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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긋난 핀트의 수치심

by 유은

나의 스물넷은 이상한 '뽕'에 취해 있던 시기였다. 나름대로 예쁘고 인기도 꽤 있지만, '나는 굳이 연애 같은 거 안 해'라는 알량한 오만함. 하지만 젊음의 외로움이란 결국 알코올을 타고 기어이 고개를 쳐드는 법이었고, 나는 쫓기듯 압구정에 발을 들였다.


12월 31일. 스물다섯을 목전에 둔 밤, 한국말을 유창하게 하던 외국인 여자친구와 함께 힙합 클럽을 찾았다. 우리는 제법 눈길을 끌었지만, 정작 이런 소란이 오랜만이었던 나는 바 모퉁이에 뻣뻣하게 서서 어색한 카운트다운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우리 옆으로 어떤 일행이 다가왔다.


190cm는 족히 되어 보이는 키, 깔끔한 검은 목티. 그는 클럽의 끈적한 공기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묘하게 정적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30분가량 묘한 침묵을 지키며 서 있던 그가 마침내 내 쪽으로 걸음을 옮겼을 때, 우리는 처음으로 말을 섞었다. 자정을 넘겨 내가 스물다섯이 된 지 고작 30분 만의 일이었다. 나보다 여덟 살이 많았던 그, 중저음의 목소리, 크고 단단했던 손. 중고등학교 시절의 풋내 나는 연애를 제외하면, 머리통이 굵어지고 처음으로 '이성'이라는 아득한 감각을 일깨워준 남자였다.


새해 첫날, 부모님 댁으로 향하는 기차 안. 전날 마신 데킬라의 숙취보다 나를 더 어지럽게 한 건 미친 듯이 뛰는 심박수였다. '아, 사람들이 이래서 연애를 하는구나. 내가 그동안 참 재미없게 살았구나.' 서른셋, 연애에 능숙한 남자답게 그는 거리낌 없이 다가왔고, 신사동의 꽤 비싼 룸 이자카야를 예약하는 여유까지 부렸다.


스물다섯, 겉모습만 멀쩡했지 하드웨어는 스무 살에 멈춰 있던 내게 그건 저항할 수 없는 달콤한 유혹이었다.

며칠 뒤, 우리는 술을 잔뜩 마셨고 그의 집으로 향했다. 집에 남자를 들이지 않는다는 나의 철벽에, 그가 기꺼이 자신의 공간을 내어준 것이다. 신사에서 30분쯤 달려 도착한 서울 끝자락의 동네. 내가 살던 곳과는 정반대로 나무가 많고 상쾌한 공기가 감돌던 그 아파트 단지의 밤을 기억한다.


우리는 술을 더 마셨고, 입을 맞췄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무려 5시간을 물고 빨았건만 우리는 그 이상의 진도를 빼지 못했다. 새벽 6시, 체력이 다한 그는 "이제 자야겠다"며 불쌍하게도(?) 침대에 누워버렸다. 그럴 만하다. 아직까지도 이 부분은 미안하다. 이 사람도 얼마나 힘들었을까. 나는 모르는 남자의 집에서, 그것도 잔뜩 격앙된 상태로 잠이 올 리 만무했다. 나는 뜬눈으로 아침을 맞았고, 도망치듯 택시를 타곤 출근을 했다.


일이 손에 잡힐 리 없었다. 퇴근하자마자 나는 다시 그의 집으로 달려갔다. 20대의 치기 어린 감정과 30대의 닳고 닳은 감정의 온도가 같을 거라 착각했던, 지독하고 더러운 집착의 시작이었다. 우리는 한겨울 울창한 산책로를 한 시간쯤 걷고 다시 집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보았다. 그의 벗은 몸,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남자의 '그것'을. 내 인생 처음으로 목도한 남자의 나체는, 내 환상과는 달리 한 마리의 나약한 '지렁이' 같았다.


다음 날 오후. 밤새 한숨도 자지 못한 나를 곁에 두고, 주말 출근을 위해 일어난 그는 눈부신 '빨간 팬티' 차림으로 거실을 활보했다. "이제 너한테 부끄러울 것도 없다"며 호탕하게 웃는 그를 보며 나는 생각했다.

'아니, 우리는 아직 서로의 나체를 제대로 탐구하지도 못한 사이인데. 대체 저 당당함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다시 안 볼 사람처럼 말하지 마."


그의 마지막 인사를 뒤로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는 연애 경험이 많은 아는 언니에게 전화를 걸어 다급하게 외쳤다.


"언니! 남자들 거 원래 다 그렇게 생겼어? 원래 다 그렇게 지렁이 같아?!"


남자친구와 함께 있던 언니는 미친년 보듯 전화를 끊어버렸고, 나의 짧고 기괴했던 로맨스도 거기서 끝이 났다. 나는 이 일련의 사건을 나 인생의 '첫 거절'이라 명명했다. 생각해보면 5시간이나 입만 맞추다 잠들어버린 것도, 내 앞에서 빨간 팬티를 입고 돌아다닌 것도, 나약한 지렁이의 형상을 하고 있던 것도 그였다. 객관적으로 따지자면 수치스러워해야 할 쪽은 분명 그쪽이 맞을 텐데, 나는 왜 내가 까였다고 생각하며 모멸감을 느꼈을까. 서른을 앞둔 지금까지도 나는 이토록 자기 객관화가 안 되는 인간이다.


진짜 수치는 그로부터 딱 1년 뒤에 찾아왔다. 그의 집 근처도, 내 집 근처도 아닌 딱 중간 즈음. 내가 일하던 바(Bar)에 그가 나타났다. 그의 새로운 여자친구와 함께. 거구의 그를 발견한 순간, 나는 조건반사처럼 몸을 숨겼다. 그는 주인이 사라진 빈 바를 유유히 훑어보다 떠났다. 나를 보지 못했을 것이다. 아니, 제발 보지 못했기를. 이것이 그와 나의 진짜 마지막이다. 여전히 핀트가 어긋난 수치심을 부여잡고, 나는 오늘도 평범하게 수치스러운 하루를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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