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

쓸모와 텐션사이 (Sex and the city)

by 유은

처음으로 붕괴라는 감정을 느꼈던 건, 투잡을 하며 만난 H와 내 10년 지기 친구가 눈이 맞아버린 황당무계한 사건 때문이었다. 살면서 '상실'이라는 감정을 제대로 겪어본 적이 없었던 나는, 그제야 비로소 상실이라는 감정의 논제를 마주하게 되었다.


그해 추석 연휴. 배신감에 멘탈이 가루가 된 나는 본가에도 내려가지 못한 채 텅 빈 서울에 덩그러니 남겨졌다. 명절의 적막함은 폭력적이었고, 바닥을 친 자존감과 외로움은 기어이 내 알량한 자존심을 꺾어버렸다. "어플 만남 같은 건 찌질해서 안 해"라며 콧방귀를 뀌던 내가 홀린 듯이 틴더를 깔고 있었으니 말이다.


목적은 단 하나였다. 당장 내 부름에 튀어와 줄, 철저히 만만하고 맹목적인 누군가가 필요했다. <섹스 앤 더 시티>의 냉소적인 미란다가 자기 감정에 취해 전화를 걸었을 때, 다른 여자와 삽입 도중이던 스키퍼가 "나의 운명이 부른다"며 달려오던 장면. 남들은 그를 멍청하다고 비웃겠지만 사실 그건 내 판타지 중 하나였다. 내가 완벽히 사랑하지 않더라도, 전화 한 통으로 상대의 세계를 무너뜨릴 수 있는 얄팍한 우월감. 나에겐 지금 당장 내 구미에 맞게 조종할 나만의 '스키퍼'가 필요했다. 얼마나 자존감이 무너졌으면 그런 게 필요했을까. 물론, 내가 지독하게 비어있었기 때문에 그런 얄팍한 채움이라도 간절했던 거다.


그렇게 매칭된 남자가 C. 단언컨대 그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내 취향의 궤도에 단 1mm도 진입하지 못한 오답이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집 근처 한강공원으로 그를 불렀다. "뭐, 무슨 일 있겠어? 해봤자 한강인데." 그런 무모한 짓으로 시작된 만남이었지만, 그는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이성이라기보다는 동성에 가까운 편안함을 풍기는 남자였다.


우리는 꽤 자주 만났다. 아니, 정확히는 내가 부르면 그가 왔다. 새벽 2시든 3시든 내가 오라는 곳이면 어디든 나타났다. 심지어 나를 만나기 위해 아예 연차를 쓰기까지 했다. 그는 내가 주말 일을 마치면 새벽에 내가 있는 동네로 와 같이 술을 마셨다. 맨정신일 땐 H가 남긴 배신의 전말을 묵묵히 들어주었고, 어김없이 술이 들어가면 나의 외로움은 본능적인 행동으로 번졌다. 키스를 하고, 화를 내고. 하지만 기묘하게도 딱 거기까지였다. 그가 너무나 내 스타일이 아니어서였을까, 아니면 아무리 멘탈이 나갔어도 '어플남'과 끝까지 갈 순 없다는 내 마지막 알량한 콧대였을까. 우리는 스킨십은 하되 선은 넘지 않는, 기형적인 텐션을 유지했다.


나는 그에게 철저히 이기적이었다. 내가 똑같은 신세 한탄을 수천 번 반복해도 그는 묵묵히 들어주었고, 나는 그가 나갔던 시시콜콜한 소개팅 이야기를 토씨 하나 빠뜨리지 말고 해달라고 징징대기도 했다. 사실 나는 그 얼굴도 모르는 소개팅녀들보다 내가 낫다는, 말도 안 되는 우월감에 취해 있었던 것 같다.


나는 그의 맹목적인 '쓸모'를 갉아먹으며 부서진 자존감의 빈틈을 기워 나갔다. 친구의 배신이 남긴 상처는 역설적이게도 나를 사랑하지 않는 남자 C를 통해 조금씩 아물어갔다. 그렇게 그를 발판 삼아 다시 정상적인 궤도로 돌아갈 채비를 마쳤을 즈음, 우리의 얄팍했던 관계도 자연스레 수명을 다했다.


그리고 나는 만났다. 내 인생을 진짜 지옥 불바다로 끌고 들어갈 그 남자, 나의 'P'를.


C는 나에게 잠깐의 구원이었다. 하지만 그 구원은 다음 지옥으로 가기 위해 아주 잠시 거쳐 가야 했던 정거장에 불과했다. 너무나 역설적인 건, 내가 그 지옥 같았던 P와의 연애를 끝내고 나서 다시 찾은 사람이 바로 C였다는 사실이다. 무려 2년 만에 불쑥 보낸 뜬금없는 카톡. 하지만 그는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연락한 당일 주말 밤에 내 앞에 나타났다. 이번엔 입술을 부딪치지도, 그 어떤 텐션도 없었다. 물론 내가 술을 먹고 그에게 똑같은 어리광을 부리긴 했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부르면 오고, 찌질한 밑바닥을 다 보여줘도 타격감이 없으며, 오직 담백한 쓸모만 남은 기묘한 연대감. 내 20대의 수치스러운 기록 한구석에는, 그렇게 나만 아는 스키퍼, 그 누구도 모르는 그런 관계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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