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집
직남이 명함이랍시고 커다란 책을 나에게 건넸을 때 나는 적잖이 당황했다. 서점이나 도서관 가판대에서나 볼 법한 한 권의 소설책이 내 손에 쥐어졌다. 오히려, 책 표지를 특이한 컨셉으로 명함처럼 만든 건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하지만 정말 신기하게도 그 명함에는 갖춰야 할 모든 정보가 담겨 있었다. 그의 이름, 직책, 이메일, 전화번호, 팩스번호, 회사 로고(앞에 (주)가 붙는 기업이었다). 나는 한동안 그 명함(?)을 멍하니 쳐다봤다.
이게 명함인가요?
그가 당연한 질문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명함이라기 보단 책 같은데요?
저에 대한 정보를 꾹꾹 눌러 담다 보니 그렇게 됐어요.
그는 머쓱하게 웃어 보였다.
보통, 이렇게 명함을 전달하시나요?
아니요.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럼 왜?
오늘, OO 씨를 처음 만났고 좋았어요.
갑자기 이렇게 훅 들어온다고? 나도 작게 내뱉었다. 좋았다고. 말 그대로 좋았다. 잘 돼가?라는 친구의 카톡에 뿅뿅 하트를 보냈다. 큰 키에, 널찍한 어깨(그는 최근에 바디프로필을 찍었다고 했다), 나쁘지 않은 직장(아버지가 운영하는 회사의 실장이었고 언젠가 그가 사장이 될 참이었다) 오늘은 소개팅 첫날이었고 이 느낌대로라면 그와 자버리는 것도 문제없었다. 오히려 이 두꺼운 명함 대신 내가 바랬던 질문은,
칵테일 한 잔 더 할래요?
였다. 아쉽게도 그는 그럴 생각은 없어 보였다. 나도 급할 게 없어(또 만날 거기에) 서두르지 않기로 했다. 물론, 파우더 쿠션을 망치로 돈가스 두드리듯 미친 듯이 두드리긴 했지만. 그는 나를 집까지 데려다주었다. 나는 넌지시,
온 김에 집에 들렀다 가요.
그는 잠깐 망설이더니 뜬금없이 차 뒷좌석에서 종이백을 꺼내 불쑥 내밀었던 것이다. 안에는 꽃과 함께 그 이상한 명함이 들어 있었다. 전조등을 켜고 책을 쓰윽 열려 하자, 그가 완곡히 내 손을 잡았다. 강한 완력이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집에 가서 읽어봐요. 샤워하고 여유롭게.
혹시, 직남씨 사용설명서 같은 건가요?
음... 그는 잠깐 망설이더니,
이제 더는 누굴 오해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서요. 무엇보다, 저를 그나마 제일 잘 알릴 수 있는 방법이 이것밖에 없더라고요. 제 진짜 모습은 I인데 일할 때는 E에요. 사실, 우리가 누군가에게 솔직해질 수 있는 기회가 그리 많지 않잖아요.
근데, 왜 하필 글이에요?
내 질문에 그의 눈빛이 우울하게 바뀌어버렸다. 뭔가 사연이 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말에는 힘이 없어요. 너무 많이 뱉어내는 바람에 뭐가 뭔지 모를 때가 많아요. 그럴 때마다 오해가 생기더라고요. 상처도 받고요. 아쉽지만, 다시 그 말을 확인하고 싶어도 확인할 방법이 없어요. 이미 사라진 뒤거든요. 그걸 방지할 수 있는 방법이 글밖에 없더라고요. 우리는 서로를 알아가는 것도 바빠요. 그 사이를 오해가 빼앗아 가게 하고 싶지 않아요.
나는 그의 진솔한 모습에 적잖게 놀랐다. 나 역시 상대방을 오해했던 적이 있었고. 상대방도 나를 오해했던 적이 있었다. 나중에야 그 일이 그 정도로 다투거나 화를 낼 정도의 일이었는지 의문이 들었지만 이미 우리는 멀어지고 난 뒤였다. 왜 중요한 것들은 항상 시간이 지나고서야 명확해지는 걸까. 나는 갑자기 담배가 피고 싶어졌다.
알겠어요. 명함 한 번 들여다볼게요.
역사책이 아니라 지루하진 않을 거예요. 모두 소설입니다. 혜선씨가 말한 대로 저에 대한 사용설명서일지도 모르겠네요. 만약, 저에게 조금이라도 호감이 있다면 이 책이 꽤나 도움이 될 거예요. 저는 아주 단순한 사람이거든요. 그 속에 엄마 아빠는 뭐 하시는지, 직장은 뭔지, 지금까지 몇 명과 사귀었는지 등등. 저에 대한 거의 모든 정보가 들어있어요.
아직 읽어보진 않았지만 꽤나 솔직한 거 같은데요?
네. 맞아요. 제가 사는 세계는 꽤나 복잡해요. 이 정도 지시사항은 필요하지 않을까요. 내 모든 걸 다 보여주지 않고 어떻게 다른 사람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겠어요? 관계란 장거리 여행이랑 똑같다고 생각해요. 그쪽은 저에게 아르헨티나예요.
