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상처 입은 어른의 양육이 문제인 이유
한 때는 육아프로그램, 전문가들의 양육 관련 강연을 찾아보곤 했다. 아이가 없던 때에도 오은영 박사의 코칭에 그렇게 열광했던 건 거기 나오는 모든 게 내 문제 같았기 때문이었다. 거기 등장하는 아이는 나에게 투영되었다. 조금은 나보다 더한 이도 있다며 위안 삼고 싶은 것도 있었다. 그리고 이제 웬만한 문제는 여러 날 잠 못 자고 고민해봤다 싶고, 교육학에만 집중된 '아이에게 -해야 한다'라는 수많은 지침이 엄마로서 버겁게 느껴지면서는 멀리하기 시작했다. 나는 교과서가 아니고, 이제는 그런 걸 찾아보지 않는다. 바깥의 왈가왈부 말고, 나와 내 아이의 문제만 들여다보려 노력 중이다.
나는 평생을 헤매고, 또 찾고 있었다. 일일이 파헤치고 싶었다. 내 이 성격은 누구에게서 왔고, 자라면서 무엇이 내게 어떤 영향을 끼쳤고, 근본적으로 어떤 사고방식이 문제이며, 이것을 자각하고 고칠 것인지, 알아도 고치지는 못할, 끊어내지도 못할 마지막 내 본성인지 끊임없이 생각했다. 아빠로부터 시작해 여태 해결되지 못하고 있는 문제들은 전문가들의 말에 의하면 내 아이에게 좋지 못한 방식으로 재생산될 수 있었다. 나는 거기에 아주 민감하게 반응했다.
대부분은 내가 상처 입은 것에 집중하며 '나와 같지 않게' 하려고 애쓰면서도, 별 수 없이 보고 듣고 체득해 온 대화방식, 문제를 대하는 방식, 이미 가진 관념 같은 데에선 '나도 그랬는데, 이 정도면 뭐' 하는 익숙함에 내려놓게 되는 것들 중 문제가 있었다. 그리고 그 문제라는 것은 나와 남편이 다를 수밖에 없고, 또한 서로가 자신의 과거에서 벗어나려 애쓰는 것과 상충하기도 했다.
갈등의 씨앗이 되고 만 상충은, 평소 조심조심 대화하는 우리 부부에겐 서로 담아두고 지켜만 보던 것과 달리, 내가 나의 그 민감한 영역에서 자꾸만 먼저 튀어나오며 촉발되었다. 내가 이곳에 처음 토해낸 아빠의 이야기에서처럼, 내가 어릴 적 들은 큰소리나 폭언을 아이에게 똑같이 듣게 할 재간이 내겐 없었고, 그건 아무리 심각한 훈육 상황이라도 같은 것이었다. 그것이 오냐 오냐가 될 것이냐 아니냐를 놓고, 그렇게 아이의 폭풍 같은 자아발현과 함께 속에서 클 대로 커진 문제가 한 번씩 터져 나왔다. 그러니 훈육의 문제는 사실 훈육방식뿐만 아니라, 나와 너의 문제, 그리고 곧 집안내력의 문제로 확산되기도 해서 부부싸움이 되기 아주 쉬운 것이었다.
주변에서 대체로 이 시기는 아이 입장에서 마음을 읽어주지 못하는 것, 아이를 놀리거나 건드리는 것, 아이에게 너무 어른스러움을 요구하거나 불 같이 화를 내고 마는 것과 같은 문제로 남편과 갈등하게 된다는 얘길 듣곤 했다. 그런 게 누구에게나 일관된 특성일 수 없듯, 우리 집에선 내게서도 남편에게서도 뒤죽박죽이라 서로 할 말이 없다. 우리는 아직 완벽히 어른이 되지 못했고, 똑같이 나아가는 중이다.
'버릇 나빠질까 봐'가 주된 이유인 우리 때의 엄한 훈육과, 이제는 아이의 마음을 읽어줘야 한다고 하는 감성적 훈육 사이에서 명제 같은 답을 찾기도, 주변상황에 1도 상관 않는 일관된 대응을 하기도, 균형을 찾는 것도 쉽지 않다. 너무 달라진 양육지침 속 부모의 일상에 대한 현실적 배려는 전혀 없어서 아이에게 해줘야 할 것과 화가 나도 지켜야 할 것들만 우후죽순, 아이 키우기 어렵다는 얘기는 여기서도 나온다. 각각의 혼돈 둘이 합쳐져도 함께 길을 찾아가면 다행이지만 우리는 대체로 우당탕탕 대혼돈 속을 달리고 있다.
상처는 누구에게나 있다. 싸안고 잊고 지낼만한 상처인지 아닌지의 차이일 뿐이다. 부모는 신이 아니고, 부모도 배워가는 과정이었을 것이며, 지금은 조금 바뀐 데가 있고, 여전히 바꾸지 못한 본성이 있다. 부모도 잘못했다면 욕먹을 수 있다. 아마도 자식 한정. 그 부모는 우리의 부모이고, 똑같이 우리다. 부모와 나를 어릴 적 감정적으로 일찍이 분리해 버린 나는 아무렇지 않게 산술적으로 나의 문제, 부모의 문제, 우리의 문제를 분석하는 데 능했고, 언젠가 아이에게 혼도 날 각오가 되어있지만, 부모의 권위와 가족의 가치를 크게 여기는 남편에게는 이상하게 여겨질 말이었다. 나 역시 왜 부모와 내가 동일시되어야 하는지 여전히 이해 못 하기는 마찬가지다.
각각의 문제를 가진 어른, 완벽할 순 없는 사람, 메우지 못한 채 시작되어버린 양육. 언제라고 해결할 수 있었을까, 닥쳐서야 내 마음도 다시 보게 되는 것을. 결국 아이가 커가는 속도보다 내가 진정한 어른이 되는 속도가 더 느릴 것임을 조금 예감한 나는 결심했다. 완벽하게 해 줄 수는 없겠다, 너에겐 지금보다 미래가 더 나은 엄마이기만을 바라는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