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

완벽한 남자의 완벽한 사정

by 유은

P와 헤어지고 완전히 제정신을 놓았던 건 세 달 남짓이었지만, 그 이전부터 이미 박살 나 있던 이 버거운 정신머리를 어떻게든 멱살 잡고 끌고 가야만 했다. 무언가에 미친 듯이 몰입하지 않으면 숨이 막혔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게 뭐지? 아, P였지. 미쳤나 봐. 대체 무슨 병신 같은 생각을 하는 거야.' 이런 파괴적인 사고 회로를 뱅뱅 돌리다가 겨우 하나를 끄집어냈다. 아, 나 그 운동 좋아했지.


모든 운동에 젬병인 뚝딱이 몸치지만, 유일하게 주고받는 그 운동만큼은 제법 소질이 있었다. 이사를 다닐 때마다 근처 체육관부터 찾곤 했는데, 이번 동네는 P에 미쳐있던 시절에 이사 온 곳이라 굳이 알아볼 생각조차 안 했었다. 그런데 웬걸. 집에서 엎어지면 코 닿을 30초 거리에 시설 좋은 체육관이 하나 있었다. 지독한 내향인인 나로서는 연령대 높은 동호회 분위기에 발을 들이는 게 끔찍하게 싫었지만, 당장 살기 위해 잡을 수 있는 동아줄이 그것밖에 없었다.


묵묵히 레슨만 받고 도망치듯 집에 오길 반복하던 어느 날, 젊은 남자 하나가 새로 등록했다. E였다. 첫인상은 꽤 셌다. 이목구비는 짙은데 키는 작았고, 풍기는 분위기는 굉장히 시니컬했다. 나는 원래 키가 크고 순하게 생긴 상을 좋아했기에 처음엔 티끌만 한 관심도 없었다. 그렇게 몇 달이 흘러 11월 즈음이 되었다. 공교롭게도 E와 나는 늘 비슷한 시간대에 체육관을 찾았고, 좁은 공간에서 어쩔 수 없이 그가 움직이는 걸 자주 보게 되었다. 가만 보니 키만 작을 뿐, 유명 연예인을 묘하게 닮은 굉장히 잘생긴 얼굴이었다. 무엇보다 여태껏 본 어느 남자들보다 하체가 탄탄했다. 나와 합을 맞추며 공을 쳐줄 때의 매너와 태도 역시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다. 5개월 만에, 나는 서서히 그에게 동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폐쇄적인 체육관 안에서 내가 대놓고 꼬리를 칠 깜냥은 안 됐다.


기회는 엉뚱한 곳에서 찾아왔다. 연말 송년회를 한다며 체육관 사람들이 우리 집 근처 식당에 모인다는 거였다. 평소라면 죽어도 안 갔을 자리지만, 그가 참석한다는 소식에 퇴근 후 부리나케 달려갔다. 내가 지각을 했는데, 하필 그 남자도 나보다 딱 1분 먼저 도착해 있었다. 자연스럽게 우리는 같은 테이블, 그것도 마주 보는 자리에 앉게 되었다. 운명이었다. 알코올이 혈관을 타고 돌기 시작하자 내 안의 앙큼한 자아가 고개를 쳐들었다.


'오늘 얘를 자빠뜨려보자.'


그의 회사는 우리 집 근처였고, 심지어 번듯하고 좋은 직장이었다. 그래, 내가 좀 속물일 수도 있지만 어쩌겠는가. 나는 그에게 은근슬쩍, 하지만 꽤 노골적인 관심을 표했다. 굳이 내가 애쓰지 않아도 칙칙한 무리 속에서 외모가 꽤 반반한 젊은 남녀 둘이 마주 앉아 있으니, 주책맞은 아저씨 아줌마들이 알아서 불을 지펴주기 시작했다. 급기야 한 분은 "둘이 같이 가보라"며 전시회 티켓까지 쥐여주었다. 우리는 굳이 거절하지 않고 눈빛을 교환했다. 그가 자연스럽게 티켓을 챙겼다. 게임 끝이었다. 회식 장소 바로 밑은 하필 내 단골 바였다. 알코올로 장전된 텐션을 무기 삼아 나는 그에게 던졌다. "바로 옆 바에서 한잔 더 하실래요?" 그는 흔쾌히 승낙했다. 방향이 같은 다른 회원을 역까지 다정하게 바래다준 뒤, 단둘이 바에 앉아 축배 같은 술잔을 부딪치려던 찰나였다. 그가 나를 정면으로 보며 입을 열었다.


"저 사실, 게이예요."


그 뒤의 일은… 뭐, 굳이 길게 설명하지 않겠다. 술만 들어가면 고삐 풀린 '도라이'가 되는 내가 그 자리에서 얼마나 진상을 부렸을지. 결론만 말하자면, 우리의 오붓한 데이트를 약속했던 그 전시회 티켓은 결국 단골 바 사장 손에 넘어갔고, 나는 다음 날 아침 그에게 사과 카톡을 보내야만 했다. 그는 끝까지 너무나도 나이스했다. 젠장. 카톡 프로필에 10년 전 여동생과 찍은 다정한 사진을 아직도 걸어두는 남자. 매너 좋고 하체 탄탄하고 내 기준에 완벽해 보였던 남자는 결국 다 게이인 걸까. 세상에 괜찮은 남자는 유부남 아니면 게이라더니. 나는 이 뻔하고도 비극적인 명제를 아주 뼈저리게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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