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문에도 유행이 있었어요
내가 고등학교에서 진로를 고민하던 때, 생명과학 붐이 일었다. 유망한 학문과 직종으로 각광받기 시작했고, 뉴스에 매일같이 보도되었다. 나의 진로 선택이 오로지 그것 때문이었냐 하면 그렇지는 않지만, 전혀 상관이 없던 것도 아니었으니 이미 진학한 이후의 사건은 (입시 면접에서 뭐라 대답해야 할지 곤란했고, 생명공학을 공부한 사람이라면 대체로 언급하기 조차 꺼려하는) 내 수능점수가 아까운 일, 진학이 조금은 후회되는 일, 내 미래가 불분명해지는 일이었다.
과학을 잘해서는 절대 아니지만 중학교에서 과학반 활동을 하며 실험의 재미에 조금 빠져있던 나는 마침 과학의 이런저런 분야를 기웃거리고 있었고, 일찍이 이것이 내 길이라고 점찍어둔 것이었다. 생물은 산 것을 다룬다는 점에서, 곧 내 삶이라는 점에서 흥미로워야 하지만 고등학교 생물은 어쩐지 눈에 보이지 않을 것만 다루어서 딱히 재미가 없었다. 조곤조곤하셨던 생물선생님 목소리만 들으면 그렇게 잠이 왔다.
그런 주제에 진학상담을 하면 대학에 과까지 정해두고 꼭 거길 가겠노라고 2년을 뚝심 있게 밀어붙이는 애를, 말미쯤엔 선생님도 포기하여 (아마도 나를 위해서나, 더 나은 진학 성과를 위해 하신 말씀이었겠지만..) 볼 때마다 피식, 웃으시며 아직도 거기냐, 안 바뀌었냐 묻곤 다른 얘긴 하지 않으셨더랬다.
많은 학생들이 그런 것처럼 막상 전공분야의 공부를 처음 접했을 때에는 이 길이 나한테 맞는 건가, 이렇게 어려울 일인가, 이걸 왜 배워야 하는 건가 라는 생각을 나 역시 심각하게 했었지만, 4년을 다 배우고 더 배워도 어렵고, 또 더 배워도 새롭다는 사람을 보면 그 작은 책 하나 보고 못 하겠단 생각을 하는 건 당연한 것이었다. 2년을 가겠다고 부르짖었지만 나는 클로닝도, 배아줄기세포에 대해서도 1도 모르던 학생이었다.
학문에도 유행이 있다는 건 참 인정하기는 싫은 얘기지만, 꼭 그런 단어로 표현되는 게 아니라도 분야마다 눈부신 발전을 이루는 황금기는 있는 법이다. 생물과 의약분야는 다른 산업에 비해 그 시작이 늦었지만 필요와 수요가 여전히 충분하고, 고도의 기술에 힘입어 더 나아갈 동력이나, 인간의 생명과 먹는 것과 환경까지 다 이해해야만 직성이 풀리겠다는 그 호기심까지 감안한다면 유망하다는 건 맞는 말이다. 분야마다의 융합까지 생각하면 생명과학의 가능성은 무한하다.
뭔가에 잠시 관심을 갖기로는 문어발식 못지않은 나는, 몇 번의 이직에서 조금씩 다른 분야를 경험해서 그게 깊이없는 나를 내보이는 것같아 자신없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어디서나 일은 확장되는거고, 내가 하나를 보고 가도 경험하게 될 것은 둘, 셋, 가끔은 어디로 튈 지 몰랐다. 조금 더 경험이 쌓였다고 깊이 내려가려면 디딜 곳도 필요한 게 보였고, 그 디딜 곳이 다른 데보단 깊은 곳일 수도 있었다.
고작 얼마 뒤의 내가 보기에도 지금의 나는 우습다. 그러니 지금의 내가 헤매는 건 당연하지만, 어느 방향으로든 성장하고 있음을 마음 속에 새겨둔다면, 그리 고통스럽지 않게 배우며 내 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진득하니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