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참 깊은 거더라고요. 그리고 쉽게 안 와요.

마음속에 품고 사는 사람 한 명쯤은.

by 유은


처음으로 정말 사랑했던 사람과 남이 되어봤고, 그 시간을 저만의 방식으로, 나름 현명하게 지나고 있어요.


혼자 산 지 10년이 되어갑니다. 배달 음식만 먹던 제가 생존 요리를 시작했고, 글을 쓰며 시간을 보내고 있어요. 낯선 사람들과 ‘회복탄력성’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타인의 삶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누구나 저마다의 기준으로 애쓰며 살아가고 있구나, 그런 생각이 드는 요즘입니다.


예전엔 그 사람의 기준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게 익숙했는데, 이제는 그의 지인이 아닌 전혀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면서 오랜만에 시야가 넓어지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리고 문득.


“너의 선택을, 그리고 앞으로 어떤 선택을 하든 이젠 불안하지 않고, 존중할 수 있을 것 같아. 물론 앞으로 내가 알 수는 없겠지만.”


그게 그 사람이니까요. 사실, 저와 함께했던 사람은 온전한 자신이 아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저 제게 휩쓸리고, 물들었던. 잠시 제 옆에 있던 사람의 형태였던 것 같아요. 무언가를 끝낼 때의 마지막 뒷모습, 그리고 그 후 혼자 남겨진 모습이 어쩌면 진짜 그 사람일 거란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이제는, 제가 그 사람을 안다고 말할 수 없을 것 같아요. 그저 내 옆에 잠시 머물렀던 하나의 형태로 기억할 뿐입니다. 사랑은 사랑으로 잊힌다잖아요. 한때 세기의 사랑 같았던 관계들도 결국은 다른 누군가와 다시 시작하더라고요. 속마음까지는 모르겠지만, 그럴 때마다 느끼는 게 있습니다.


“아, 이성 간의 사랑이란 건 생각보다 부질없을 수도 있겠구나.”

“사람은 생각보다 많고, 다른 것들로 덮일 수도 있겠구나.”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어떤 지점에 취약한 사람인지, 무엇을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인지 정확히 아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도요.


우리는 외적인 취향이나 가치관, 생활 습관을 중요하게 여기지만 결국 관계에서 가장 결정적인 건 상처인 것같아요. 99%가 다 맞아도 서로의 상처를 건드리는 순간, 그게 고의든 아니든 관계는 쉽게 회복되지 않는다는 걸 뼈저리게 배웠습니다. 예민한 사람 곁엔 무던한 사람이 있어야 하고, 잘 잊는 사람 옆엔 속이 깊은 사람이 필요하니까요. 맞지 않는 사람들이 서로를 위해 노력하는 건 참 어렵고, 힘든 일인 것 같아요. 그런면에서 언젠가 노력이라는 건 무너질 수 있는 아슬아슬한 탑 같기도 하고요. 우리도 결국, 오래된 갈등 끝에 정말 한순간에 끝이 났습니다. 너무 보통의 이별이었습니다. 맞지 않음을 애증으로 붙잡고 있다 결국 한 사람이 소진된 것. 저는 부질없다며 좌절하기보단 그 감정을 정면으로 마주하기로 했습니다.


첫 글의 제목처럼, 저에게 가장 큰 위로가 되었던 건 타인의 이별이었습니다. 드라마 속 장면, 책, 강연, 인터뷰 속 이야기들. 이별은 누구에게나 특별하면서도 동시에 누구나 겪는 일이라는 걸 알게 된 순간, 마음 한편이 조금 가벼워졌습니다. 가장 힘들었던 건 그 사람의 말과 나의 행동을 끊임없이 복기하는 일이었습니다. 조금 더 성숙하게, 서로의 마음이 변했음을 인정하며 차분히 대화했더라면 덜 아팠을까요. 하지만 지나간 가능성을 자꾸 반추하는 일만큼 어리석은 자해도 없다는 걸 이제는 압니다.


