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른. 언어. 생활
다섯 살 아이는 말 맛을 이제 조금 안다. 모를 때와 조금 알 때는 많이 달라서 제법 장난도 칠 줄 안다. 반대말도 해보고, 발음이 비슷한 된소리도 내보고, 알면서 아주 다른 엉뚱한 소리도 해본다. 그것이 너무 재미있는지 저는 B라는 다른 말을 해놓고선 제 의도대로 A라고 알아먹는지 날 시험하는 때도 꽤 된다.
몇 번쯤 같이 장난치며 웃어주다가 마음이 급할 때는 알면서 왜 저러는지, 답조차 끝내 말해주질 않아 저도 나도 악을 쓰다 끝이 난다. 말놀이. 말을 가지고 놀 줄 알아야 말이 는다. 늘 바쁜 어른의 사정을 아이가 알아줄 리 있는가. 같이 놀고 싶은 제 속을 알아주지 않는 어른에게 서운함을 그렁그렁 매단 눈을 마주하고서야 끊어질 뻔한 이성의 선을 다시 잇는다.
엄마가 전에도 얘기해 줬지? 말은 약속이라고. 사람들이 이럴 땐 A라고 말하자고 약속을 했어. 그런데 계속 B라고 얘기하니까 엄마는 알아들을 수가 없었어. 아마 다른 사람들도 A라고 한 게 아니니까 못 알아들었을 거야. 모두가 그렇게 알고 있기 때문에 A라고 생각하면 A라고 말해야 다른 사람들이 너의 생각을 듣고 이해해 줄 수 있어. B라고 계속 얘기한다면 너의 마음을 아무도 알아줄 수 없을 거야. 앞으론 A라고 얘기해 줘?
약속이라는 너무 순수한 의도의 단어에서 멈칫, 설명처럼 100퍼센트 바르지만은 못한 어른의 언어를 떠올리며 목에 무언가 걸린 듯 서둘러 알겠지?라고 얼버무리고 마는 치졸함. 아이에게 무언가 알려줄 때 나는 때로 내가 어른인 척하는, 사실은 현재 같은 시공간을 공유하며 살고 있을 뿐인 러닝메이트 정도임을 여실히 깨닫곤 한다. (실제 내 삶에 비해 가진 어른과 도덕성의 기준이 너무 높은 것일 수도 있다.)
말은 약속이다, 그렇게 쓰기로 약속했다, 요즘 아이에게 자주 하는 말. 물론 여기서 말한 약속이란 단순히 단어의 정의를 이른 것이었지만, 약속이란 단어 앞에 속절없이 찔려버린 어른의 양심엔 바른 언어생활이란 늘 너무 가차 없다.
나름대로 바른 말과 고운 말, 질 좋은 언어, 표현의 다양성을 아이 앞에 보이고 싶어도 정제된 글과 구어는 다르고, 속된 표현에 내 갖가지 번뇌까지 버무려 일시적 감정으로 토해내고 나면 이젠 회수 불가. 세상과 싸우며 멋들어지게 써 온 내 유려한 힐난의 어조를 그 조그만 아이의 무해한 음성으로 듣고 나면, 그 앞에 무릎 꿇지 않을 어른은 없을 것이다. 그 두 목소리에서 느끼는 삶의 격차는 듣는 어른만 알 것이다.
어른들은 모두들 머리로 아는 약속된 말을 학습한 대로 때에 맞게 잘 쓰고 있을 것이다. 그것이 약속과 효율임을 또한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나쁜 말도 약속 삼고 싶진 않다. 살다 보면 나쁜 감정도 있고, 그걸 표현하는 게 다 잘못된 것도 아니지만 약속하고 써야 할 정도의 나쁜 말들은 필요할 일도, 아이 앞에 자주 드러날 일도 없었으면 좋겠다.
오늘도 아이는 순수의 거울로 나의 '말'과 어른들의 '약속'을 비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