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일곱, 서른넷. 안녕.

폭싹 속았수다.

by 유은



안녕. 이제 정말 마지막 글이야. 우리의 1년 반이, 이 아홉 편의 글로 끝이 나. 넌 끝까지 날 성장시키는 사람이었고, 떠난 자리마저 여전히 그대로야. 그게 누구로, 무엇으로 채워질 수 있을까. 넌 내 모든 기준이었으니까. 그날, 내가 눈 많이 온다는 이유로 그 카페에 가지 않았더라면, 우린 아예 만나지 않았겠지. 난 진심으로 우리가 운명이라고 생각했어. 오빠도 아직 그렇게 생각할까. 하지만 난 좋게만 기억하긴 어려울 것 같아. 뻔한 사랑처럼 예쁘게 미화도 못 하겠어. 그래도 오빠를 만난 건 절대 후회하지 않아. 우리의 끝이 조금 울퉁불퉁했더라도, 내 처음이라는 시기에 오빠를 만난 건 내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이야. 그건 앞으로도 바뀌지 않을 거야.


우리가 헤어지기 직전의 나는, 참 별로였던 것 같아. 그래서 그 모습만 기억에 남았을까 봐 조금 서글퍼. 널 통제하고 싶었던 것도, 붙잡아두기만 하려던 것도 아니었어. 진심으로.


“요즘 많이 싸우는 게 결혼 때문인 것 같아. 당분간 결혼 생각하지 말자. 연애만, 사랑만 하자.”


그때 네 말은 처음엔 뭔가를 포기하는 느낌이라 불안했어. 그러다 ‘이제 좀 달라지겠구나’ 싶어서 기대했고, 그 시기의 나는 많이 비어 있었어. 비어 있는 만큼 불안과 기대가 엉켜 있었고. 그래서 좋지 않은 감정들이 뒤틀려, 상처로만 표현됐던 것 같아.


헤어진 날, 네가 저 말을 하고 나흘 뒤. 나는 내가 원하는 사랑의 방식에 대해 말했어. 말도 안 되는 순간에도, 단 한 번쯤은 내 마음을 봐주는 너. 그 한 번의 확신이 그땐 너무 절실했어. 그래서 네가 했던 개인 시간에 대한 이야기가 참 많이 박혔어. 그 시기의 나에겐 그 말이 너무 가혹했거든. 그냥 내가 여전히 소중하다는 느낌 하나였으면 됐는데. 그게 네가 그때 내게 줄 수 없었던 전부였나 봐. 난 사랑받을 짓은 안 하면서 사랑받고 싶었고, 타이밍은 정말 많은 결심을 무너뜨리는 힘이 있는 것 같아. 사실은 타이밍이 아니라 의지의 문제였겠지만.


그래서 그날 밤, 와 달라고 말했어. 당연히 오지 않을 걸 알면서도, 내 마음을 눈치챈 너라면 다음 날 당연히 와줄 거라 기대했거든. 그날은 나에게 정말 중요한 날이었으니까.


“내일 꼭 갈게.” 그 한마디에 또 녹았고, “퇴근하고 계획 없어.” “오지 말라며. 망상이야. 말을 해야지.”


그 말들에 내 기대는 바닥 끝까지 무너졌던 것 같아.


... 나 정말, 너한테 아무 말 안 한 거 맞는 거지. 나는 외로웠고, 그 외로움이 너에게 날뛰었어. 그래서 그렇게 못되게 굴었어. 미안해. 외로움이 너까지 지치게 만들어서. 놓을 힘을 준 건 내가 맞아. 하지만 단 한 번만, 그날 네가 나에게 와줬다면 나는 몇 번이고 너에게 갔겠지. 맞아. 우리의 끝은, 내가 혼자 품었던 기대와 이기심에서 시작됐어.


“유은. 네가 처음부터 그냥 나한테 왔었다면, 우린 이렇게 되진 않았을 거야.”


