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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인셋 Jul 09. 2023

엄마의 이혼을 바라는 딸

저 깊은 골짜기


넉넉하진 않지만 끝이 보이지 않는 저 물줄기는 어디서부터 만들어졌을까. 저 높은 꼭대기, 비 한 방울에서부터 땅 속으로 머금고, 이 갈래 저 갈래에서 모여 모여 흐르고, 세월에 파이고, 커진다. 저 아래까지 그렇게 흐른다면 어느새 웅덩이가, 계곡이, 폭포가 될 것이었다.


결혼생활, 감정의 소용돌이 또한 그렇게 흐를 수 있다. 거꾸로 거슬러 갈 수는 없는 것처럼, 물방울 하나하나의 이야기가 티 나지 않게 다 모여야만 이루어지는 것처럼. 엄마의 이야기를 내 것인 양 쓰고 있는 건 내가 붙잡고 살아온 유일한 끈 - 엄마와 그만큼 감정적으로 동기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괜찮은 결혼생활이라도 여자와 남편과 시가라는 게 어떻다는 걸 눈곱만큼이나마 느낀 탓이다.


아, 내 브런치의 100번째 글. 축하한다. 이곳에서의 시작도 당신이었고, 또한 당신은 열심히 쌓아온 내 글 중 하필 영광스럽게도 의미 있는 숫자에 다시 한번 안착했다. 아직도 끝나지 않은 갈등, 도려내고 싶어도 쉽게 떨쳐지지 않는, 우리는 그런 사이다.




이제 목을 틀어쥐고 있는 건 그 사람이 아닐지도 몰랐다. 그렇게 견뎌 온 수십 년도, 지켜야 할 어린 자식과 최소한의 신뢰 없이는 빛을 잃었다. 엄마는 점점 쏟아지고만 있었다. 살을 도려내듯 스스로 바위를 깎아내고 있었다.


바란 지는 아주 오래되었다. 부모의 이혼을 바라는 딸, 한 술 더 떠 부추기는 딸. 당신의 일이니.. 손 놓고 기다리는 것도 힘겨운 일이었다. 서서히 애정하는 누군가가 말라비틀어져가는 것을 지켜보는 것, 그 이가 망가져가는 데 적응해 버리곤 결국 내 삶에 돌 하나 더 얹기 싫어 보기 불편함을 토로하게 되는 것, 이런 때의 자식이란 나서줘야 하는지 아니면 저만 살겠다 이기적으로 부모를 등진 죄책감에 시달려야 하는지 헷갈리게 되는 것. 지극히 현실적인 것들을 눈앞에 두고 행동에 옮기지 못했으니, 역시 그것을 위해서는 지독한 싸움을 시작해야 할 것이었다.


그 목을 이제 좀 놓아주라고, 당신이 유일하게 지키고 싶었던 그 가족이란 틀은 진작 깨진 지 오래라고, 깨진 유리창을 고작 테이프로 붙여둘 순 없는 거 아니냐고, 이제 말을 꺼내야 한다. 나는 기꺼이 담보가 되기로 했다. 당신과 가장 닮은, 당신이 가장 아끼는 딸인 나이니. 아니, 기껍진 않았다. 어릴 적부터 공포에 적셔진 뇌는 이럴 때 정상적으로 작동하기 어려웠다. 나에게도 이젠 지킬 것이 있었다. 그러나 당신에게 대항할 수 있는 건 똑 닮은 나뿐이다.


이 유전자의 영향으로 나는 급발진을 하게 될지도 몰랐다. 막말을 퍼부을 참이다. 그는 자신이 해 온 일상의 언어가 남들에겐 막말이었던 줄도 모르고 본인의 상처에만 마음 아파하며 길길이 뛸 것이었다. 그러니 같은 피인 그 역시 무슨 사달을 낼지 모른다. 우리의 갈등이 한번 더 피를 봐야만 끝나는 일이 되지 않기만을 바란다.


엄마가 하루라도 이 지옥을 벗어났으면, 아무도 신경 쓰일 일 없는 자신만의 삶을 살아봤으면, 속박과 의심과 폭력 속에 움츠러들었던 삶을 깨끗이 빨래해 버렸으면, 여자도 사람이라는 걸 알아주는 이들만 옆에 두고 살기를, 덕택에 딱딱해진 심장에 가당찮은 여성스러움을 요구당하는 일 따윈 없기를, 당신에겐 티끌 하나도 아까워 한 쩨쩨함은 누구에게서도 다시 마주할 일 없기를, 당신의 마음을 고작 소유물 대하듯 하는 이에게 허투루 쓰지 않기를, 갱생 불가의 인연이라면 최대한 안 보고 살 수 있기를, 평생 각박했던 삶에 진정한 마음 받아볼 일도 있기를, 뭘 해도 했을 그 아까운 재능을 늦게나마 조금 펼쳐보기를, 사실은 마음먹으면 훨훨 어디든 떠날 수 있었음을 하루빨리 깨닫기를, 그저 번뇌를 묵묵히 견뎌 온 대가로 이제 늘 마음 평안하기를.


평생 하지 못해 꼭꼭 씹어먹은 말을, 이제 마음속 주홍빛으로 달아오른 열선 같은 것을 펜 삼아 꾹꾹 눌러쓴다. 뒷장의 뒷장까지 눌린 자국 모두, 흔적도 남김없이 타 버리기를.


너무 늦었지, 엄마.

축하해, 이혼. 이제 시작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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