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성 박살난 판타지
내 전부였던 P와의 연애가 끝났다.
하지만 아무리 지구가 무너져도 밥은 먹고살아야 했다. 나는 당시 대기업 계약직으로 출근하고 있었다. 애초에 P와의 만남을 위한, 완벽한 워라밸을 지키기 위해 내 발로 찾아 들어간 곳이었다. P와 밤새 술을 퍼마시고 한숨도 자지 못한 채, 술 냄새를 풀풀 풍기며 면접을 보러 갔던 그 기형적인 합격의 결과물. 삶은 어떻게든 굴러가야 했고, 나는 일주일에 세 번씩 단골 바에 출근 도장을 찍으며 폐인처럼 숨만 쉬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내 텅 빈 시야에 한 남자가 훅 들어왔다. D. 나와는 띠동갑. 심지어 딸이 무려 둘이나 있는 명백한 아빠. 하지만 그는 대기업의 흔한 찌든 가장의 얼굴이 아니었다. 사랑 듬뿍 받고 자란 외동아들 특유의 티 없이 맑은 얼굴에, 조금 철은 없어도 묘하게 능청스럽고 낭창낭창한 여유가 흘렀다. 무엇보다 꼬인 데 없이 직설적인 태도가 좋았다. 거기다 이 숨 막히는 회사에선 보기 드문 골수 흡연자에 애주가라니. 이별 후 만신창이가 된 내 머릿속엔 '능글맞고 꼬임 없는 남자'라는 키워드가 강박처럼 자리 잡고 있었다. 소심하고 계산적인 부류에 질려버린 나에게, 소년미를 뒤집어쓴 30대 후반의 그 유부남은 완벽한 오아시스처럼 보였다.
그때부터 내 안에서 도덕성을 쾌적하게 상실한 혼자만의 막장 드라마가 맹렬히 돌아가기 시작했다. 몇 번의 사적인 문자, 그리고 딱 한 번의 술자리. 선을 넘을 듯 말 듯 한 그 아슬아슬한 텐션에 취해 심장이 뛰었다. "이제 진짜 뭐라도 하나 질러볼까?" 나는 기어이 점심 약속까지 잡아두고 각을 재고 있었다. 그런데 웬걸. 인생은 늘 내 판타지보다 한 박자 빠르게 초를 친다. 그는 이직 발령이 났고, 나의 이직 결과도 합격으로 났다. 점심 약속은 흐지부지 공중분해 되었고, 나의 그 대단한 짝사랑이자 불륜 미수극은 시작도 못 해보고 그렇게 싱겁게 막을 내렸다.
가끔 그를 떠올리면 후회한다. 회사에선 담배 피운다는 걸 꽁꽁 숨기고 살았는데, 그냥 까발리고 같이 맞담배나 뻑뻑 피워볼 걸. 도덕적 잣대 따위는 이미 내던진 지 오래인, 나의 가장 찌질하고 수치스러운 후회다. 이 지독한 혼자만의 막장 드라마가 남긴 진짜 결말이 뭔지 아는가? 나는 지금도 그 유부남이 연락 오면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뛰어나갈 거라는 사실이다.
도덕성이 시원하게 박살 난 관계. 얼마나 짜릿하고 좋은가. 나는 여전히 양심도, 철도 없는 뻔뻔한 생각을 하고 산다. 어떻게 이렇게 내면이 추악할 수 있을까. 지금 내 옆에, 옷을 입고 컴퓨터를 치고 있는 다른 사람들도 이런 생각을 하고 사는 건가, 아니면 나만 이런 건가. 어느 쪽이든 등골이 서늘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