쉬는 날이면 늘 그랬듯, 나는 너에게 갔을 거야. 절대 너에게 와달라고만 바라는 여자는 아니었잖아. 그건 인정해 줘. 내 생일에도 와달라고 한 적 없던 나였으니까. 기대하지 않으려 애썼던 거였어. 그래도 네가 몰래 와줬었지. 고작 20분이었지만, 정말 너무 행복했어.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는데 와줬던 그날의 네가, 아직도 내 시간 안에 그대로 남아 있어. 그렇게 기꺼이 와줄 수 있는 너. 그만큼 날 찾고, 보고 싶어 하는 그 마음 하나만 바랐던 거야. 하지만 결국, 영원히 날 안 봐도 괜찮은 쪽을 선택했네.


“왜 우리 집으로 오지 않았어?”


너는 우리의 시간을 일방적으로 끊어냈지. 감정이 통제되지 않았던 내 투정이 너에겐 버거웠던 거야. 결국, 내가 두려워하던 바로 그 이유로, 너의 지난 이별과 같은 방식으로 우리도 헤어졌구나.


근데 있잖아. 난 너의 막으려 해도 흘러나오는 감정을 한 번쯤은 보고 싶었어. ‘너도 날 놓치지 않으려는구나.’ 그 하나의 아쉬움이 필요했거든. 흔한 싸구려 하룻밤 사랑에도 나오는 제발 가지 마. 나, 너 없으면 안 돼. 네겐 그런 절박함이 없었고, 나는 그게 늘 아쉬웠어.


“나 혼자 여행 갈래.” “이번 주말은 오빠가 데이트 코스 짜줘.” “나한테 좀 와줄래?”


오빠. 오고 가고의 문제가 아니었어. 마음이 어디를 향하는가의 문제였지. 네가 원하는 모습을 위해 평생 노력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의지가, 나한테는 필요했어. 그래도 마지막엔 예의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장문의 메시지가 그토록 외면당할 일이었을까. 마지막으로 연락하겠다는 말이, 지키지 않아도 되는 말 중 하나가 될 줄 몰랐어. 우린 끝났고, 그래서 너는 지킬 이유가 없었던 거겠지. 넌 그런 부분에서 꽤나 냉정하니까. 나 혼자만, 그 한마디를 마지막 약속처럼 껴안고 있었던 걸까. 끝을 너 혼자 정하고, 나에게 이유도, 책임도 남기지 않은 것. 그래서 앞의 모든 기억들까지 함부로 추억할 수 없게 된 것. 나는 그게 아직도 원망스러워.


이제는 글을 읽고 쓰면서 다시 시작하려고 해. 너 없는 이야기로 내 삶을 써야 하니까. 연애하느라 퉁명스럽고 연락 없던 딸을 걱정하던 부모님이 이젠 내가 우는 것만 봐도 같이 우셔. 공휴일이면 올라와서 날 들여다봐줘. 그리고 나는, 서울역에서 우는 게 쪽팔리지 않을 만큼 얼굴이 두꺼워졌어.


우리가 마지막으로 함께 봤던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


다시 보는데 나는 완전한 금명이더라. 근데 공부는 못하고, 성격은 더 괴팍하고 꼬인 금명. 질질 미련 부리고, 사람 질리게 하는 금명. 난 널 충섭이라 믿었는데, 결국 넌 영범이면서 금명이었어. 핑계 뒤에 숨고, 감정에 솔직한 척하지만 떠날 계기를 만들고, 냉정하게 자기를 찾을 수 있는 사람. 네가 나한테 말한 그 말이, 금명이가 헤어짐을 고할 때 한 말과 같잖아. “너도 좋지만, 날 지키려면 이제 어쩔 수 없어.” 영범은 구질구질하게 매달렸고, 금명은 남겨진 사람에 대한 예의를 지켰는데, 넌 그런 마음의 공간도 없는 사람이었으니까.


