 바꾸겠다고.
벽지가 점점 검은색으로 변해갔다.
"담연아, 내 방 좀 치워줘."
연우 방에는 연우의 토사물이 며칠째
방치되어 있었다.
내가 이 짓을 하면서 수많은
남자들을 봤지만,
그날 그 노인은 달랐다.
신사 그 자체였다.
주변 남자들은 벌써 여자들의 가슴을
주무르고,
어깨에 팔을 두르고, 팁을 받기 위해
애교를 부리고 있었다.
나도 직업상 팔짱을 껴야 했지만,
그 노인에게서 풍기는 알 수 없는
정갈함?
그 기에 눌려 함부로 팔짱을 낄 수
없었다.
나는 그저 잔이 비워지기만을 기다릴
뿐이었다.
그렇게 주위는 노래 소리, 여자들의
추태,
남자들의 욕망 소리로 가득 찼다.
나는 그 노인에게 어떤 말도 걸 수
없었다.
침묵이 길게 이어진 끝에,
노인이 입을 얼었다.
"당신, 병원에서 봤어요. 며칠 전에
00병원에 갔었죠?"
"어, 네."
진짜 갔었다.
우리 엄마가 위암 말기에 걸렸다는
사실 앞에서
너무 슬프로,
이 가나한 현실 앞에
그때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하염ㅇ벗이 우는 것뿐이었다.
"왜 그날, 그렇게 슬프게 울었어요?"
"어머니께서 위암 말기인데,
수술을 당장 해야 한대요. 근데 수술비가 너무 비싸고..
저는 그 돈을 마련할 형편이 안
됐거든요."
"그 돈, 제가 갚아줄게요."
"네..?"
"근데 조건이 있어요."
나는 그 노인의 말을 가볍게 들을 수
없었다.
노인의 말투는
너무 무겁고 진지했다.
"뭔데요?"
명함 하나를 건넸다.
예상은 했지만, 00회사 ceo였다.
"내일 전화 해요.
낮에 전화하세요.
맨정신에, 술기운 하나 없이요."
다음 날,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저에요."
"아, 네."
"계좌번호하고 금액, 문자로
보내주세요."
그는 내 신상이나
어떤 조건도 묻지 않은 채
바로 돈을 주겠다고 했다.
나는 문자로 계죄번호를 보냈고,
금액도 적었다.
천칠백만 원.
띠링-
입금이 확인되었다는 문자에는
삼천만 원이 찍혀 있었다.
나는 바로 전화를 걸었다.
"이 돈은 너무 많아요. 받을 수
없습니다."
"조건이 있다고 했죠.
저랑 살아요."
나는 잠시 뜸을 들인 뒤 말했다.
"저,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 사람과 지금 만나고 있구요."
그러자 노인은 너무나 덤덤하게
말했다.
"저는 애도 있고, 마누라도 있습니다.
더 많은 돈을 원하면 줄게요."
"...저에게 사랑을 느껴서 이러시는
거에요?"
"사랑? 아니요.
이유가 궁금한 거라면,
일단 저랑 산 다음에 얘기해줄게요."
내가 술집 일을 하면서
나에게 '같이 살자'고 했던 남자가
이 남자가 하나뿐이었을까?
당연히 아니다.
하지만 이런 방식으로,
이런 접근으로 다가온 건,
이 노인이 처음이었다.
전화로 이 모든 걸
갑자기 결정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짧았다.
"만나서 얘기하면 안 될까요?
아니면 조금만 시간을 주세요.
혹시 제가 제안을 거절하면
돈을 다시 돌려줘야 하나요?"
"아뇨, 그 돈은 없어도 되는 돈입니다.
그냥 술집에서 팁 같은 거라 생각해 주세요.
그리고 오늘 안으로 결정해주세요.
제가 성격이 그렇게 느긋하진
않거든요."
"오늘 오후 8시에 병원 정문 앞으로
제 비서가 갈 겁니다.
그때까지 생각해주세요."
"아...네."
내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뚝- 하고 전화를 끊었다.
현수.
현수는 어떻하지?
일단 그를 만나기로 했다.
그 뒤는 상황에 맡기자고 생각했다.
현수에게 전화가 왔다.
"누나, 오늘 알바비 나왔는데..
어머니 수술비에 보태. 그러기엔
택도 없는 금액이지만.."
왜 하필, 오늘.
현수가 나에게 돈을 보낸다고 했을까.
