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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인셋 Jul 06. 2023

얼룩진 글

아무것도 쓰지 못할 때도 일상의 나는 웃고 있다


글을 쓰면서는 나를 평균내고 싶지 않다고 한 적이 있다. 나의 뾰족하고 무딘 양 끝까지 받아들이기로 한 것은 글을 자주 쓰면서는 당연히 감내해야 할 것이었고, 가끔 마주하기도 싫지만 그 감정들을 내 평균에서 벗어난 것이라는 이유로 내 것이 아닌 척하지도 말아야 했다.


그러나 신기하다.


나는 그동안 꺼내지 못하고 속에 묵혀둔 말들이 많으니 당연히 견디지 못해 쏟아져 나오고 마는 것이라고만 여겼다. 더 큰 갈등은 글조차도 쓰지 못하게 만들었다. 너무 뜨거우니 말머리 하나를 손으로 집어다 내던지지도 못하는 모양새였다. 감정이 최소한의 경향이라도 있어야 글을 쓸 수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정신질환자가 쓴 것 같은 글로 보일 터였다. 지금도 끓는 무엇을 꺼내 바르게 색칠한 것이 못되니, 저 혼자 부글부글 하다가 튀어 오른 지저분한 얼룩 같은 글이 될 것이다.


이렇게 끓는 속에도 다른 측면의 나는 내 생활을 이어가야 한다. 이런저런 사람에게 내 기분이 좀 반영되어 버린 리액션을 할 수도 있고, 내 표정은 이미 다 드러나버렸을지도 모르지만, 어른 흉내를 내겠다고. 기분이 나쁘면 종일 툴툴대고 다니던 사춘기 때가 떠오른다. 두 배를 살았지만 고작 이만큼 발전한 거다. 사실 내 속은 그 때나 지금이나 그리 다르지 않을 것이었다. 포장하는 기술이 늘었을 뿐. 그러니 더 나이를 먹어도 존경할만한 '어르신'이 되긴 글렀다.


 (굳이 존경을 받고 싶다기보단 그런 '어른'이 되고 싶다. 하지만 주변에서도 늘 보듯, 나이 먹는다고 절로 어른이 되는 건 아니라서 나 또한 못 이룰 꿈처럼 마음속 큰 가치로만 품고 산다, 아직은.)




손의 감각을 잃을 정도로 나를 얼얼하게 하는 감정은 내 뇌로 하여금 오히려 '나를 정상적인 사람으로 보이게 하는 것'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사회적 동물로서 본능적으로 그 '사회성'을 유지하기 위한 장치인 건지. 나는 누군가와 웃고 농담하며 아주 유쾌한 모습으로 밥을 먹었고, 평소와 다름없이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아무 문제없는 듯 일을 하다가, 무언가를 읽을 땐 다시 감정이 새어 나와 집중을 못하고, 가장 친한 친구와 통화하다가는 부들거리며 감정을 조금 쏟아냈다.


그리고는 곧 내 나쁜 감정을 뭐 좋은 일이라고 누군가에게 잠시의 한숨으로라도 옮기고 말았는지, 하며 개운치도 못할 실망감이 든다. 내 그릇에 아슬아슬하게 그득 찬 것을 대하는 자세는 어떻게든 표면장력으로라도 담아내보려 하는 의지였다가, 아 몰라 어쩌라고! 하며 대뜸 걷어차 흩뿌려버리기도 하는 변덕 사이를 위태롭게 오간다.


표면장력이 커질 수 있는 걸까. 감정을 다루는 능력, 그건 타고난 물성을 바꾸는 일이니 쉽게 되는 일이 아니다. 그러면, 그릇이 커지는 건. 살면서 그릇은 커지는 거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별로 그렇진 않았던 것 같다. 그릇이 버텨주는 건 '상식'이라고 생각되는데, 살면서 상식이라는 선이 달라지는 일은 잘 없다. 둘 다 아니라면, 삶에서 겪는 고통은 점점 더 다양해지고 커지기만 하는 거라면, 그냥.. 버티고 사는 거였다. 나쁜 사람이 익숙해지는 건 없다. 세상엔 저런 사람도 있었지, 저 인간 또 저러네, 하고 포기하는 마음이라면 모를까.


삶은 고작 한 순간이라 해도 여러 색으로 물들고 있었다. 찰나에도 얼굴과, 가슴과, 머리의 여러 색을 유지하는 데 많은 에너지를 쓰고 있다. 그렇게 열을 내다가 고장 나버린 TV처럼, 얼룩덜룩한 광원이 되어버리진 않을까. 삶의 모습은 제각각이라는 게, 나 하나에서도 알맹이와 껍데기가 따로 노는 거였나. 하긴, 잠시의 망각도 집중도 없다면 다른 건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것이었다. 복잡한 어른 인간의 역할은, 그랬다. 어른이 되던 때에는 희망차게도 너의 색을 칠하라더니, 모든 색을 다 써대느라고 웃긴 삶이 되어가고 있다. 얼굴이 일그러질 것 같다.


글이, 다시 시작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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