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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거없는 자신감

by 유은

세상을 살다 보면 가끔 '내가 아닌 시기'가 온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냥 나라는 인간의 궤도에서 조금 미쳐버린 시기.


스물다섯의 내가 그랬다. 투잡을 뛰며 몸을 혹사하면서도, 기어코 새벽에 나가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 압구정 밤거리를 헤매고 다녔다. 그 소란스러운 곳에서 단 한 번도 마음에 드는 사람을 발견한 적이 없으면서도 말이다. 뻔한 클럽에서 뻔하지 않은 남자를 만나겠다는 얄팍한 포부를 안고 들어갔다가, 새벽 5시쯤이면 그 안에서 가장 뻔한 얼굴을 한 사람이 되어버리는 건 늘 나였다. 같이 간 일행과 탐앤탐스에 앉아 소시지를 씹으며 "내일은 꼭 괜찮은 사람이 있겠지, 오늘 재밌었다"며 위안하던, 누가 봐도 조금 정신 나간 청춘의 끄트머리.


인생에서 처음 겪어본 거절의 쓴맛을 달래며 내 딴에는 청춘을 탕진하고 있던 그 시절, 외모가 전부였던 내 시야에 완벽하게 들어맞는 남자가 나타났다. 시끄러운 클럽 안, 그는 내가 그렇게나 찾아 헤매던 그 '뻔하지 않은' 남자 같았다. 술기운에 취해 몇 분 남짓 찰나의 눈빛을 교환했을 뿐인 그와 나는 번호를 나눴다. 취한 친구를 챙겨야 한다는 핑계로 그를 남겨두고 나왔지만, 사실 그건 핑계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먼저 연락을 했고, 꽤 순수하게 다음 만남을 기다렸다. 하지만 인생은 언제나 잔인한 타이밍의 장난이다. 당시의 나는 정신적으로 심하게 앓고 있었다. 요즘 흔히 쓰는 '멘헤라'라는 가벼운 단어로는 다 담아낼 수 없는, 위태롭고 기괴한 지점에 서 있었다. 클럽 같은 곳엔 어울리지 않는 이성적인 태도, 나보다 열 살이나 많은 여유로움, 내 눈에 쏙 들던 그 남자가 스물다섯의 치기 어리고 불안정한 나를 감당할 수 있었을까.


몇 분의 만남과 몇 번의 카톡이 전부였지만, 나는 10대 시절 첫사랑을 앓는 소녀처럼 그가 미치도록 다시 보고 싶었다. 불행히도 나는 그때 알코올에 기대어 위태롭게 서 있던 상태였고, 술만 들어가면 스스로를 제어하지 못한 채 수치스러운 짓을 저지르곤 했다. 연락이 끊겼던 그에게 다시 카톡을 보낸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다음 날 아침, 전날 밤 내가 보낸 활자들을 보며 '그냥 이대로 죽어버릴까' 진심으로 생각했을 만큼의 참담한 대화들. 그렇게 우리의 얕은 인연은 허무하게 끊어졌다.


그리고 몇 달 뒤. 평소엔 텔레비전을 잘 보지도 않는 내가 우연히 튼 프로그램에서 그를 보았다. 브라운관 속의 그를 보며 '정말 내 이상형'이라 생각했던 그 남자가, 새벽녘 압구정에서 내게 번호를 주었던 그 A와 동일 인물이라는 걸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알아서 뭐 하겠는가. 나는 이미 기나긴 터널을 지나 시니컬하고 정상적인 인간으로 돌아와 있었고, 그의 기억 속에 '나'라는 존재는 진작에 증발해 버렸을 텐데. 그 사실을 뚫고 뻔뻔하게 다시 연락할 만큼 나는 용감한 사람도 아니었다.


그는 내게 그런 기억으로 남아 있다. 살면서 만난 사람 중 내 이상형에 가장 완벽하게 부합했던 남자. 동시에 이상한 근자감이 들게 하는 남자. 내가 만약 지금의 멀쩡한 상태로 그를 만났더라면, 우리는 꽤나 오랫동안 좋은 연인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확신. 이런 게 정말 터무니없는 근자감일까. 인생은 타이밍이고, 꿈에 그리던 이상형이 제 발로 걸어와 가볍고 달콤하게 먼저 손을 뻗어도, 끝내 주워 먹지 못하는 멍청한 여자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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