저는 성숙하지 못한 사랑과 이별을 했습니다. 글로 풀어보니 그게 더 선명하게 느껴지네요. 너무 아이 같았던 저의 모습은 이제 그 사람 기억 속에만 남겨두고, 저는 제 자리에서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려 합니다. 물론 제 기질이 완전히 사라지진 않겠죠. 대부분의 시간은 여전히 무모하고 철없을지도 모르지만, 더 이상 누군가가 떠날 이유가 되진 않았으면 합니다. 이 완전한 다짐도, 아팠기에 가능한 것 같습니다. 제가 너무 좋아한 그 사람은 어른이었고, 저는 그저 어린아이였던 것 같아요. 그래도 저는 좀 더 솔직했고, 순수했을지 몰라요. 모든 건 양면이 있으니까요. 결국 상처보다 사랑이 크지 못했기에 그 사랑은 끝이 났습니다. 하지만 저는 계속 제 이야기를 써보려 합니다. 그게 지금의 저에게 새로운 참을성이 되어주고 있으니까요. 그 사람은 제게 조금도 없던 인내심을 남기고 떠났습니다. 그것만으로도 고마운 사람이에요. 사랑은 결국 ‘온도’와 ‘방식’이라는 걸 이제는 압니다. 그리고 결국 ‘닿는 것’까지가 완전함이라는 것도요. 연애를 통해 저는 저 자신을 알게 되었습니다. 늦게서야 알게 된 것들. 적당히 사랑했더라면 그 사람을 그렇게까지 몰아세우지 않았겠죠. 받지 못한 것만 탓하지도 않았을 테고요. 그 사람이 원하던 걸 처음부터 제가 줄 수 있었더라면, 그 사람도 저를 이렇게까지 힘들게 하진 않았겠죠. 그걸 부정할 수 없다는 게 참 슬프네요. 그래도 이젠 그만 복기하려 합니다. 말처럼 쉽진 않겠지만, 하루하루 조금씩 무덤덤해지겠죠. 조건 없는 사랑. 저는 그런 걸 했다고 믿습니다. 그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정말 많이 참고, 맞추고 싶어서 노력했었어요. 그렇게까지 마음 다한 사랑이, 살면서 다시 올 수 있을까요. 앞으로는 이렇게까지 무리해서 사랑하지 않을 것 같아요. 똑같은 상처를 또 선택할 만큼 이젠 그렇게 순수하진 않으니까요. 내 중심을 지키고, 선을 분명히 그을 수 있고, 자신을 찾을 수 있는 사랑. 그게 그 사람이 저에게 알려준 마지막입니다. 감정이 널뛰는 사랑을 해본 분들, 혹은 어른의 사랑을 끝내본 분들께 전하고 싶어요. 저처럼 타인의 이별에서 위로받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게 생각보다 참 큰 힘이 되더라고요. 억지로가 아닌 방식으로 ‘몰입’해보세요. 저는 그게 글이었습니다. 다들, 힘내세요. 그리고 사랑하세요. 적당한 온도로. 하지만 인생에서 단 한 번, 이렇게까지 뜨겁게 사랑해 봤던 저는 정말 운이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람은 좋은 사람이었으니까요. 좋은 사람과 진짜 사랑을 해봤다는 것. 두고두고 꺼내볼 수 있는 기억이 있다는 것. 쉽게 오는 경험은 아니니까요. 제가 좋아하는 말로 이 글을 마무리하고 싶습니다.


“사랑, 참 깊은 거더라고요. 그리고 쉽게 안 와요.” – 고현정, 〈유 퀴즈 온 더 블록〉


앞으로 제가 어떤 사랑을 하게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조금은 무덤덤해진 어른의 연애를 하게 될 저를 위해, 그 사람은 여기 이 글 속에 남겨두고 갑니다. 다들 자신만의 기준으로 정말 사랑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정말 사랑이 왔다고 느껴진다면 꼭 한 번쯤은 놓치지 말고 잡으세요. 정말 쉬운 게 아니니까요. 누군가에겐 매일처럼 새로운 사랑이 찾아올 수 있겠지만, 정말 마음 깊이 품게 되는 사람은 어쩌면 평생 단 한 명일지도 모릅니다. 그 한 사람이 차지하는 자리는 생각보다 훨씬 크니까요. 그러니 마음속에 누군가를 품고 있는 걸 죄책감으로 여기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 사람은 다시 올 일이 없을 테니까요. 그렇기에 더는 무너질 일도 없겠죠. 그 사람은 저를 품는 대신, 끝을 택했습니다. 그 끝 너머의 잔인함을 이해해보려 하는 것은 결국 끝까지 그 사람이 원했던 제 모습일 것 같아서, 그러지 않기로 했습니다. 저는 그냥, 제 방식대로. 저답게. 닿는 데까지는 굳이 그 사람을 지우려는 노력을 하지 않을 거예요. 그게 조금 비참해 보일 수도 있겠지만, 끝까지 이 관계에 진심이었던 사람으로 남고 싶어요.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니지만, 그저 제가 그렇게 남기고 싶습니다.


가끔 그 사람에게 받지 못한 짐들이 떠오르고, “네가 버리라며.”라는 차가운 말과 표정이 마음을 아프게 찌르지만, 저는 그 별로였던 사람을 기억하려 합니다. 마지막을 도망치듯 끝낸, 가장 어린아이 같던 어른을. 그 안엔 여전히 사랑받지 못한 어린아이가 자라지 못한 채 머물러 있었으니까요. 저는 그 어른을 기억하려 합니다. 자라지 못한 어른을 사랑했던 아이였으니까요. 그리고 함께한 시간 속에서는 해주지 못한 그 사람의 편으로서, 뒤에서 묵묵히 응원하려 합니다.


