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게 무슨 말이야?
남편은 술을 기분좋게 마시고 들어오면 재잘재잘 말이 많다. 가끔은 투덜거리는 회사 얘기도 들어줘야 하는데, 내가 아이 기운에 먼저 나가떨어져 입을 닫게 만들었으니 스펙트럼 넓은 이런 이야기라도 재미로 도란도란 나눠본다. 가끔 물론 왜 이런걸로 언성을 높여야하는지 모를 열띤 토론이 되었다가, 이제 그만해! 소리가 나올 때쯤 남편의 애정 표현으로 끝이 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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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5억년 전이 진짜 시작이 맞을까? 빙하기는 한 번이 아니잖아..멸종이란 걸 진짜 믿을 수가 있나? 이렇게 인간이 진화된 것이 과연 이번이 처음일까? 지구과학도 역사와 무관할 수 있어? 지구과학을 믿을 수 없는데..
>> (뭔 소리야..) 그럴려면 근거를 대야지! 성립이 되지 않는 얘기지. 지구과학은 역사가 아니라 측정에 기반한 과학이고, 못 믿겠다면 믿을 수 없는 근거가 있어야지. 너나 나나 지구과학의 측정의 원리도 설명할 수 없는 사람들이 45억년의 진실을 논하는게 맞아?
(지구과학을 전공한 것은 아닌, 단지 흥미로 지구과학II를 배운 자는 욱하고 만다.)
> 그렇네..믿을 수 없다기보단 궁금한 쪽이지. 어쨌거나 그걸 사실이라고 확인할 길은 없는거니까. 인류와 문명이 이만큼 발달한 건 정말 처음이 아닐 수도 있잖아!! 증거가 사라져버렸을 뿐인지도..! 고대 이집트나 마야문명을 봐. 그 시대에 어떻게 그런게 가능했을까? 더 대단한 걸 만들었을지도 모르잖아.
(UFO와 외계생명체도 믿는 이 남자는 때로 이런 심오한 주제를 내놓는다..)
>> 인간이 살아남고 진화해서 이 정도의 문명을 이룬 건 소 뒷걸음질 치다 쥐 잡는 격의 확률을 몇 번이나 겪어야 가능한거라고. 그게 그렇게 쉽게 되는 일이겠어? 뭐..혹여나..진짜로 알 수는 없는거겠지, 그렇게 따지면 역사도 믿을 수 없긴 마찬가지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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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쨌거나 신기해. 한 100년, 150년의 과학은..어떻게 이렇게 비약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을까? 몇 백년 전만 해도 삶의 질로는 엄청나게 다른 삶을 산 거잖아. 의학도 그렇고.. 레오나르도 다빈치 이런사람들은 정말 대단한 것 같아. 어떻게 그 당시에 그런 참신한 것들을 생각했을까? (TV광고를 보며) 문명과 과학이란..
(우리 부부는 둘 다 생물 관련 전공자다.)
>> 좋게 쳐줘봐야 500년 정도지..하긴 소독이 뭔지, 전염병을 어떻게 해야되는 지도 모르던 때가 있었으니..근데 어쩌면 우리는 조련된 거 아닐까? 결국은 자본을 가진 자들이 필요와 수요에 의해 무언가를 만들었고, 돈을 더 벌기 위해 (시작은 아니었을지 모르지만) 대량생산을 했고, 우리는 거기에 익숙해졌고, 점점 더 편리를 추구하고, 지금은 없으면 안 돼서가 아니라 단지 더 편하고 남들만큼 갖기 위해서 그런 것들을 소비하잖아? 몇 백년이 지났지만 그 때의 사람들이나 우리나 그렇게 살아가는거지. 결국은 스스로 문명을 누리고 주체적으로 소비한다고 생각하지만 그걸 이용하며 살 수 밖에 없도록 만들어진건지도..지금처럼 사람들이 과학을 신봉하지도 않고, 단계적으로 발달해 온 것도 아니니 그 땐 그런 사람들이 있어서 빨라지긴 했겠지..
> 그렇네..당한거네..(그리고 대충 우리는 그런 사람들 발톱만큼도 따라가기 어렵단 얘기..살면서 뭔가를 남기지 못할 것 같다는 얘기..삶의 의미..같은 것..블라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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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무지렁이 이과생 부부의 주제없는, 대중없는, 정처없이 떠도는 얘기)
그러니까..기껏 술 먹고 나름 일찍 들어와선 지구와, 인류와, 문명과, 과학의 발전과, 삶에 대해 논하면서 45억년을 왔다갔다 하다가, 곧 있을 이사까지..그렇게 두어시간쯤, 둘 다 눈을 끔뻑거릴 때까지 한껏 떠들다 아주 늦은 시간에 잤다는 얘기..
우린 취중에도 이런 시시콜콜하고 답 없는 삶의 얘길 좋아한다. (나도 혼자 맥주 한 캔을 마셨다.) 이 날은 평소 굉장히 날 선 사회비판을 하곤 하는 저 남자가 과학 앞에 둔해져 저런 소릴 하고 (우리의 전공에 대해선 나름 나를 더 우대해 준다.).. 우리의 관심과 대화의 주제는 어디까지일까. 누군가가 보기에는 그다지 심도있는 지식은 아닐지라도, 부부 간에 이런 대화도 가능하다는 건 꽤 흥미롭고, 비슷한 우리에겐 나름 다른 의견을 나눈다는 데서 유익하고, 서로 알게 모르게 존중할 수 있는 사이로 여겨지는 일임에는 틀림없다.
자려고 눕다가는 왠지 피식, 웃음이 난다.
넌 참 별게 다 궁금한 남자구나..너의 상상력은 나와는 좀 달라서 좋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