아르헨티나요?
대한민국에서 갈 수 있는 가장 먼 곳. 그 정도로 누군가를 알아가는 건 스펙터클 하고 어려운 일이에요. 동시에 즐거운 일이기도 하고요.
그는 뭔가 더 설명하려다 아차 했는지 입을 다물었다.
말을 너무 많이 했네요. 음... 시간이 얼마나 걸려도 좋으니, 내 명함을 읽어보고 나에게 연락 줄래요?
그럴게요.
기다리진 않지만 기다릴게요. 그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그렇게 나는 그의 제네시스에서 벗어나 집으로 돌아왔다. 참, 이상한 소개팅의 이상한 마무리였다. 즐거움은 어느세 증발해버렸고 생각할 거리들이 오히려 생긴 기분이었다. 그는 꽤나 무거워 보였다. 나는 집에 들어오자마자 책을 집어던졌다. 누가 이런 걸 읽겠는가. 솔직함을 말할 때는 항상 경계해야 한다. 솔직함은 지루하다. 나는 이제 그가 지루해질 참이었다. 알 수 없는 찜찜함이 남았고 만족스럽지 못했다. 데이트 이후 그에게서 연락이 오지 않았다. 그냥 즐거운 만남이었구나. 하고 나는 생각했다.
다음날, 나는 회사로 출근했고 다시 일주일치 톱니바퀴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의 명함의 존재는 잃어버렸다. 어느 명함이 그러하듯이.
그렇게 한 달이 지났다. 그 사이, 나는 두 번의 소개팅을 했고 두 남자 모두와 잠을 잤다. 쾌락적이었지만 그 이상은 나아가지 못했다. 베란다에는 텅 빈 초록병이 웅장하게 도열해 있었다. 하...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이 짓도 이제 지겨워졌던 것이다.
그때, 불쑥 그가 떠올랐다. 나에게 두꺼운 명함을 준 이상한 남자가.
책 같은 명함, 혹은 명함 같은 책은 책장 구석에 꽂혀있었다. 위로 먼지가 눈처럼 소복이 쌓여있었고. 후... 입김을 불어 먼지를 치워버린 다음 커피를 내리고 테라스에 앉아 책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아주 기분 좋은 일요일 오후였던 걸로 기억한다. 새의 지저귐이 들려오고 산뜻한 바람이 눅눅한 방안을 순환시켰다. 나는 표지를 넘겨 목차로 이동했다. 목차는 내 생각과 달리(아마, 나는 역사책을 떠올렸던 거 같다. 언제 태어났고 어떤 년도에는 뭘 했고 그런 일들이 줄줄이 지루한 기승전결로 이루어졌을 거라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우려와 달리 각각 다른 제목의 타이틀이 놓여 있었고 이야기는 서로 다른 헤프닝을 다루고 있었다. 마치 전혀 관계없는 거처럼. 가독성도 나쁘지 않았다. 나도 모르는 사이 끝까지 읽어버렸다. 시간을 별로 걸리지 않았다. 한 시간 정도. 화자도 나였다 그녀였다 그로 자유자재로 바뀌었다.
재밌었다.라는 게 처음 든 생각이었다. 이미 그에 대한 기억이 퇴색됐으니까(우리는 고작 한번 만났으니) 말 그대로 여유로운 주말 오후에 따뜻한 커피와 함께 시간을 보낸 한 권의 책이었다. 하지만 책을 읽어 내려가면 갈수록 그때의 일들이 잔잔한 파도 위로 뛰어오르는 날치처럼 통통 튀어 오르기 시작했다. 그가 했던 말들, 난처해하는 표정, 진지한 얼굴. 그리고,
이 명함을 읽고 나에게 알려줘요. 시간이 얼마나 걸려도 좋으니.
라는 대사. 나는 그의 연락처를 폐기하기 직전인 자료에서 찾아내 전화를 걸었다. 아주 평범한 통화벨이 액정 너머로 들려왔다. 명함 속의 그와 통화 너머의 그가 전혀 딴 사람처럼 느껴질 정도로. 안녕하세요. 그의 목소리는 침착했다. 의뢰인이 그의 회사에 의뢰를 하는 거처럼.
명함보고 연락드렸어요.
기다렸어요.
꽤나 복잡한 삶을 살아오셨더군요.
저만 그런 건 아닐 거예요.
저도 지금부터 명함을 새로 만들어 보려 하는데 혼자서는 안 돼요. 그쪽이 괜찮다면 저를 도와줄래요?
그의 웃음소리가 멀찍이서 들려왔다.
꽤나 두꺼운 명함이 되겠네요.
감당할 수 있겠어요?
두렵지만, 그래도 해보고 싶어요.
오늘 뭐해요?
이제 남은 제 하루는 당신 거예요.
그럼, 저녁이나 먹어요. 아, 그리고
그쪽 명함에 나는 영업당했어요. 완전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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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라이터스짐에서 관원을 모집 중입니다. 우리 같이 글근육을 키워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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