그 냉정함이 되기까지의 너의 상처가 깊고 오래되었다는 걸 알아. 그래서 더 쓰라렸어. 내가 덮어주고 싶었거든. 나에겐 ‘아니면 빠꾸’라고 말해주던 배경이 있었고, 그 배경에 기대어 뻔뻔하게 살았던 나는 이제는 맞는 온도의 사람을 만나고 싶어. 내가 막무가내로 자란 걸 고쳐야 하는 문제가 아니라, 그 모습 그대로 살아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사람. 핑계 뒤에 숨는 영범이 말고, 눈에 보이게 아끼는 것의 귀중함을 아는 사람. 그리고 나는 진짜 금명이 되기 위한 시간을 현명하게 견뎌보려고 해.


드라마를 다시 보니까, 그때 안 보이던 장면들이 보이더라. “뭐야... 아빠인 줄 알았네.” 그 따뜻함이. 속이 티 없이 맑은 사람, 좋아하는 사람 앞에선 무장해제 되는 사람.


“토토와 나는 웃음 코드가 맞았고, 웃는 연기만 느는 어른의 세상에서 그건 굉장한 부스터였다.”

“모두가 가장 뜨거웠던 사람과 결혼을 할까? 크기가 아니라 온도가 다른 사랑이었다. 나를 나답게 하는 나의 온도. 나는 나의 왕자님을 만났다.”


너와 나는 다양한 코드들이 맞았어. 그게 분명, 서로의 인생을 조금씩 바꿔놓기도 했지. 하지만 우리는 뜨거웠고, 서로를 서로답게 만들어주는 온도는 아니었어. 나는 끝까지 네 편이고 싶었어. 누구보다 널 생각했으니까. 그래서 너의 편이 아무도 없는것 같다는 네 말이 참 오래 남아. 다음엔 꼭, 서로가 서로의 편이 되어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나길 바라. 너의 방식대로, 첫 번째라는 안정감을 채워줄 수 있는 사람을. 나는 정말 네가 첫 번째였거든. 너라면 다 괜찮았으니까. 그게 내 방식이었어.


존재의 크기는 사라지고 나서야 정말로 알게 된다고 하잖아. 나도 그래. 너도 알게 됐을까. 나에게 했던 말들이 진심이었다면, 지금쯤 넌 살만하지 않을 거야. 나에게 찾아왔을 거야. 내가 그랬듯이. 누가 잘못했고, 서로를 갉아먹고, 그런 뻔한 얘기 말고. 가장 우선이던 사람을 영영 못 본다는 선택을 한다는 것, 그건 정말 이성만으로는 안 되는 일이야. 모든 걸 무시하고 바짓가랑이라도 잡게 돼. 그게 건강하지 못한 관계든 아니든, 팩트나 논리 같은 건 아무 의미 없어. 그래서 나는 지금도 끝을 내 손으로 맺지 못해. 너는 했고, 그래서 우린 끝났어. 나는 결국, 너에게 아니었던 거지. 영원히 못 본다는 거, 안을 수 없고, 시시콜콜한 농담이나 서로 좋아하는 것들을 더는 나눌 수 없다는 거. 그걸 다 받아들이기로 결심하는 데엔 정말 큰 내공이 필요한 것 같아. 난, 아마 평생 못할 거야. 넌 나한테 너무나 큰 사람이니까.


어때, 넌? 정말 내가 너의 우선순위였어? 날 외롭게 두지 않은 게 맞았어? 내가 너를 만나면서 불안했던 건 정말 내 문제이기만 했어? 너에게 답을 들을 순 없겠지만, 이제는 정확히 알 것 같아. 내 외로움은, 망상이 아니었던 거지. 그래도 외로움을 핑계로 너한테 닿게끔 편이 되어주지 못했던 내가,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수 없다는 걸 알아서.


먼저 떠나버린 너에게, 미안해. 진심으로 잘 지내. 넌 평생 내 기준이 될 거야. 안녕. 정말 고마웠어, J.

널 좋아했던, 애 같기만 했던 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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