장범준 노래의 취향을 알게 해 줘서 고마워요. 샤브샤브집도, 또 다른 사람의 추억으로 덮이겠죠. 내가 사둔 물건들도, 그렇게 다른 의미가 되겠고요. 같은 말들이지만, 이런 불안함이 그동안 당신을 많이 무겁게 했던 것 같아요. 최대한 큰 불행 없이 무탈하시길.


J로부터


* 10월의 어느 날.

6개월이 되어 가네요. 지금의 저는 괜찮습니다. 그 사람에게 “나는 항상 놀 사람 한 명은 있다. 너랑 헤어져도 바로 생길 거니까 나 놓치지 마.”라고 장난처럼 열받게 했던 말이, 또 이번에도 틀리지 않았네요. 운이 좋게도, 친구도 없이 외롭게 살아가는 걸 택한 인생이지만 이상하게도 늘 좋은 사람들이 곁에 생겨요. 이별 후에도 사실 노느라 바쁘기도 했고, 또 다른 시작을 준비하느라 정신없이 지내왔습니다. 감정이 가장 거세던 시기에 썼던 이별 글들을 보면, 참 구질구질하고 과잉된 문장들이 많아요. 그래도 그런 감정의 글들이 분명 누군가에게는 필요할 거라 생각합니다. 저도 그런 글들에서 제일 큰 위로를 받았으니까요. 가끔은, 나 대신 과잉된 감정이 텍스트로 남아 있는 게 누군가에게 가장 필요한 일일지도 몰라요. 그래서 이 글을 썼습니다.


지금의 제 모습이 꽤 마음에 듭니다. 아마 지금이 가장 좋은 상태일 거예요. 얼마 지나지 않았지만, 그 사람 옆에 있던 제 모습을 떠올리면 스스로 봐도 참 별로였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도 분명한 건, 그 모든 행동의 근원이 그 사람에 대한 진심이었다는 겁니다. 너무나 좋아했던 건, 시간이 지나도 부정할 수 없네요. 아마 이 정도 크기의 사랑은 여기서 끝일 것 같습니다. 저는 미뤄왔던 일들을 하나씩 해냈고, 앞으로도 새로운 만남들을 시작하게 될 것 같아요. 하지만 또 다른 사랑은 아직 시간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 시작이 결코 쉽지 않을 것도 같아요. 마음의 벽이 여전히 단단하거든요. 그리고 그 사람을 향했던 감정만큼은 아닐지라도,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면 또 별로인 제 모습을 마주하게 될까 봐, 아직은 그 모습조차 보고 싶지 않습니다. 지금은 그저 쿨하게, 편안하게 시간을 즐기고 싶습니다.


+ 추신: 폭싹 속았수다에서 얼굴이 낯선 배우분들 중, 충섭이 일하는 극장 사장님 연기가 너무 좋아 찾아봤는데, 제 글의 모티브가 된 <연애, 그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의 감독님이시더라고요. 인생은 참 재밌는 것 같습니다. 하하.


가장 상처되는 말을 네게 하고 싶어 부러워 너의 그 생각은 너 좋을 대로 흘러가 왜 이렇게 넌 네 멋대로인 거야 왜 더 아프게 말해 내게 너의 그 못된 입술로 키스해 내게 대체 어디까지 엉망이길 바라 끝까지 무너질게 더욱더 어때 이제 만족해? 사실 알아 넌 내가 아플 때 가장 아프니까 거릴 두자던 내 말에 그럴 거면 끝내자고 날 꼼짝 못 하게 어쩜 그렇게 꼭 맞게 내가 어쩌지 못하게 대단해 넌 정말 똑똑해 내가 널 어떻게 이겨 네가 내 전부인 걸 너무 잘 알아 넌 더 아프게 말해 내게 너의 그 못된 입술로 키스해 내게 대체 어디까지 엉망이길 바라 끝까지 무너질게 더욱더 어때 이제 만족해? 사실 알아 넌 내가 아플 때 가장 아프니까 대체 왜 내 인생에 나타난 거야 너도 안 변해 마찬가지인걸 영원히 원망하게 될 것 같아 널 미워해 널 사랑해 널 슬퍼진대도 또다시 네 품에 안겨서 울고 싶은데 더 아프게 말해 내게 네가 더 아플 때까지 키스해 내게 대체 언제까지 또 이럴 건데 넌 사랑한단 내 말을 더욱더 믿을 수 없겠지만

사실 말야 난 네가 아플 때 가장 아프단 말야

- 권진아 love & h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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