온몸으로 죄책감을 느꼈다.
나는 말했다.
"너 등록금이잖아."
"아니, 나 휴학할 거야."
"야! 김현수! 됐어. 전화 끊어!"
수화기 너머 현수의 목소리를
무시한 채 전화를 끊었다.
"누나, 안에 있지? 나 들어갈게."
나는 현수를 보자마자 안았다.
그리고 옷을 벗었다.
너의 입술에 입을 맞추고,
너의 티셔츠를 벗겼다.
우리는 섹스를 했다.
시간은 그렇게 다가오고 있었다.
"남자친구 있어도 상관 안 합니다.
저도 결혼했다고 했으니까요.
오히려 공평하죠."
"...제가 당신과 사는 게,
과연 뭘 의미하나요?"
"의미? 그냥 그쪽을 보자마자
같이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의미가 그렇게 중요한가요?"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
"당신이 저에게 다른 걸 보여주면
돼요."
"그게 뭐죠?"
"그건 살면서 보여주시면 돼요.
다른 게 없다면,
그땐 바로 헤어질 거니까요."
"...그럼 저는 뭘 하면 돼요?"
그 노인과 나는 같이 살기로 했다.
물론, 현수에겐 말하지 않았다.
노인은 언제나 같은 시간에 와서
내가 차려준 밥상 앞에서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너무 자세하게 말하곤 했다.
나는 그저 들어주었다.
솔직히, 그의 이야기는 재미있었다.
사람은 단순하다는 둥
잔인하다는 둥.
포장을 하고 위선을 떤다는 둥.
돈 앞에서 얼마나 가벼워지는지.
그의 말은 나에게
흥미로웠고, 낯설지 않았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우리는 섹스를 했다.
"나 뇌종양이야. 곧 죽어."
"네..?"
"자식들은 내가 어서 죽기만을
바라고,
부인도 그래.
그게 그냥 느껴져.
내가 뇌종양에 걸렸다고 말한 그날
이후 식탁에서 그들의 말수가 줄었어."
나는 너무 놀라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는 말했다.
"위로 따윈 안해도 돼.
언제나처럼 내 말만 들어줘.
나는 그저, 내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을
원했을 뿐이야."
"가족들이 슬퍼서 아무 말 안 했을
수도 있잖아요."
"아냐, 내가 그날 피곤해서 일찍
잠들었는데 티비 소리가 너무 커서 깼어.
근데 그건 티비 소리가 아니라
내가 가족들이 내는 소리였어.
웃고 떠들고 있었다고."
"....."
"그날, 내가 뇌종양이라고 말했던
바로 그날.
내가 잠든 사이
그들이 웃고 있었다고."
그는 약간 흥분해서 말했고,
나는 가만히 들을 수밖에 없었다.
"다 내 실수야.
돈이 이렇게 사람을 망쳐.
내가 뇌종양이라고 말만 안 했어도
너 같은 창녀한테까지 오진 않았을
거야!"
그 순간, 내 현실보다
그 노인이 더 불쌍해 보였다.
가난이란, 진짜 가난이란
이런 게 아닐까.
노인은 끝내 눈물을 보였다.
나는 그를 안아주었다.
"내 재산 반을 줄게.
그 돈 받고, 이제 날 만나지 않아도 돼."
나는 순간 생각했다.
이 노인과 있을 땐
왜 현수 생각이 나질 않지?
꼭, 헤어지고 나서야
현수 생각이 났다.
내가 이 노인을 사랑한 거면, 어쩌지?
나는 감정의 혼란에 빠졌다.
현수는
내가 술집에 다닌다는 것도,
남자들과 2차를 나간다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나를 사랑해주었다.
늘, 자신이 부족하다고 가난하다는 걸
미안해했었다.
하지만
이 노인과의 만남만큼은
숨겼는데..
그날, 현수랑 섹스하고 나서
현수가 내게 말했다.
술도 잘 못 마시는 그가
술을 잔뜩 마시고 와서는-
"다 알아. 내가 못나서 그래."
"그래서 어떻게 됐어?
그 현수라는 남자는?"
"모르겠어.
어떻게 현수를 쓰고 보내줘야 할지."
연우의 방을 치우고,
나는 연우와 쇼파에 앉아
내가 쓴 소설에 대해서 길게 말했다.
연우는 내 이야기를 들으면
잠이 잘 온다고 했다.
"이상해.
누나 얘기 들을수록 잠이 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